사람들이 죄의 근원이자 시작이라고 말하는 선악과의 사건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를 죄로 보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물론 하나님은 언제나 행위를 보시지 않는다고 하시고 예수님과 사도들도 행위로 의로워지거나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라거나 아니면 “왜 불순종하였느냐?”를 묻지 않으셨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담이 어느 장소에 숨었는지를 몰라서 그렇게 물으셨을까? 전후 문맥으로 보면 아담이 숨었으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다는 것은 숨바꼭질 술래가 묻는 것과 같이 물으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어렵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절대적인 기초인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다.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하나님, 전지(모든 것을 알고) 전능(모든 것이 능한)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숨었는지 모를 리 없는 것에서 성경을 봐야 한다. 즉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으시는 “어디(where)’는 장소가 아니다. 성경은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럼 그 “어디”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다. 이것이 존재 정체성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 믿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목적도 없이 사람을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개념 없는 신이고, 만들기는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존재의 목적은 다른 존재가 부여한다면 하나님은 무능한 하나님이거나 더 상급자가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믿음이 바로 이것이다. 이 믿음이 없다면 구원은 논제조차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어디에 있는지 물으셨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정한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의 죄, 하나님 앞에 모든 인생의 죄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탈한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죄다.


그럼 사람의 존재 목적을 이탈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거꾸로 반문해보자. 자신은 인생의 목적, 육신을 가지고 삶을 살게 된 목적을 알고 있는지. TV 연예 프로그램에서 한 엉뚱한 만화가에게 “태어난 김에 사는 사람”이라고 놀리는 것을 봤는데, 실상은 모든 사람이 태어난 김에, 태어났으니 삶을 살아갈 뿐 자신이 왜 사는지를 모르고 있다. 왜 사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존재의 목적을 이탈했다는 것이다. 이탈한 것이 죄고, 그것을 모르는 것이 죄다. 스스로 이탈하지 않았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정당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인생의 존재 목적을 보이셨으니 이제는 소용없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창조주가 분명하게 보이셨는데 피조물이 선택하지 않고서 어떤 변명이 죄를 면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명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이유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면서까지 인생의 목적을 말씀하셨는데, 피조물인 인생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무슨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모두가 다 죄인인 이유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이렇듯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인생의 목적, 육신을 가진 삶을 사는 목적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은 자기 인생을 창조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구원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얻는다, 스스로 알지 못하는 인생의 목적을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이셨기에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베푸셨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삶을 주신 목적을 아는가? ‘아! 구원은 그런 것이구나!’라고 머리로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자기 본성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 안에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있다는 것이 보이고, 십자가라는 인생 세상 가장 낮은 자리와 그 자리로 가지 않아도 되는 능력과 권세가 있음에도 끌려가는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되어야 구원 받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삶을 주신 목적을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너무 분명하게 자신의 본성이 되어 있어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언컨대 당신은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교회에 다닌다고, 세례문답 했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은 결론적 표현일 뿐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본성이 전혀 다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자 인생의 목적을 말씀하셨음도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구원 받았다 할 수는 없다.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사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하여 가지신 가장 근원적인 창조의 목적,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고, 존재의 목적을 상실하면 죽은 것이다. 목적 안에서 보면 목적을 달성한 죽음이 있고, 반대로 목적을 알지 못하고,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한 것이 있다. 구원 받기 전 상태를 사망의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이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와 사망의 자리는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구함을 받는다는 의미다. 


사람이 만드는 모든 것도 목적이 있다. 목적이 없다면 하나 같이 쓰레기통으로 간다. 컴퓨터 파일조차 그렇다. 그렇게 모든 것을 목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정작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은 모른다. 심지어 모른다는 것을 개의치도 않는다. 분명한 것은 자기가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존재의 목적과 존재하게 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 분명한 명제 앞에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그 성품을 표현할 형식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또한 목적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지, 아닌지 그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고 근원적인 정체성이다. 창조주의 창조 목적에 맞는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그 목적 밖에 있다면 그것은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자릴 벗어난 것? 그것이 바로 죄다. 조의 어원인 하말티어가 그 의미다.


그렇다면, 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리를 떠난 것이기에 구원은 그 자리로 회복되는 것이다. 목적을 상실한 자리에서의 회복은 당연히 목적이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회복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회복된 육신 가진 인생의 모습을 보이셨기에 모든 인생은 심판을 받은 것이 되었다. 기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기준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이신 삶이 되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구원인 이유다.


이와 같이 구원은 간단하지 않다. 기준도 분명하다. 그것은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가혹하고 어려운 기준이다. 세상의 가치를 신앙에 접목한 자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기에 하나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하나님을 조각하여 우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바람대로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기준이다. 그리고 오늘날 스스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이런데 구원이 쉬운 것인가?


구원은 인생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표상과 기준은 예수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목적이 회복된 삶이 무엇인지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세상에서 왕이 되고 성공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가 되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족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의 가치 앞에 자신을 내어 주는 종과 죄인이 되는 것이 그 목적으로 사는 존재임을 보이셨다. 


따라서 이것에 어떤 가치가 더해진 것도 구원이 아니고, 모자란 것도 아니고, 반대로 세상의 가치를 좇아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좋아 세상을 이긴 자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구원은 오히려 그런 가치와 삶을 떠나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당신은 어디서 구원을 받았느냐고 물어오면 하나님께서 나를 조성하신 목적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를 좇아 애굽의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는 것을 평안과 성공, 의와 가치, 은혜와 축복으로 알던 삶에서 하나님이 나를 조성하신 목적대로 사는 삶으로 이끌림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을 얻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