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문제다. 그 절대성에 비하면 사람들은 의외로 구원을 간단하게 생각한다. 아니 그냥 교회에 출석하고 등록하면 당연히 구원은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생각 아니 질문을 해 보자. 구원을 받았다면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며, 구원 받기 전과 지금 무엇이 다른가?


구원은 죽을 자리,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서 은혜를 입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구원을 쟁취했다고 하지 않고, ‘얻었다’,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죽을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자기의 노력이나 공로 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다. 


자기 힘이 아닌 은혜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구원은 명백히 죽을 자리,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원은 도무지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인가? 이것을 분명하게 정의하지 못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고 말장난에 불과하다.


물론 상투적인 표현으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또 죄의 자리는 어디며 사망의 자리는 어디인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려면 자신의 과거 어떤 자리가 죄의 자리인지, 어떤 상태가 사망이었는지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을 구원한 이를 믿고, 감사하고, 그가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진심일 수 있을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려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는 알아야…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니 상투적으로 죄와 사망에서부터라고 하는 것 때문이다.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제 그 자리와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아무리 양보해도 자신이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이제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할 텐데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이 과연 그럴까?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기도할 때 마다 ‘회개’와 죄를 뉘우침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이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은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 말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엄청난 모순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것은 큰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의 이면을 살펴보자. 이를 위하여 이 모순을 다시 생각해보자.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죄 없는 사람이 되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믿는 모순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것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에 있다. 그리고 죄를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어긴 것이 죄고,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 죄의 자리에서 건져내시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모순에 빠졌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의미다. 안다는 것은 모순이 없다. 모든 것을 막는 방패와 모든 것을 찌르는 창, 어느 것이 이기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순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무엇인가? 죄의 시작은 선악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이 죄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또한 순종을 지극히 강조하고 있으니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려운 선악과가 어려우니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접근하고서 그것을 선악과의 문제 전부라고 보는 것이다. 불순종을 죄의 시작이라고 보기에 죄는 성경이 명한 것을 순종하지 않고 그릇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신학과 생각과 신앙은 결국 죄를 <행위>로 본다. 성경을 지키지 않는 <행위>를 죄로 본다. 


죄를 행위로 보는 것은 죄에 대한 아주 간편한 해석이고 접근이다. 물론 죄는 결국 불순종이라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행위는 언제나 본질이 아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생각이 나타난 것이고, 그 생각은 그 사람의 본성과 정체성(Identity)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죄의 개념이 가진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행위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는데 있다. 이것은 도저히 메울 수도, 분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 말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죄의 주체, 개념을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죄라는 것은 행위가 주체이고 본질이라고 여겨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행위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범하는 불순종의 자리가 구원을 받아야할 죄의 자리였고, 구원은 죄가 없어진다는 것이니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성경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면 죄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 않은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신호위반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작 자신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으니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면서 죄 없다고는 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나마 자신이 이런 모순에 있다는 것을 인지라도 하고 있으면 다행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모순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으려니 변명이 필요하다. 자기 상태, 자기 신앙의 모순을 감출 변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변명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집단이 있는데 바로 신학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변명들을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며 저주하셨고, 회 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그 대표적인 변명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경 읽고, 기도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깨어 있어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노력을 효율적으로 할 것인지 연구하고 서로 나눈다. 심지어 그것을 나눔이라고 한다. 점점 수렁으로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달궈지는 냄비 안에 있는 개구리마냥 자신이 더 깊은 수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더 열심히 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수렁과 늪에서는 열심일수록 더 빠져든다. 이런 어리석음을 신학이 이끌고 있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죄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죄의 정의가 잘못된 것은 행위를 죄의 주체로 보기 때문이다.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판단한다는 것은 행위의 주체인 육신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나타난 것이 본질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믿는다는 의미다. 성경도 문자 그대로 보고, 성경에 있는 기사도 기사 속의 사람들의 행위를 기준으로 본다. 그렇게 나타난 것을 행위로 보니 구원 받은 사람이 천국에 가면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 것이라고 말한다. 천국에서 금은은 도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배고프지 않고 항상 기쁜 곳이 천국이라고 하면서 금 면류관에 큰 기와집은 도대체 왜 필요한가? 이렇게 모순이 끊이지 않는 신앙을 하나님 믿는 신앙으로 여기고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죄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든지 아니면 구원을 받지 않은 것임을 자백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다.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기 때문이지, 정말로 하나님의 의와 뜻과 생각이 무엇인지, 그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결정적으로 그것이 자신과 어떤 상관인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이 제 아무리 자기 입으로 또 신학적 논리나 교회의 증서로 구원을 주장해도 그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구원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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