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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장, 막 14장, 눅 22장, 요 18장)


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의 괴리를 가장 잘 대변했고 또 가장 감동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다. 물론 이것이 베드로만의 이야기는 아니고 모든 제자들의 모습이고 또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베드로는 먼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책망도 들었고, 배신할 것이라는 예언도 들었으며, 사람의 귀를 자르는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다. 그런 그의 그 간절한 몸부림에도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잡혀 갔다. 그건 베드로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예수님이 왜 잡혀갔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던 예수님이 십자가로 갔는지는 알아야 했다.


그래서 심문받으시는 예수님을 보러 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너도 저와 한 패”라고 말했다. 그때 베드로는 부인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否認)은 자신이 예수님과 한 패라는 것에 대한 부인이 아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이 아니었다는 부인이 아니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비겁하게 숨어서 따라가고 훔쳐보듯 예수님을 봤다고 했지만 그건 아니다. 성경 전반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베드로는 한 순간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예수님을 배신하거나 부인하거나 또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라’하니 바다 위로 걸어 간 사람이고, 무기를 든 군병을 향해 단검으로 덤빈 사람이고, 식민지 국민이면서 독립을 이루겠다며 그 증표인 칼을 늘 품고 다닌 사람이다. 의리 있고 용감한 사람이다. 성경을 제대로 본 사람이라면, 순종적인 마음으로 본 사람이라면 베드로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과 함께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저렇게 매 맞고 있는 예수가 누군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저렇게 매를 맞고 있는 예수님은 자신이 생각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니니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또 자신은 저렇게 매 맞는 예수와 한 패, 곧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막 14:71)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주님인 것도 분명했다. 주를 위해 죽겠다는 것도 빈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할 때 주의 모습은 지금 매 맞는 그런 모습의 주가 아니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이라는 격에 맞게 높고 권세 있는 자리에 오르기에 합당한 예수님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던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잡혀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매 맞고 심문을 받고 있는 모습은 자신으로는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예수는 생각도 해 본적 없는 완전히 생소하고 낯설며 전혀 모르는 주님이고 예수 그리스도며 하나님 아들이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부인할 것이라고 하신 것도 그렇게 낯설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은 자신이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 주님이며 하나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다만 없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동일성이었다. 예수님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와 자신이 믿었던 그리스도가 달랐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은 맞는데, 그리스도는 저런 모습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혼돈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베드로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알고 기대했던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의 괴리를 극복해보고자 했다. 그것을 알려고 예수님이 심문받는 곳에 가면 잡힐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심문받으시는 뜰까지 갔던 것이다.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라도 자신이 아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차이를 알고 싶었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알고 싶었다. 그것이 베드로가 심문받는 뜰에 간 이유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갔건만 그가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끝내 십자가로 끌려가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기 못하고 부인했다.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그리스가 십자가로 간다는 것을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이 오신 후 그 모든 것이 해결됐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신 것에 자신을 순종했을 뿐 아니라 그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되었다. 문제는 오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다. 앞서 시작할 때 언급한 바와 같이 베드로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모든 사람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겪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낯선 과정을 거쳤냐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낯설어야 하냐?’, ‘왜 그리스도가 낯설어야 하냐?’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면 필자는 그런 반문을 하는 사람을 포함한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베드로보다 예수님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반문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지근에서 모시고 함께 했던 베드로조차 낯설었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겪지 않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다.


역사 속 오고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스승을 부인한 사람이라는 오인을 받는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자신만 살겠다는 비겁한 부인이나 배신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믿었는데 그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세상의 가치와 자신의 기대처럼 높아지지 않고 오히려 낮아지고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는 죄수로 못 박히는 낯설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그것은 그리스도는 그럴 수 없다고 부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은 어떤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역시 줄곧 이야기한 것과 같이 자신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니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와 동일한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렇게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예수님께 바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님이 낯설어야 정상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바로 알려고 한다면, 구원을 받고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이것이 낯설고 베드로처럼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괴롭지 않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가 낯설지 않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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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7장, 막 15장, 눅 23장, 요 18,19장)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려 했다. 스스로 왕이라는 반역죄를 시인했음에도 석방하려 한 것은 빌라도가 볼 때 이 꼴로 왕이 된다는 것은 어림도 없고, 왕이 되려면 백성들의 지지라도 있어야 할 텐데 자기 백성들도 죽이려고 애쓰는 예수가 자기 눈에 반역자로 보일 리 없었다. 이로 볼 때 이방인인 빌라도가 볼 때도 보잘 것 없는 예수를 유대인들이 하나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빌라도는 유대 땅을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다스리는 총독이다. 왕을 대신하는 자다. 한 마디로 이긴 자의 상징과 같은 사람이다. 그가 볼 때 이렇게 완전한 패자가 왕이 되어 피라미드 위로 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스스로 왕이라고 말했으나 그가 볼 때 예수님은 몇 대 때려서 보내는 것이 합당해 보였다. 그러나 총독이 민란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유대인들은 완강했다. 


빌라도는 하는 수 없이 명절이 되면 죄수 하나를 석방해 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과 당시 성중에서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바라바라는 죄인과 둘 중에 하나를 석방해주려 했는데 백성들은 바라바를 선택했다. 이에 대하여 빌라도는 매우 놀랐다. 그러나 약속대로 바라바는 내어주고 예수님은 사형을 선고하면서 자신은 이 일과 무관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바라바를 선택했을까?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있지만 그 사이에 많은 이들의 병도 고치고 권위 있는 말씀과 기적을 보여주셨는데 그런 예수님은 버리고 오히려 직접적으로 자신들에게 해를 가하고 살인한 강도인 바라바를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유대인들의 선택은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와 그리스도의 직임이 무엇인지를 기준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메시아는 나라의 독립을 이끌 메시아다. 육신과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를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이라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유대인들의 기대를 일갈했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하지 않겠다는 예수를 구해야 할 이유가 유대인들에게는 없어진 것이다.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한 그들의 선택 기준은 그리스도였다. 누가 더 메시아적인 기대를 충족할 수 있는지가 기준이었다. 일반적으로 바라바를 강도로만 알지만 마가복음에서는 ‘민란을 꾸미고…’라는 말에서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민란이라는 것은 단독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란에는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식민국가에서의 민란이라는 것은 다분히 독립에 관한 것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어 보이긴 해도 예수님보다 바라바를 선택하는 기준이었다.


결국 독립과 육신의 평안이라는 눈에 보이는 구원, 나타난 세계인 현실 세계의 구원을 바라는 이들이 육신의 방법으로 바라는 바를 이루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성경 속에 있는 유대인들의 엄청난 잘못만으로 보면 안 된다. 지금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기도하는 것들도 육신의 문제, 사회의 문제들이고, 그 기도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행위, 성경대로 살기 위한 육신의 노력, 그런 노력의 일환이라 착각하고 있는 헌금, 성경읽기/쓰기, 교회 봉사와 같은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육신의 방법이고 그 육신의 행위를 축적한 공로를 가지고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구하는 장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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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장, 막 14장, 눅 22장, 요 18,19장)


잡혀서 심문을 받게 된 예수님은 여러 가지 송사에 답을 하지 않으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는 질문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만 “내가 그로라”,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하셨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죄를 자청하신 것이다. 그 두 질문에만 답하지 않으셨다면 빌라도의 말과 같이 몇 대 맞을 수는 있었어도 십자가를 지실 일은 없었다. 예수님도 그것을 모를 리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 질문들에만 대답 하셨다.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군병들에게 순순히 잡혀 오신 것만큼이나 이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였다면, 이렇게 잡히시지도 않았겠지만 어떻게 심문받는 자리까지 왔다고 해도 능력을 보이면서 심문하는 자들을 혼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수 없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십자가로 자신을 끌고 가는 군사들을 하늘의 군사를 불러 물리 칠 수 있었음에도 끌려 온 이유와 같은 이유로 그 많은 송사와 고소 중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대답만 답을 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생명 본성이 그렇게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성은 예수님만의 본성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고, 하나님의 아들이자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스스로 죽음 앞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삶의 의미다. 존재 목적을 안다는 것은 모든 것이 회복 되었다는 의미다. 자기 존재 정체성을 벗어난 죄에서 회복되었다는 의미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고, 하나님의 아들임과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회복된다는 것이 곧 구원이며 생명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순종하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끌려가시고 굳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답변만 하시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 자기 안에서 부인할 수 없다면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려 애쓰고, 신학 같은 이상한 것으로 공부하고 해석하는 것은 구원을 얻지 못한 모습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예수님과 동일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동일한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났다면 자기 본성이 그리스도일 것이고, 예수님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모든 것이 의문스럽지 않고 이해될 것이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의 본성은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신 것과 심문 받으시는 고통과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신념과 사명감으로 보는 것은 구원은커녕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도 모르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이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았건만 그것을 선언하신 것은 우선은 그것이 명백한 진리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며, 또 그리스도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의 신분이요 정체성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며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분명하신 것이다.


특히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다.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의 본성이 된 존재가 아들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기에 그리스도이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존재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자기 육신, 곧 자기 삶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바로 아들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은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굴복 시키며, 물 위를 걷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아니 그래야 한다는 생각과 전혀 다른 존재다. 더욱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놀라운 능력으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잘 생각해보면 결국 사람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능력 있는 시종이다. 이런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은 하나님 아들에 대한 자기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더더욱 하나님 아들이라 인정하기 힘들다. 심문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는 죽은 자를 살리는 존재라고 믿는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어느 한 구석, 어떤 모습도 하나님 아들다움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 아들이며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 아들이며 유대인의 왕이라면서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일개 졸병과 여종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 더욱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에게 조차.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며, 유대 왕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이란 부류들은 하나님께 육신과 세상의 문제 해결을 바라고 의지하면서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 받고 채찍질 당하는 예수님을 여과 없이 하나님 아들로 믿는 놀라운 맹신을 보여준다. 말 그대로 맹신, 아무 것도 모르면서 믿고 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그리스도며 하나님 아들이라 생각하면서 채찍질, 침 뱉음 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모순인데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고 있다.


예수님은 심문 받으시는 자기 모습 그것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신다.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삶의 모습, 가치관과 본성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 인정되고 자신도 그것을 흠모하며 더 나아가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자기 안에 있는 어떤 본성이 자신을 그렇게 이끌고 가는 것을 보지만 어쩔 수 없는 존재가 된 자신을 보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다.


그렇지 않다면 제 아무리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노라 외치고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 준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다. 정말로 직설적으로 설명하면 예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기도하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세상의 가치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 아들의 본문이고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기 생각엔 구원 받았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다 허구다. 


심문 받으시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정의하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오늘날 신앙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가진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들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정 반대다. 오히려 그 반대의 가치관이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있다. 이것마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구원은 없다. 채찍질 당하면서까지 그 매 맞는 모습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그들의 신앙 속 그리스도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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