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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 성경 속 구원의 여정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21. 04:00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구원을 마치 신앙의 목표나 완성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원은 신앙의 시작이다. 또 구원은 잉태와 같이 순간이지만그 순간까지 가는 여정이 있고, 구원을 받은 이후는 삶이 있다.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여정과 출애굽의 여정이 그 구원의 여정을 설명한다. 본질적으로 천지창조의 과정도 구원의 여정이다. 창조의 과정도 흑암과 혼돈 가운데 있는 인생(땅)이 하나님이 안식 하는 사람이 되는 구원의 여정이다.


먼저 아브라함의 여정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본토를 떠나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 특별한 기록이나 사건이 없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아브람)이 등장하는 창세기 12장앞 11장은 우리가 잘 아는 바벨탑 사건과 바벨탑 이후 아브라함의 족보를 설명하는 것이 전부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은 살고 있는 땅에서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바벨탑을 지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떠나라는 말이다. 바벨탑을 지은 사람들은 벽돌을 쌓아 하늘에 오르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사람을 단련하여 세상에서 높은 곳에 오르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그 가치관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라고 하신 곳은 땅이 아니라 사람 정체성의 자리


그런데 떠나서 갈 곳은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고 그냥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출애굽 때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만 하셨다. 고대사회에 가까운 때긴 했지만 그래도 지명은 다 있었다. 땅의 좌표로 가야 할 곳을 말하지 않으신 것은 가야 할 곳이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땅은 사람의 자리, 사람의 정체성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사람이 곧 땅이기 때문 이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성경은 늘 사람을 땅이 라고 한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라고 할 때 땅도 그렇고, 씨 뿌리는 비유 모두가 그렇다.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내가 지시할 땅’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로 가라는 말씀이다. 구원의 자리로 가라는 것이다. 이렇듯 아브라함을 통해또 출애굽과 성경을 통해 구원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의 여정과 출애굽의 여정은 구원의 여정


출애굽도 마찬가지다. 종살이하는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라고 하심도 역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로 가는 구원에 대한 말씀이다. 시날 평야에 바벨탑이 있었다면 애굽에는 피라미드가 있다. 둘 다 세상의 높은 곳으로 가면 이긴 자가 되는 세상의 법을 상징한다. 행함의 소산인 공로를 쌓아 하늘이나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 바벨탑과 애굽의 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모습은 세상의 가치에 뒤처지거나 낙오하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의 채찍을 맞아 가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벗어나 세상의 가치관에 종살이하는 모습이다. 세상 가치가 말하는 성공을 성취하려고 살아 가는 사람들 모습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표현된 것이다. 솔직해지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과 영광스러운 자리에 자신이 이르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바로 애굽의 종살이라는 것을 출애굽 사건을 통해 말씀하고 있다.


모세가 바로에게 애굽에서 나가겠다고 말할 때 그 이유가 ‘하 나님께 절기를 지키고 희생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희생은 앞서 논한 적 있는 그 희생이다. 구속에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그 희생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께 육신의 삶을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한 형식으로, 또 하나님의 의를 담을 그릇으로, 또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소비 되는 희생을 드려야 할 존재이지, 세상의 가치를 좇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위해 종노릇에 소비되고 희생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나타내야 하는 사람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고 자신의 삶을 드리는 자리에 있어야지 그것 아닌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이 죄에 있는 것이므로 그 자리를 떠나서 하나 님께서 약속한 땅,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로 가야 한다. 그것이 사람에게 정해진 자리로 가는 구원이다.


이를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아래서 종노릇하며 쫓기듯 살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은 죄와 사망의 자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리에 있을 때 안정되고 평안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항상 평안을 추구한다는 것은 지금 평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불안과 두려움에 매여 스스로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고를 하고 있는 자신의 삶이 자기 자리가 아니라 종살이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서 자기 자리를 찾아서 떠나야 한다. 구원이란 여정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렇다고 치열한 도시의 삶을 접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러 떠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존재의 이동이 아니라 그냥 이사일 뿐이다. 또 사람은 자기 인생을 창조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지으신 이의 뜻이 우선한다. 구르고 달리는 것이 특기인 타이어도 주인이 의도할때 서야 더 가치 있다. 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창조하신 이가 원하는 것이 더 온전하고 자신에게 만족을 준다. 존재 목적도 모르면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놓지 못하는 모습 그 자체가 하나 님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고 자기 자리를 벗어난 죄다. 그 자리 에서 떠나야 태초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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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 구원의 시작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20.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가 자리를 떠난 것이라면 구원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참 쉽고 보편적인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구원은 많은 도전이 필요한 말이다.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죽을 상황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으려면 자신이 지금 죽을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살피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이 되면 구원해 줄능력이 있는 존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찾은 존재가 자신이 바라는 구원을 줄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 구원은 이런 조건에서 시작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당연히 그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자신이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스스로 죽을 자리에 있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돕지는 않는다. 만약 도우려 하면 자기를 “무시하냐?”면서 화를 낼 것이다.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죄와 사망에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호흡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살아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죽을 자리에 있다는 것이 인정해야 한다는 근거가 이것이다. 문제는 살았다는 사람의 관점은 하나님의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창조하신 목적을 기준으로 생명의 유무를 보시고, 사람은 육신의 호흡을 기준으로 생명을 보기에 육신이 숨쉬면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른다. 사는 이유도 모른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육신의 생명을 얻었고, 그 육신이 자라면서 인지한 자아의 성취와 만족이 인생의 목적이라 규정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목적 없는 존재는 다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결국 인생의 존재 목적 회복이라는 구원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을 말씀하시는 이유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이다.


따라서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조성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이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을 주(Load)로 믿는 것이고 구원의 시작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은 단지 구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솔직함을 넘어 그 자체가 구원의 시작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존재 목적이라는 구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 하는 것이 구원이 필요한 죄와 사망의 상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시는 것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육신이 살아 있어야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나 들리지 육신이 죽으면 들을 수도 없다. 육신으로 살 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다만 육신이 살아 있을 동안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지 못하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사람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안에 담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육신의 상태가 아니다. 그런데 그 상태, 그 시절 육신은 살아 있기 때문에 구원의 필요성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육신으로 살 동안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목적을 깨닫는 구원이 필요함을 시인하고 고백해야 구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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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9. 19. 04:00 Writer : 김홍덕

(마 24장, 막 13장, 눅 21장)


종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새로운 세계가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지막 때, 그리고 세상의 멸망도 다르지 않다. 성경 속 종말론은 물리적 세상의 멸망과 새 하늘, 새 땅이 본질이 아니다. 이 물리적 세상이 망하기 전이라도 누구라도 맞게 되는 죽음은 어차피 세상의 종말 그 자체다. 이 블로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이 창세기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듯 종말론 역시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자기 가치관이 망하고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종말을 말씀하시는 이유다. 하나님께서 종말을 말씀하시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으로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를 바라심이다.


예수님 오신 때를 기준으로 BC(Before Christ), AD(Anno Domini)로 나눈다. 예수님이 있는 세상과 아닌 세상으로 나누었다. 그와 같이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전 자기 세계가 망하는 것이 종말이고, 거듭난 새 삶이 새 하늘 새 땅이다. 자기 가치관이 삶과 세상의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는 세계와 시간이 종말을 맞이하고 폐기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의 본질이란 말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이 바뀐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이 바뀌어야 세상이 달라진다는 것인데, 성경은 이를 거듭남이라고 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려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으로 바뀐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듭난다는 것은 생명이 바뀐다는 것인데 생명이 바뀌면서 본성은 바뀌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전에 좋던 것,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이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본성이 바뀐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본성이 바뀌면 당연히 하늘 곧 자신의 의가 바뀐다. 그것이 하늘이 바뀌는 것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오는 것이고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의와 목적과 의미가 하늘의 뜻, 곧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삶이 모든 세계가 달라진 새로운 날들이고, 이전 것은 지나고 맞이한 새 세계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예수님이 종말을 말씀하심은 바로 이런 새로운 것을 목적으로 하심이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라 생각하는 하늘과 땅에 살다가 십자가를 지고 죄인이 되고 낮아지며 ‘너 옳다’하므로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새로운 삶을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는 삶을 맞이하기 위한 종말을 말씀하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중에 종말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사람이 왜 하나님 아들인지를 보이시면 그것을 보고 거듭난 사람은 이전의 모든 가치관이 종말을 맞은 것임을 말씀하심이다. 그리스도는 세상과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 믿는 세계를 살던 가치관이 흔들리고 땅에 떨어지며 이때까지 알고 믿었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겪게 되는 심령의 상태가 마지막 때의 징조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이것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정의”라며 말하고 있다는 것이 들린다. ‘예수를 이렇게 믿어야 벌 받지 않고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외침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것은 혼돈스러울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이전에 자신이 알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 흑암이 혼돈하고 땅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한 말씀과 같은 상황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외치는 많은 신앙의 외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외치는 소리라는 것이 들리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지 않은 멸망의 가증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거룩한 것으로 둔갑해 있다는 것이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장면의 전환이 아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가 되면 보인다고 하셨다. 그것은 상태의 변화다. 


그렇게 자기 안에 가치관의 변화가 온다면 다른 것을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다. 집이나 겉옷과 같이 자기가 이전에 사랑했던 것을 챙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심과 같다. 늑대가 양으로 거듭나기로 했다면 고기에 대하여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믿기지 않을 수 있지만 이것은 굳이 의지를 가지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의 세계를 이야기함이고 생명이 거듭났다면 본성이 바뀌었다는 것이니 본성은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면 인자가 오는 것을 볼 것이라는 말씀은 이러한 과정이 지나면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문 밖에서 두드리기만 하지 강도처럼 침범하시는 분이 아니므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순종이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람이 육신의 정욕과 희망대로 조각한 육신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히어로 같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히 순종했다는 의미다. 그 순종이 가치관을 바꾸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때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우라고 하심이 그것이다. 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또한 그리스도를 자기 육신의 문제와 세상의 일을 해결하는 분으로 믿으며 살다 보면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수능을 앞두고 기독교인들이 기도한다. 심지어 시험 시간표에 맞추어 기도한다. 하나님이 그런 정성을 보신다면 해마다 기독교인들만 수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 교회 내에서 상대적으로 신앙이 좋은 학생, 혹은 집안의 아이라고 무조건 시험을 잘 보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은 이상하게 여겨야 한다. 평소에 그리스도는 그런 일을 관장하시는 분이라 믿었는데 그 믿음대로 되지 않으면 이상히 여겨야 한다. 


그런 일이 쌓이는 것이 바로 무화과나무가 잎이 무성해지고 있는 것이다. 곧 여름이 오듯 마지막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징조에도 자기 가치관이 마지막을 맞이하지 못하면 그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나는 종말을 맞이한다. 그것이 심판이다.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자신이 믿고 있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에서 이긴 자로 만들어 주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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