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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장, 막 11장, 눅 19장, 요 2장)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시니 성전에서 매매가 성행했다. 팔고 사는 것은 비둘기와 같은 제사의 제물이었다. 유월절의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멀리 오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미리 준비하지 못한 번제의 제물을 성전에서 사서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고 장사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마 21:13)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 2:16)


이 말씀은 단순하게 성전을 시장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먼저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하고, 아울러 장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사람들은 기도를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능동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늘의 뜻이 땅 곧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100% 수동적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아하! 그렇구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기도는 제사와 같고, 제사는 자신을 드리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삶을 주관하시도록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는 것에 자신을 드린 사람이어야 기도와 믿음이 수동적인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도와 제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뜻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의 본질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그곳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자기 심령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것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이다. 성전이라는 곳은 하나님이 오셔서 거하는 곳이기에 사람이란 존재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사람이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거하여 그 사람의 삶이, 육신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제사이자 우리 몸이 성전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사의 본질, 그리고 우리 육신의 존재 목적이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의 존재성은 Give & Take가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장사의 가장 기본적인 매커니즘이 Give & Take다.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께 어떤 것을 드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심판하거나 우리가 필요한 것을 더 채워서 부유하게 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사람의 행위를 관찰하고 심판하고 상주시는 일이나 재미를 위해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그 반대급부로 육신이 살아가는 동안의 필요를 얻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의 필요는 천부께서 이미 다 아시고 준비해 놓으셨다고 하셨다. 그것이면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시 23:1) 장사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성전도 하나님의 의를 담는 성전인 사람 그 자체도 장사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장사를 하려고 한다. 그게 신앙이라 믿는다. 하나님의 반응을 경험하고 체험하며 그 규칙성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순서로 예배드릴지, 어떤 분위기로 예배드릴지 연구한다.(신학 내 예배학과 같이) 어떤 때는 어떻게 해야만 한다(have to)고 말한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반응이 기대와 다를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모든 신앙의 행태가 바로 장사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성전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육신의 정욕에 쓰려고 평안과 성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구하는 것을 주실 마음이 들도록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드리려는 모든 것을 말한다. 비단 제물이나 재물이 아니어도 성경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자녀들 건강하고 성공하며 사업이 잘 되고 심지어 죽어서 천국에 가면 그것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얻을 것이라는 범주의 모든 말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사다.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과 거래하여 얻고자 하는 것을 주시고 해결하는 분이 바로 그들의 메시아, 그들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을 구하는 모든 신앙이 믿는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그리스도다. 바로 장사하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인 나에게 너희 육신의 정욕에 쓸 것을 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런 것을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나 램프의 요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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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장, 막 11장)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유월절은 유대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기여서 가신 것 같지만 실상은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의 어린양이시기에 제물이 되려고 가시는 것이다. 죽임 당하는 그리스도라서 죽으러 가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환호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며 자기 옷을 벗어서 예수님 가시는 길에 깔면서 환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는 그리스도를 환영한 것이 아니다. 육신과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그리스도를 환영한 것이다.


다음날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시장하셔서 무화과 열매를 찾았지만 열매가 없음을 확인하시고 그 나무를 저주했다. 그 나무는 이후에 말랐다. (막 11:20-21) 이상한 것은 유월절 때는 무화과가 열매를 내는 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화과가 열매가 없다고 저주했다. 무화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나라 목(木)이다. 국가를 상징하는 나무다.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의미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함은 풍성한데 열매가 없다는 말씀이다. 행함만 풍성하고 행함의 근원인 생명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의 환호다. 그리스도를 크게 환대하는 것 같으나 열매와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신의 문제, 민생의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나라의 독립을 해결해 주는 메시아를 기다렸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자를 살리는 예수님이 독립기념일 같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니 기다려온 메시아라 기대하고 믿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되지 않아 강도인 바라바와 예수님을 바꾼다. 예수님께서 독립은 고사하고 허무하게 잡혀서 심문을 받는다고 하니 그럴 바에 폭력적인 바라바를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바라바를 선택했다. 그들에게 열매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드러난 것이다.


열매가 없다는 것은 생명의 존재 목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앙의 형식이야 날이 갈수록 무성해진다. 그 뿐 아니라 그 무성함을 심화시키고 화려하게 만드는 값비싼 음향, 영상 장비와 온라인 예배 시스템과 같은 것은 날로 발전한다. 그렇게 사람을 모아 구원을 전파하고, 강단에 서서 “당신들은 구원 받았습니다, 은혜를 구하시오”라고 외치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 말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의 그런 죄책감을 덜어 줄 목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예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성경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당신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십니다.”라며 방점을 찍는다. 오늘날의 신앙은 이렇게 무성하지만 정작 자신이 죄 없다고 말하지도 못하는 신앙이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신앙이다.


그와 같이 잎만 무성한 신앙, 화려한 교회, 끊임없이 노력이라는 행위를 독려하는 신앙 속의 그리스도는 당연히 형식이 화려한 그리스도다. 교회를 크게 건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며, 크고 화려한 건축물은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는 세상의 가치 곧 돈으로 비싸고 좋은 것, 수와 양으로 볼 때 많고 큰 것이 하나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합당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예수님의 저주를 받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가 전하는 그리스도와 반대의 그리스도니 굳이 저주를 하시지 않아도 그 자체가 이미 저주다. 사람이 자기를 조성하신 이의 목적 밖으로 나갔으니 그것 자체가 저주인 것이다. 예수님이 저주하시자 잎이 마른 것처럼, 사람이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는 일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할 때 사람들이 환호했던 것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인함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고 오천 명을 먹이는 예수를 환영한 것이다. 열매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이 기대하고 마음대로 정의내리고 고대한 무성한 나뭇잎과 같은 기적을 행하시는 메시아로 예수님을 착각하고서 환호했다.


오늘날의 신앙도 그 날의 유대인들과 같이 기적과 같은 공로와 업적에 환호한다. 설교할 제한된 권한을 가지는 목사들을 보면 신학이라는 공부에서 피라미드 위로 올라간 업적을 가지고, 교회에 시무하는 동안 또 어떤 업적과 성과가 있는지를 경쟁하여 더 높은 곳에 오른 자를 더 많은 돈을 주고 청빙해 온다. 성경과 신학이 종목이라고 높아지려는 본성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나님 말씀의 본체이신 예수님도 낮아지고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성경과 신학은 높아지는 것이 은혜롭고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육신의 공로로 이긴 자가 시스템으로 세운 교회의 신앙은 모든 것이 행위와 공로 위에 있다. 물론 말로는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당장 예배를 빠진 주간에 약간의 불의한 일을 당하면 ‘예배를 가지 않아서 그런가?’ 의심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목회자에게 험한 말 하면 저주 받는다.’, ‘십일조 떼 먹으면 경제적인 손해를 반드시 본다.’와 같은 말들은 사람들이 얼마나 행위와 공로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지 증명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행위에 주목하는 것은 나름의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 행위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는 행위, 예를 들어 십일조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유함을 얻으려 한다. 알고 보면 기독교 신앙은 모두 이와 궤를 같이 한다. 기도하는 이유도, 성경을 보는 이유도, 착하게 사는 이유도 모두 그렇다. ‘착하게 살면(행동하면) 복 받는다’는 세상의 일반 논리에 착하게 사는 이유를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고, 그렇게 하면 복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회 칠한 것 뿐, 세상과 같은 이유, 같은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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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바디매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9. 10. 04:00 Writer : 김홍덕

(마 20장, 막 10장, 눅 18장)

예수님 공생애 마지막에는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변화산 아래에 있던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 주신 것, 베드로가 휘두른 칼에 베여 떨어진 귀를 붙여 주신 것 그리고 굳이 이야기한다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마르게 하신 것 등이 있다. 그리고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신 일이다. 소경 바디매오의 믿음은 제자들마저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 예수님과 반대로 생각하는 상황에서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를 좇아가는 온전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바디매오가 보여주고 있다.


바디매오는 소경이다. 눈이 보이지 않아 길을 가지 못하고 길 가에 앉아 있다. 길을 가려면 눈이 보여야 한다. 그 길이 땅 위의 도로 같은 길은 말할 것도 없고, 목적하는 바를 향해 가는 과정도 그 목적에 대한 밝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길을 가지 못하고 있다. 어디로 갈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바디매오는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이야기는 육신의 눈을 고친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육신으로 소경인 바디매오를 중심으로 보면 단순하게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안과적 장애를 예수님께서 고치신 사건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육신의 질병도 낫게 해 주신다고 설교하고 또 그것을 믿는다. 그러나 이 사건, 아니 성경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다. 당연하게도 이 사건 역시 예수님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간절하게 설명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제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소경이다. 그들은 눈을 뜨고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하여 보지 못하고 있다. 바로 앞에 계신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분명하게 보고 있지만 그리스도라는 예수님의 온전한 정체성은 보지 못하고 있다. 보지 못할 뿐 아니라 말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니라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동네 나사렛 예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온전히 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말씀이다. 육신의 눈으로 세상 만물을 볼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의하고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그리스도로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에 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온전히 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인 동시에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어떤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을 온전한 그리스도로 볼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여 예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있지만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동네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육신의 눈은 보이지 않기에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가 다윗의 자손 곧 백성들을 구원할 메시아요 그리스도로 믿는 소경 바디매오가 대비되고 있는 이 사건 속의 진정한 소경은 바로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육신의 눈은 멀쩡한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을 때 그 길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당연히 소란스러웠다. 바디매오는 그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나사렛 예수”가 지나 간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 여기에 이 말씀의 핵심이 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알려 주었는데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외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꾸짖어 조용하라고 했다. 그럼에도 바디매오는 멈추지 않고 다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렀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향해 뛰어 갔다. 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자, 세상의 만물이 보이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는 것에 어떤 장애도 없는 자들은 보지 못하는데,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기에 뛰는 것은 고사하고 걷는 것조차 힘든, 모든 것이 장애물일 수 있는 바디매오는 뛰어서 예수님께 갔다. 이것은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경이 뛰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자기 앞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뛴단 말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면 걷는 것도 힘든데 바디매오는 뛰어갔다. 과연 누가 소경인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막 10:50)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사람들은 이중적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라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는 나사렛 예수라 여긴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무슨 일인지 묻는 바디매오에는 나사렛의 예수라고 알려 준다.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 나사렛 예수를 자신들이 선한 것으로 여기는 독립과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그리스도로 지금 받들고 있다. 그래서 소경 같은 자들을 돌보실 분이 아니니 바디매오를 조용히 하라고 제어한 것이다. 


그러나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었다. 그가 소경임에도 뛰어 가서 만나야 할 분이었다. 바디매오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보지 못함이 바로 소경이고, 자신이 그 소경이라는 것을 알기에 길을 가지 못하고 길 가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인정된다면 그리스도를 봐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설사 지금 당장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 앞에 어떤 장애가 있을지 모르고, 보지 못하니 어떤 것에 걸려서 내가 상할 수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온전한 그리스도로 보기 위해서는 앞도 보이지 않는 소경이 길거리를 뛰어가듯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보려고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셨고 당연히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보고자 한 것은 세상이 아니다. 그가 보고자 한 것이 세상이라면 그가 왜 예수님을 따라 갔겠는가? 이때껏 보지 못한 세상 구경을 가야지. 그러니까 그가 보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다. 사람들에겐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의 예수지만 그에겐 다윗의 자손이고 어두워 보지 못했던 인생이 가야할 길을 예수님을 통해 보고자 했다. 다윗의 자손이자 인생의 길과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고자 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 기적 같은 치료를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 집이나 길로 갔지만 바디매오는 그 길로 예수님을 따라 갔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가 따라가는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시러 가시는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온전한 그리스도가 가는 길, 바로 십자가를 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간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는 참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하신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바디매오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디매오의 모습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야 이미 거리를 소란스럽게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제자들이 따라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은 군중들과 완전히 다른 의미다.


군중들은 병고치고,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를 좇고 있지만 바디매오는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님을 좇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혀 다른 길이다. 바디매오를 고치신 예수님의 남은 여정은 십자가를 지는 것 밖에 없었기에 바디매오가 따라 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십자가 밖에 없었다. 예수님의 그 남은 여정은 오랜 기간 함께 한 제자들에게도 낯설고 감당하기 어려운 길인데 바디매오는 그 길을 따라 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가 얼마나 오랜 세월 소경으로 살았는지 몰라도 보지 못하다가 보게 되었다면 정말로 세상의 많은 것이 보고 싶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니 큰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 가서 고침을 받아 보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가라'고 하셨고, 바디매오에게 수많은 선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사람들이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 동네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고 말하는 예수를 좇아가갔다는 것이 이 사건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다.


이 바디매오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인생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소경인데 인생의 목적을 말씀하신 빛이요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답하지 않는다. 다들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려고만 한다. 육신의 눈은 멀쩡하고, 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나 정작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죄 없다 말하지 못한다. 정작 봐야할 것은 보지 못하는 어두움, 곧 소경인 상태로 있다.


그러다 이전에 듣지 못하던 말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천한 신분이라고 말하듯이 세상에서나 종교적 관점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일러주는 어떤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바디매오처럼 뛰어가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찬송가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3절 가사 중에서)


바디매오는 소경이었다. 그는 길을 가지 못해 길 가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인생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신앙의 푯대가 분명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나사렛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예수를 자신을 구할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기에 예수를 향해 뛰어 간 모습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좇아가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낮은 자리로 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하셨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낮아지는 것은 패배요 재앙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벌과 저주라고 여기는 지배적 인식 아래에서 낮아지고 종이 되는 것이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드리는 것과 모든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그 믿음의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소경이 뛰어 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는 그리스도는 모두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아진 그리스도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고, 교회에 세상에서 이긴 사람이 오면 좋은 교회라 생각하고, 교인들 중에서 세상에서의 이긴 일이 있으면 광고하고 주보에 올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지러 가신 예수님, 세상에서 낮아지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신앙은 모두 천한 나사렛 예수일 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은 이와 같이 다르다. 동(東)에서 서(西)가 먼 것처럼 다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모두가 높아지는 것, 세상의 가치인 크고 위대하고 이긴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아래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며 영광이고 온전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지배적 가치관 속에서 낮아지며 ‘네가 옳다’ 말하므로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패자의 자리가 온전한 그리스도며 온전한 믿음이고 신앙이라고 따라 가는 것은 소경이 뛰는 것과 같이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온전한 구원이고 온전한 믿음이며 온전한 신앙임을 바디매오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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