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이 ‘구원에 대한 담론’이란 글을 쓰게 된 동기? 이유는 사람들이 구원을 너무 쉽고 간단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구원을 쉽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 안에 있는 일상적 비판의 일환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이 성경을 대하는 상식적 논리로만 봐도 완연한 모순임에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 시키고자 함이다. 구원에 대하여 모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구원이 없음에도 있다고 여기고 살아가는 신앙이다. 그 신앙에는 분명히 경각심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이유는 아주 많다.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곧 Identity를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다. 성경 속 대표적 우상이자 이방 신(神)인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다산’의 신이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겨서 인생의 풍요와 번영을 얻겠다는 의미다. 육신의 삶의 풍요와 번영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섬기는 신이 바로 바알과 아세라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첫 번째 이유 –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 그 어디에서도 사람의 겉모습에 해당하는 육신의 일이나 외모를 중히 여기지 않으신다. 육신의 겉모습을 가지고 판단하시지도 않고, 육신의 평안과 삶의 번영과 성공을 복과 은혜라고 말씀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그것이라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준다는 것이야 말로 완전한 모순이다.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라는 정체성이 무너진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이 명백한 신앙의 핵심 하나 만으로도 하나님은 어떤 행위나 겉모습을 인하여 형식인 육신의 평안을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며, 육신의 일을 가지고 심판하시는 분도 아니며, 보이는 세상의 일이 세상의 가치로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하나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께, 하나님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으시는 것을 늘 구하고, 하나님이 전혀 의로 삼지 않는 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서 하나님을 믿는다. 육신의 평안이나 세상에서의 성공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며, 평안과 성공을 얻고자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의로 보시지 않는 분인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늘 하나님을 바알과 아세라 취급을 한다. 그러면서 또 구원은 하나님께 받았다고 한다.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 여호와가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 부를 뿐인데 하나님께서 구원과 복과 은혜를 주신다고 여기고 있다.


이것에서부터 사람들이 가진 신앙 안에는 구원이 없음이 명백하다. 결론적인, 최종적이고 쉬운 표현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고, 그 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믿으며 성경을 행동으로 지킨 공로와 바꾸는 장사를 하는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 존재의 신인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도 아니고 은혜도 아니며 복도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하는 것이 이것이라는 것에서, 또 교회에 가지 않고, 성경을 어긴 행동 다음에 어떤 불행이나 예기치 않은 일을 당했을 때 ‘벌 받은 것인가?’ 걱정하는 것이나, 그렇게 벌 받을까봐 노력해서 성경을 지키려는 신앙 안에 있다는 점에서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받았다고 믿는 아니 정확히는 믿고 싶어 하는 구원은 허구며 망상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며, 그 구하는 바를 얻거나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신앙은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 믿는 것이기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은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두 번째 이유 – 무엇으로부터 구원 받았는지 모른다.


다음으로는 구원이라는 정체성이다. 앞선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구원을 받았다면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지, 무엇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는지가 명확해야 한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고, 무엇에서 해방되었는지도 모르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성경이나 신앙을 떠나 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물론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은 하지만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순 속에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이며 허망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런 구원은 없다.


구원을 받았다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 알아야 하고, 무엇에서부터 해방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면 죄는 무엇이며, 사망은 또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자신이 구원 받은 죄와 사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구원이 무엇인지 알 리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정체성도 모르는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단지 괴변일 뿐 신앙도 믿음도 아니며 심지어 지식도 아니며 상식적이지도 않다. 몰상식을 믿음이라 믿지 않는 이상 그런 구원은 없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죄도 사망도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죄와 사망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육신의 행위가 어떠함을 가지고 죄를 판단한다. 사망은 육신의 호흡과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 믿고 있으니 행동을 죄라 여기고, 육신의 일이 풍요롭지 않고 번성하지 못하면 벌과 재난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죄와 사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앞선 글 혹은 블로그의 다른 글들을 참조)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세 번째 이유 – 십자가를 모른다.


사람들이 구원을 아주 쉽게 생각하는 이유는 어이없게도 십자가에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혹은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말을 곡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십자가의 대속은 한 마디로 “죄는 사람이, 벌은 예수님이”라는 생각이다. 내가 죄를 범했는데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았다는 것이 십자가에 대해 사람들이 굳게 믿는 생각이다. 그렇다보니 구원은 너무 쉬운 것이 되 버렸다. 오래 전 영화 ‘밀양’에 묘사된 유괴범의 논리가 사실 그것이다. 유괴하여 살인한 아들의 엄마에게 사과할 것이 없다고 한 이유가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사했기 때문이라는 유괴범의 논리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받았으니 나는 구원 받았다는 논리는 같은 것이다.


십자가가 ‘죄는 내가, 벌은 예수가’가 아닌 이유는 사실 명확하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십자가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가야하는데 가지 않는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신 것이다. 누구나 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한 자리고 인생의 목적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외면하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오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면서 우리가 갈 바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첫 열매라 하고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모르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을 얻음으로서 얻는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모르면 죄도 사망도 성경도 십자가도 모른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 모든 세계는 그 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무나 당연하게 하나님이 존재의 신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담을 그릇이자,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삼기 위함이다. 그렇게 표현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끌려가면서 보이셨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인 우리의 운명이고 존재 정체성이며 우리가 존재하게 된 목적이자 의미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의 사건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과 이유까지 다 포함한 것이다. 


사람을 향한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인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지신 의와 뜻이 육신이 된 모습이 아들이고 그 첫 아들인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 모습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크고 위대하며 놀라운 원세와 능력과 지위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을 보니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수 없는데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니 모독이라며 십자가에 못 박았다. 세상에서의 평안과 번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과 같이 초라한 모습이 하나님 아들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의 주장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의로운 아들인데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세상의 가치로 심판하는 심판 앞에 자신을 내어 주므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의인인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주장과 심판 앞에 자신을 죄인으로 내어 주신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우리보고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 즉 의인이 죄인에게 심판 받아 죄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 성품을 표현하는 도구로 육신을 인생에게 주셨으니 그 육신으로 예수님이 보이신 것과 같이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 삶이 바로 구원 받은 삶이고 구원의 증거라는 의미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을 보전하고 평안하고, 육신이 도모하는 일이 잘 된다고 생각하고 믿기에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이라고 자기 맘대로 믿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심판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가치관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어야 한다는 가치관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기는 것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가치관에 의해 심판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며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게 도무지 무슨 괴변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 구원이 아닌 네 번째 이유 - 아직도 노력하고 있기 때문


이와 같이 구원은 간단하지 않다. 구원을 받았다면 예수님과 같이 다른 사람의 주장 앞에 나의 주장을 내려놓는 삶을 사는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다.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생명이 거듭난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거듭났다면 본성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가? 어제도 오늘도 분명히 내일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본성이 노력으로 되는 것인가? 


거듭났다는 것은 아무리 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본성이 바뀐 생명으로 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그것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다.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다시 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구원은 이와 같이 어려운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 교회에 가서 세례문답에 고백했다는 것으로 얻는 것이라고 여기는 구원, 죄는 재가 범했는데 벌은 예수님이 받았기에 사함 받았다고 여기지만 정작 자신은 죄 없다 말하지 못하는 구원, 생명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하면서 아직도 그리스도와 같아지기 위해서 노력한다면서 이미 받았다고 말하는 구원은 다 허상이다. 그런 것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본성이 바뀐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살지 않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본성과 삶이 있을 때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시작이다. 구원은 종착지가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나는 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듯, 거듭났다면 거듭난 생명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는 것이다. 이런 이치가 자기 안에 생수와 같이 넘치지 않는다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천국에 가지 못한다. 쉬운 말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이렇듯 구원은 어렵고 희소한 것이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의 수가 적다고 하였겠는가? 당신의 구원은 본성이 이끌고 있는지 돌아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