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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 행함 없는 믿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15. 04:00 Writer : 김홍덕

사람들에게 “성경은 행위규범이 아니다”라고 하면 “그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만 있으면 도둑질을 해도 된다는 말이냐?”라고 묻는다. 제법 예리한 질문 같지만, 사실은 비문(非文)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존재에 관한 것이고 도둑질은 행위에 관한 것이다. 서로 격과 세계가 다르다.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간결한 답은 “당신은 하나님을 모른다”이다.


그렇지만 이 어리석은 질문에는 답을 할 필요가 있다. 다행히 사람들은 육신의 생명과 그 본성이 행동을 자아낸다는 것은 이해 하고 있다. 그 이해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심판 하시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을 하라”는 말씀은 그것을 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고 설명할 때 이해할 수 있는 소양은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온전히 믿기만 하면 사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신앙인들이 이런 말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믿지 않고 있어서 그렇다. 하나님도, 존재의 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사람이 순종하면 하나님의 의와 뜻은 순종한 심령 안에서 성령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생명이 된다.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이 하나님께서 그 본성을 나타내라고 주신 육신을 통해서 표현되고 나타난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단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자기 안에 담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 되면 성령이 생명이 되게 하신 다. 그럼 그 사람은 생명 있는 존재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 시는 생명이 있으면 선한 사람이다. 사람 눈에 행위규범으로 보이는 모든 성경 말씀은 그렇게 생명 있는 사람, 존재가 되기만 하면다 행하게 된다. 나머지는 그 생명과 생명의 본성이 다 한다. 하나님 앞에 선해지려고 자기 자신을 절제하고 신념으로 북돋우어 가면서 노력할 이유가 없다. 사람이 사람이란 본성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은 호흡 있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이고 바꿀 수 없는 것이 다. 이것을 <존재적 관점>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은 바로 이 존재론적 관점이다. 하나님이 존재론적 관심을 가진 이유는그 정체성 자체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만 믿으면 도둑질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 고, 존재적 관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존재적 관점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심도 모르는 것이고 생명도 모르는 것이다. 생명이 있으면 본성이 있고, 육체는 그 생명의 본성 대로 밖에 살 수 없는 단순하지만 변하지 않는 법을 모르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선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존재가 악을 행해도 되느냐고 묻는 것이 질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다행히 호흡하는 사람은 육체의 생명과 그 본성의 관계는 알고 있다. 육체의 행동이라는 것이 본성 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본성이 되어 나타나는 것은 같은 법을 비추어보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동이 아니라 존재가 무엇인지를 보신다는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 다만 사람이 자기 주관대로 인생과 세상을 보니 어두워 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죄를 사함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람 만든 목적을 내 삶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의 목적으로 순종하면 된다. 그것만 순종하면 하나 님의 의가 속 심령에 들어오고, 의가 사람 안에 들어가면 성령께서 그것을 하나님 아들이라는 생명으로 잉태케 하신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물과 성경 그리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면 된다. 그것이 하나 님께서, 하나님의 의와 뜻과 영이 질그릇인 우리 안에, 하나님 거하실 성전인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신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이 이것이다.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으로 나는 것 이상 으로 예수님을 잘 아는 법은 없다.


이처럼 사람은 거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우리와 동일한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인간의 정체성을 담기만 하면 그것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이 우리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 행동이 된다. 이것을 알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동을 심판하신 이유도,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이유도,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의미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심도 모두 알게 된다. 행여 세상의 모든 지식과 교훈으로 그것을 부인 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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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 행위규범 vs. 존재규범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14. 04:00 Writer : 김홍덕

앞서 언급했듯 자신을 죄 없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양심상 당연히 죄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 어떤 법에 의해서 자기 행위는 심판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가 정죄를 받아 죄인이 된다. 그렇게 심판하는 법은 당연히 행위규범이다. 행위를 정죄하니 행위규범이다.


그러면 문제는 행위규범이 하나님의 법이냐는 것이다. 하나 님은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는데, 행위로 자신을 심판하므로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하나 님과 생각이 다른 죄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니 하나님의 법은 당연히 존재규범이다. 존재의 정체성이 존재 목적과 일치하는지가 심판의 기준이다. 목적에 맞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행동도 정죄하지 않는 것이 존재규범이다.


이 두 규범 중 행위규범은 “무엇을 하였느냐”를 묻고 심판하 고, 존재규범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심판한다. 행위로 정죄 받는 자가 그 법을 다 지킬 수 없다면 존재의 법 아래로 가야 하고, 존재의 법을 지킬 수 있다면 행위의 법 아래로 가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위규범만 알고 존재의 법은 어둡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그나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 것마저 하나님께 행위의 열매인 공로를 드리고 행위의 주체인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구한다.


문제는 행위규범 아래에서 당당히 법을 지켜서 죄 없는 사람 으로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태초 이래로 그렇게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사람들이 고백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 자신의 행위를 인하여 정죄 받고 있다. 자신이 행위규범을 섬기니 자신의 행위를 정죄하고, 그렇게 죄인이 되어서는 구원받았다면서 죄 없다 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처럼.


이 죄책감을 해결하려면 법이 바뀌어야 한다. 자신을 심판하는 법이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행위가 정죄의 대상이 아닌 법을 가진 세계로 가야 한다. 그것이 법을 바꾸는 것이다. 무엇을 했느 냐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목적에 맞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가 법과 의의 기준인 세계로 가야 법이 바뀐다. 나의 존재 정체성, 가치관, 생명과 안목이 행위를 정죄하는 법이 아닌 생명의법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


그렇게 하지 않고 행위규범 아래 계속 있으면 언제나 나의 행위를 심판하므로 정죄함을 벗을 수 없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구원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구원은 죄사함을 받는 것인데, 정죄함이 끊이지 않는 법 아래서 구원을 확신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구원을 믿으려고 애쓴다. 신념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구원받았는데 죄 없다 말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이 바뀌어야…


그러므로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서 생명의 법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법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육신이 사는 동안 해야 한다.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 행위규범의 세계에서 존재규범의 세계로 가야 한다. 자신이 스스로 먹은 선악의 기준으로 자신을 심판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는 세계에 있었음을 고백하고 존재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떠나야 한다. 그 선택이 시작이다.


육신은 충분히 그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 님의 세계는 그 선택을 위해 너무 잘 펼쳐져 있고, 설명되어 있다. 따라서 시대나 상황을 핑계로 하나님을 듣지 못했다고 할 수 없다. 성경책도 성경책이지만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하나 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그 만드신 모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롬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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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 법이 바뀌어야 만족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13. 04:00 Writer : 김홍덕

그렇다면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가장 명확한 답은 선악과에서 찾을 수 있다. 선악과 사건 속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전과 후의 모습이 다르다. 이것은 죄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선악과를 먹기 전 아담은 죄가 없는 사람이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죄인이다. 자리를 떠난 모습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상태가 사람의 자리가 아니다. 선악과를 먹기전 아담의 모습이 사람의 자리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 않은 모든 사람의 상태이고 모습이다.


오늘 나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고, 내가 연약한 인생이라는 것이 부끄럽다면 아직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다. 만족의 동산에 있지 않으니 선악과를 먹고 쫓겨난 아담과 같은 자리다. 이것을 부인하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다.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자신의 상태를 부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감추고 부인하려 해도 모든 사람은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삶은 만족스러울 수 없고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생각은 고착화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도 믿지 않았고, 지금도 누군가가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왜 그렇게 말하는지 듣기도 전에 부인한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죄가 없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인 자신이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니 자신과 동일한 사람이 그렇다고 말하면 자초지종을 듣기도 전에 부인한다.


삶이 만족스럽지 않고, 그래서 노력하고, 그 노력에 지쳐 인생은 힘들다 말하고 있다면 구원이 없는 삶


특히 문제가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다. 물론 하나님에 대하여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지만 기독 교인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따져 보면 둘 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지만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죄 없다고는 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은 착각에 빠져 있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한 번도 하나님에 대하여 또 자기 인생의 목적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 없이 그저 세상 가치만 좇아가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착각하고 있다는 문제는 있지만 적어도 하나 님을 믿으려고는 한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한 번 내려놓은 경험이 있다는 의미다. 모든 것은 한 번이 어렵지 다음은 어렵지 않다. 그래서 가능성은더 크다.


사람들이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행위가 의롭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자신의 행위를 계속 정죄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간과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고, 또 다르기에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자세라는 그럴듯한 말로 덮어두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고 심각하며 근원적인 문제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죄 없다 말하지 못하는 것은 영혼이 걸린 문제


죄가 있는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말 자체도 안 되지만, 말이 안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영혼이 걸린 문제다. 구원을 받았 으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면 솔직하게 죄가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 마음에 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있지만 교회에 다니고 있고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을 믿고 있으니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심을 상기해야 한다. 믿는 것인지, 아니면 믿고 싶은 것인지 정도는 구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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