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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장, 막 12장, 눅 20장)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 물었다. 가이사는 로마의 황제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속국 삼고 있는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 일인지 물었다는 것이다. 세금을 낸다는 것은 그 나라의 국민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은 어떻게 할 것이냐며 시비를 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외식이라고 하셨다. (눅 12:15)


세금과 독립과 같은 세상의 일을 해결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이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그런 자들이 예수님께 세금 납부에 대하여 물어 온 것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지 시험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질문의 본질을 숨기고 있음을 아셨음을 외식함을 아셨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일과 육신의 문제를 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외식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로마가 무서워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할 때도 세금은 문제는 없었다.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도 가소롭게 여겼다. 그러니까 예수님 같은 분이 가이사에게 세금 내지 말라고 해서 문제되지도 않는다. 당연히 예수님께도 세금은 문제도 아니었다. 예수님께 세금은 염려하지 말라고 한 먹을 것, 입을 것의 문제지 이 땅에 오신 목적이나 하나님 뜻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세금이나 독립과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직임이 아니라는 뜻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이 말씀은 사실 불쑥 나온 말씀이 아니다. 앞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한 부자청년의 일과 옥합의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을 보고서 ‘이것이 무슨 짓인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 해야지?’라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에게 있을 것(막 14:7)”이라고 하신 말씀들은 모두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이다. 


세금과 독립과 같은 국가적 문제, 사회 불균형인 가난한 자의 문제 그리고 그런 이슈를 해결하거나 해결에 기여하는 선한 행동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간절하게 전하시는 그리스도는 전혀 다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은 책임 회피나 괴변 같은 답변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간절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그런 것은 천부께서 다 아신다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다. 공중 나는 새와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이다. 우리 먹을 것을 아신다고 하셨다.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다. 즉 육신의 일은 육신이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세상을 펼쳐 놓고 경영하신다. 세금은 그 문제 범주를 대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성경이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는 존재라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그것을 해결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전하고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대비시키기 위함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말씀은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말씀과 대비되고,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씀과 궤를 같이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먹을 것, 입을 것과 같은 육신의 문제나, 가난과 질병, 세금과 독립과 같은 문제들은 그리스도의 직임에 관한 것이 아님을 간고하게 말씀하심이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이 이런 뜻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러면 사회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인가?’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그리스도를 모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신 것은 그릇된 의를 옳다고 여기며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 육신 가진 사람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이자 그리스도의 정체성임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육신으로 보였으니 그것이 아들인 근본적 이유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아주 간단한 말로 함축해서 표현해 본다면 “너 옳다”라고 인정하고, 옳다는 이에게 자기 육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내’가 아닌 ‘네’가 옳게 되면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어야 한다. 옳다는 대로 하는 것이 이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 아들이 목숨을 내어주신 것이 십자가다.


사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근원이다. 세상의 모든 갈등과 문제는 서로가 “내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나라가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지배하는 나라가 자기들이 옳다고 여기고 이를 주장하기 위하여 무력을 쓴 결과고, 사람들 사이의 모든 다툼과 갈등도 “내가 옳다‘ 주장하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가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관계에서는 옳다는 자의 폭력과 강압이 있을 수는 있어도 갈등은 없다. 예수님을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 모습이다.


즉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를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옳다는 주장 앞에 자기 육신을 종과 같이 내어 주는 본성을 가진 존재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고 하신 것은 세상의 법을 가진 이들은 세상의 법대로 행한다는 의미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속한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은 십자가를 지러 가는 자신의 본성대로 행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문제를 해결한다. 예수님께서 막힌 담을 허시는 화평이시고, 모든 것이 된다고 하심이 바로 이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곳인데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이들이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음은 당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대척점에 있는 그리스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가난을 없애고 독립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다.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예수님이 그런 존재인지 확인하고 시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도하고, 세상의 가치로 비싼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신앙인들은 가이사에세 세금을 내는 것이 옳은지 시험한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십자가로 끌고 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들을 아시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문장 자체도 현답이지만 그리스도는 너희가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다. 그러나 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이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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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장, 막 12장, 눅 20장)


포도원 주인과 소작농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두 가지 의문이 있다. 하나는 소작농들이 ‘왜 소출을 주지 않으려 했을까?’다 단순하게 주인이 되려고 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나중에 주인이 와서 너무 단숨에 그들을 징벌하는 것에서 애초에 게임이 안 되는 것인데 왜 그랬을까 하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소출을 다 달라는 것도 아니고 얼마를 달라고 했고, 포도원도 자기들의 것이 아닌데 일반 상식으로 도저히 그럴 이유가 없다. 


다음으로 의문스러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 끝에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시편(118:22)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포도원을 만든 사람이 소작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소출 얼마를 얻으려 했는데 주지 않아 진멸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비유의 내용과 건축자의 버린 돌은 언뜻 상관성을 유추하기 어렵다. 이것이 참 의문스럽다. 반면에 이런 다소간 상식적이지 않고 상관성 없는 이야기를 대제사장, 서기관과 장로들은 이 포도원 비유와 말씀이 자기들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찰떡 같이 알아듣고 화를 냈다.


우선 이 비유의 말씀 앞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이 와서 예수님의 권세에 대하여 질문하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답하면 대답하시겠다고 한 것에 대하여 대제사장과 무리들이 답할 수 없다고 하자 예수님께서 “그럼 나도 답 할 수 없다”고 하신 대화가 있다. 포도원 비유의 말씀은 바로 그 상황에 이어서 나온 비유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 21장, 막 11장, 눅 20장)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는 이 시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과정에서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있는 시점이다. 모든 대화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사실 성경의 주제가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그 주제의 흐름에서 보면 제사장 무리가 예수님께 권세를 물은 것도 예수님께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물은 것이고, 이 비유를 통해 그 권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고 소작농들은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를 죽이려 드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재밌는 것은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장로들은 지금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포도원이 나온다. 포도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예수님을 상징하는 과일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시기도 했다. 성전을 지을 때, 또 제사장의 옷을 만들 때 청색, 자색, 홍색 실을 함께 엮었는데, 이 자색실 역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아담은 ‘붉다’는 의미의 단어고 하늘은 항상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 그 기초다. 하늘의 색인 파란색과 땅의 색인 붉은 색이 하나가 되어 포도와 같은 색인 자색이 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과 그 둘이 말씀이 육신이 되듯 하나가 된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함께 역여 성전과 제사장의 의복을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과 그 둘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의미다.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인이 포도를 얻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하시는 분이며, 이를 위하여 포도원과 같은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기 천지창조와 사람을 지으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창 1:27)을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을 얻으려고 세상과 사람을 만드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결국 이 세상을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목적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사람을 얻고자 하심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사람이란 십자가를 지고 낮은 자리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그러면 앞서 제기한 문제, 왜 소작농들은 주인이 달라는 소출을 주지 않았을까를 생각해보자. 충분히 드릴 수 있었다면 소출을 드리지 않을 별다른 이유가 없는 상황인데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드릴 것이 없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 비유를 제사장 무리는 바로 잘 알아들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신들의 종교생활이 하나님께 드리지 않은 것이며, 그들의 신앙 가치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지키고 행하면서 살았는데 이를 비난한 자들을 배척하고 심판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종을 죽인 것이라고 하니 화가 난 것이다.


포도원 비유의 핵심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드린다는 것은 주인 곧 하나님의 종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당연히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예수님 말씀의 대상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소출이라 여기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포도, 곧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이 원하신다. 그것이 포도원, 곧 세상을 지으신 목적이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 이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를 말씀하신 적이 전혀 없다. 사람이 인지하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며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본성이 되어 하나님 아들로 살아가는 사람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세계로 가져오면 그 세상의 전부가 된다. 각 사람의 개인적인 인생은 그의 전부다. 한 개인의 출생은 그에게 천지창조와 같고, 한 개인의 죽음은 그에게 세상의 종말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가진 인생은 하나뿐이다. 그런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구한다는 것은 그 인생 자체가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개인은 포도원 주인이 원하는 포도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삶을 드리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보낸 종과 아들을 죽이는 삶, 그 둘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말씀이 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것은 건축자와 건축자의 버린 돌을 모퉁이 돌로 쓰는 이는 모퉁이 돌 곧 주춧돌에 대한 가치와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주춧돌과 같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세상의 관점과 하나님이 다르다는 말씀이다. 주춧돌이 다르다면 집 곧 성전이 다르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비싸고 좋은 건축자재와 고가의 멀티미디어 장비로 성전을 건축해야 거룩하고 좋은 성전이 된다고 생각하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가진 생각과 가치로 볼 때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심판을 받아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주춧돌로 삼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사람이라는 성전과 사람들이 조각한 하나님이 거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포도원의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소출을 주지 않은 이유와 같다. 주인이 원하는 포도와 자신들이 생각하는 포도가 달랐기 때문에 드리지 못했듯 성전의 주춧돌로 삼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도 하나님과 사람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소작인들은 건축자와 같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가치와 안목과 의를 가지셨다. 그들은 주인이 원하는 포도를 건축가와 같이 다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내어 놓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소출을 받으러 온 종들을 죽였다. 그리고 아들을 죽이면 이제 자신들이 원하는 농사만 지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아들도 죽인 것이다.


이 비유의 말씀을 옛날 유대인들을 책망한 비유로만 들으면 안 된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들어야하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과 다르다. 자기 육신의 정욕이 추구하는 평안과 성공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를 구한다. 그 관점에서 예수님은 버린 돌이다. 세상의 높은 곳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 끌려 스스로 낮아지고 죄인이 되며 육신을 종과 같이 수고하는 것에 내어주는 그리스도는 높이 올라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가치관을 가진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을 건축하는 건축자가 볼 때는 쓸모없는 돌과 같아서 버린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버려지는 온전한 그리스도를 구하실 때 드릴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관련하여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갈등을 표현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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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 행함은 생명의 본성으로부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16. 04:00 Writer : 김홍덕

생명이란 존재는 그 본성이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수만 믿으면 아무렇게 살아도 되느냐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정체성이 아무렇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 님께서 살았다고 말씀하시는 선한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나타났 는데 행동이 죄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생명으로 여기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 아래 있으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 가 논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선하다고 믿는다면 선하신 하나 님의 의가 어떻게 자신의 본성이 되는지가 논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난 그리스도의 생명이 악을 범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생명 없는 사람의 생각


선하신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면 당연히 하나님의 선하심이 행동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자신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된 다른 사람의 행동도 선한 것으로 보게 된다. 서로 그런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다. 이것은 대부분의 신앙인에게 생소할지 몰라도 이것이 이해되지 않고 경험한 바가 없다면 아직 거듭난 생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분명한 말씀과 명제와 논리 앞에 솔직하지 않다면 가능성조차 없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생각해 보면 이것은 너무 분명하다. 선하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이신 것은 다 선한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은 찬양했지만 예수님의 행동에는 늘 시비를 걸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행위가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 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선하다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선한 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동일하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던 불신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오늘날도 엄연히 있다.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분열하고 싸우는 것도 이 불신 때문이다. 서로가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사람들이 모였다는 교회 안에서의 다툼이 그렇고, 자신은 행위를 의롭게 여기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의 행동을 자기 기준으로 책망한다. 그 신앙 관이 예수님을 향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가하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행위규범에서 벗어나 존재의 법 아래 있다면 사람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고, 행여 존재의 법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책망하면 순순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내어 줄 것이기에 다툼이 있을 이유가 없다.


행함은 본성에서 나온다. 이것은 생명 세계 불변의 진리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 믿고, 하나님은 외모나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죄를 논할 때는 행동을 정죄 하고 심판할 수는 없다. 이것이 모순적인 상태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의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사람의 행동은 모든 것이 선하다. 이것이 초점이다.


그러므로 선한 생명을 가졌는데 악한 행동을 하면 되겠느냐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신앙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선한 생명이 어떻게 악한 행동을 한단 말인가? 하나님을 선하게 믿고 생명의 법에 따라 생명의 본성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면 도저히 그런 것이 궁금할 수 없다. 행함과 믿음에 대하여 헛갈릴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생명의 법도, 하나님의 선하심도, 구원도 없는 상태다. 그땐 그렇다는 것은 시인하는 것이 먼저다. 그럼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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