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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제사와 순종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30.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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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믿음을 능동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사다. 제사라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것 중에 큰 것을 드릴수록 큰 믿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이것이 우선되는 법이다. 따라서 제사도 이 법 안에서 봐야 한다.


사람들이 믿음을 능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제사와 수동적인 순종을 잘 대비시킨 사건이 사무엘서(상)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에 아말렉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것을 추억하시고 사울 왕을 보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멜렉의 모든 것, 남녀는 물론이고 어린아이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 모두를 진멸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아말렉에서 좋은 것을 따로 취하여 살려 두었다가 사무엘에게 들키자 “좋은 것으로 제사 드리기 위함”이라고 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제사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무엘 선지 자는 책망하는 말씀으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과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누적되어 있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 이 일로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다. 사울왕은 분명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려 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버리신 것이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 제사를 위해 좋은 것을 예비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렸다. 모세를 통해 예식으로 율법으로 명하신 제사를 드렸는데 그것에 대해 노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울을 버렸다. 이 말씀은 수 없이 회자되지만 순종을 강조하는 결론만 인용할 뿐 그 근본에 흐르는 믿음과 제사의 본질은 늘 외면받는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도 순종일 수 있다. 율법에 명하신대로 순종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제사를 지내라는 말씀을 파편화하여 하나씩 행하므로 지키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노력하여 제사 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을 지키며 살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깊이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있고, 기도할 때 마다 회개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좀 더 설명하겠지만 제사의 본질적 목적은 하나님이 조성한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쓰시게 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주관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제사의 근원인 자신을 드리는 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주관하는 것에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확실하게 주관하는 것은 생명과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본성이 되는 것이 가장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며 가장 온전한 제사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를 생명의 세계라고 하는 이유다. 생명의 세계이기에 거듭남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의 본성이 우리 삶을 주관하게 된다. 생명의 본성이 주관하는 것 이상의 순종이 없다. 그렇게 되면 인생 자체가 하나님께 제물이 된다. 이 보다 더 온전한 제사가 없다. 이것이 제사인 것을 알면 제사를 보고 믿음을 능동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말씀을 지키는 존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이 그 속심령에 거하므로 그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속 심령에 거하시기만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 그런 상태가 바로 산 제사로 드려진 상태다.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 것이 이것이다. 하나님께 이 이상의 제사를 드릴 수 없다. 이런 제사를 드리는 존재가 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되어야 한다. 그럼 모든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믿음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것에 순종하는 수동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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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믿음은 수동적인 것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29.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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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믿음에 대하여도 하나님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방향이 반대다. 믿음에 대하여 상당히 능동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일수록 좋은 믿음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방언을 받으려면 소나무 하나는 뽑아야 한다는 농담 같은 말속에 사람들이 믿음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그 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끔 큰 각오를 한 듯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겠다고 서원하며 어디든지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열정은 나쁘지 않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어디로 가기 전에 자신을 이 땅에 인생으로 보내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다. 땅이 아무리 큰 각오를 하고 부르짖고, 자기 몸을 불살르는 능동성을 보여도 하늘은 바뀌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것은 아주 능동적인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은 전혀 능동적이지 않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땅이 능동적일 필요도 없고 능동적일 수도 없다. 설사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도 땅이 하늘을 바꿀수는 없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가만히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데 땅이 할 일은 없다.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것에게 땅이 할 일도 없다. 그냥 하늘이 변하면 땅이 변하고 땅이 변하면 땅에 속한 모든 것은 따라 변한다. 하늘이 변해 봄이 되면 땅의 식물은 싹을 내고 사람들은 옷을 갈아입고 겨울옷과 이불을 정리해 넣는다. 이 과정에서 땅이나 사람이 할 일은 없다 그냥 하늘이 변하는 것에 순종만 하면 된다.


하늘이 변해 봄이 오면 땅이 변하고 그 땅의 모든 생명도 땅에 맞추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에 사람이 순종하면 땅에 맞추어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늘에 맞추듯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에 자연적으로 맞추어진다. 여기에 어떤 능동성이 필요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 있나? 신념이나, 죽겠다는 각오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인생을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주신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 그 창조의 의와 뜻이 임하시는 것 이상 온전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조성하신 목적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의심없이, 이견없이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 이유다.


사람은 단지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에 순종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은 완성된다. 그 다음은 주께서 주신 세월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육신으로 살아 가기만 하면 그 삶에 종속된 모든 것이 봄이 된 땅에 모든 생명이 맞추어내듯 삶도 순종하고 평안하며 안식하고 감사한 삶이 된다. 사람이 할 것이 없다. 사람이 할 것은 순종밖에 없다. 그리고 순종만큼 수동적인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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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 구원과 율법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28. 04:00 Writer : 김홍덕


율법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생각은 구약은 율법, 신약은 복음, 십계명과 유대인의 법은 율법,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교훈은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키는 기준과 법이 무엇 이냐에 따라 율법과 복음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지켜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면 율법이다. “주기도문 100번 쓰라.” 율법이다. 손해를 입어 속상한데 “범사에 감사하라”하셨으니 감사헌 금을 낸다? 율법이다. 종과 같은 마음이 없는데 수련회 프로그램에 있어 발을 씻긴다? 율법이다.


이와 같이 흔히들 복음적인 신앙생활이라고 여기는 대부분의 신앙생활이 율법적인 신앙이다. 어떤 행위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한다고 여겨 행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무엇을 행하는 것, 구원 받은 사람의 의무라며 마음에 없지만 의무적으로 하는 것은 그 행하는 규범이 신약성경에 있어도 다 율법이다. 이와 같이 율법적인 신앙의 모습은 당연히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존재 자체가 의롭기 때문에 행위로 의로워지려 하지 않는다.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다 문득 문득 성경을 보면 그것이 자기 삶임을 발견하는 것이 거듭난 삶이다. 이런 삶에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이 필요할 리 없다. 거듭나 생명이 가진 본성이 삶을 이끌 뿐이다. 그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이니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말씀하신 성경은 말 그대로 그 삶의 이야기가 된다.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 완전히 '아멘'되어야 비로소 거듭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율법에 대한 기준이 신약이냐, 구약이 냐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냐, 예수님 오시기 전의 말씀이냐도 아니다. 기준은 무엇이라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나 신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행하면 어느 것이라도 율법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구분이다. 구약성경은 율법이고 신약성경은 복음이 아니라, 구약이든 신약이든, 십계명이든 예수님의 말씀이든 그것이 무엇이라도 지켜내면 의롭고 선하며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하면 율법이 된다. 바로 그 자리. 그 가치관을 떠나는 것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신구약 따지지 않고 성경 어디에나 다 그 모습이 있다.


더 나아가서 법이 신약성경에 있느냐 구약성경에 있느냐 불경에 있느냐 몰몬경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도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하고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면 율법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세상은 이렇게 사는 것',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인간다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다 율법이다. 그가 만든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이 율법이고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계명이든 예수님의 말씀이든 그것이 무엇이라도 지켜내면 의롭고 선하며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율법


이런 모든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 늑대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나, 예수님의 말씀 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도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는 말씀이 이 의미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본성, 안목, 가치관이 달라진 것이 없고, 이전에 좋던것 지금도 좋은데 그것을 참고 견디는 힘을 “이제 예수 믿으니까 참자”, “구원받은 사람이 그러면 되겠나”, “이것을 이겨야 천국 가서 잘 살지”와 같은 이유에서 얻어서 견디려고 한다고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참고 견디는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다. 구원이 없는 삶이란 말이다.


반대로 양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경을 지키며 살려고 하지 않는다. “구원받았으니 ~하자”라고 다짐하지도 않는다. 거듭났으니, 그 새로운 생명으로 그냥 사는 것이 구원받은 자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성경을 보면 이상하게 자기 삶이 성경에 다 있음에 놀라고 감사한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이고,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그렇게 된 것이 구원이다.


따라서 삶이 이와 같지 않다면 당연히 거듭나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구원받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라는 것과 동일하게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신학과 같은 것으로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일 것도 아니며,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노력하는 것이라고 하는 궤변 같은 것으로 가릴 수 없다. 그런 모든 것은 무화과잎으로 만든 아담의 옷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보면 더 명확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고 따라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 아닌가?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신 적이 없다. 유대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어긴 적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이 땅에 오셔서 사셨을 뿐이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이를 확증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육신의 삶이 말씀과 같다는 것이다. 이같이 육신의 삶이 말씀 그 자체인 것 이상으로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법은 없다. 신약성경은 멀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사신 삶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에 그 말씀의 본성대로, 그 생명의 본능대로 사신 것을 보이고 기록했더니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된 것이다. 육신이 된 말씀이 십자가로 데려갔고, 또 하나님의 본체시니 하나님의 품 안으로, 하나님의 의 안으로 가시니 승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자리에서 떠나 향해가는 구원의 자리는 너무 분명하다. 성경을 잘 지키려고 공부하고 노력할하고 있는 자리에서 떠나야 한다. 그것은 구원 받은 삶이 아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본성과 안목과 가치관이 바뀌지도 않았는데 입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 역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구분하고 구원을 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리에서 그 이전과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 졌는지 가치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구원받기 전이나 받은 다음이나 추구하는 것, 귀한 것이 같고, 바라는 것 같은데 그것을 예수님을 의지해서 간구하고 의지한다고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외식이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눅 6:46)


자신의 상태를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또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와 가족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구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과 삶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고 구하는 성공과 위대해지고 영광스러워지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 얻으려고 하는지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다. 양심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해 주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바라는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평안해지기를 구하는지도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다. 역시 양심만 있으면.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율법대로 살아낸 공로를 드리려 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시고 삶을 주신 목적을 알아 그대로 사는 것을 구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한 자신의 삶을 드리려 한다. 노력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율법인데 그것조차 모른다. 이런 어리석음의 반복이 계속된다. 이것이 매번 노력하고, 실패해서 회개하고 다시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반복되는 이유다. 노력하라고 주신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자기 심령에 순종하여 거듭나기만 하면 되는 <생명>의 세계를 노력으로 일갈하려니 겪는 무한히 수고를 반복하는 인생이 된 이유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존재를 드렸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것외에 하나님과 상의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삶을 주신 하나님 뜻의 근본을 아는데 다른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야 기뻐하실지 생각지 않는다. 이미 자기 삶을 드렸으니 행여 드리려 해도 남은 것이 없다. 이런 삶이 거듭난 사람의 삶이다. 여기에 비추어 자신을 보면 거듭난 삶인지 아닌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거듭나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므로 생명의 법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나는 것이 거듭남이니 하나님의 법으로 나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존재의 법이다. “나는 누구입니다”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므로 구원에 이른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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