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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믿음에 대하여 또 하나 잘못 생각하는 것은 믿음에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경에 있는 사건과 말씀이 실존했다는 증거가 있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비단 어릴 적 이야기만은 아니겠지만 학창 시절 간혹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들을 수 있었던 반문이 바로 “증거 있냐?”였다.


그런 시절에 NASA의 계산에 의하면 지구가 하루 정도 부족 하며 그것은 계산으로 풀 수 없어서 성경을 보니 히스기야의 일과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받쳐서 해가 지지 않아 전쟁을 이긴 것을 합하면 하루 정도가 되니 그 증거라는 떠도는 말에 흥분하기도 했다. 또 인공위성으로 노아의 방주를 찾는다고 하는 등 성경의 기적들의 증거를 찾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주 많다. 아예 그것을 연구하기 위한 ‘창조과학회’라고 단체를 만들어 연구하기까지 한다.


객관적 증거가 없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성경의 사건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객관적 사실로서 기적을 보지 못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것이다.


그와 같이 지금도 사람들은 성경을 객관적 사실로 증명하고 증거를 찾아서 믿으려 한다. 하지만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이미 믿지 않는 것이다. 창조과학회나 고고학적 고찰을 통해 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확신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을 증명하려고 수고하는 바보는 없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그 상황을 인터넷으로 전 세계에 생중계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이탈하거나 음모론을 꾸미고 반박하는 증거들이 넘쳐나고 종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이단적 행태를 보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은 하늘에서 구름 타고 오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먹을 것, 입을 것을 해결해줄 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이 오셨을 때 증명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땅에 오셨는데 사람들의 기대는 자기 육신의 문제뿐이었다. 그때 오신 예수님을 매개로 수 없는 이단과 우상들을 만들었다. 그 신들이나 신앙이나 종교 또 믿음이 다양한 것 같지만 사실상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의지하는 것 하나뿐이다. 사람들이 찾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객관적 증거도 결국 자기 육신의 정욕에 쓸 것을 충족시켜 주면 객관적 증거가 되고, 그것이 아니면 객관적 증거가 깔려 죽을 만큼 많아도 믿는 것에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다. 사람들은 어떤 신을 믿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는 신을 원하지 신의 뜻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것에 삶을 내어놓으라는 것에 순종하지 않는다. 종교적 전쟁에서 폭탄테러를 하는 것 같은 일도 그렇게 죽으면 다음 생에 혹은 천국에서 많은 보상이 담보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객관적인 증거가 없어 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이 수동적이지 않기 때문에 증거가 넘쳐나도 자기 기준의 증거가 아니니 증거로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온 천지가 하나님 존재의 증거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 증거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증거는 믿음 그 자체가 증거다.


결국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모든 것이 증거가 되지만 그 의가 없으면 어떤 증거도 소용없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약속이다. 증거와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를 받은 믿음, 약속을 받은 믿음이라는 말씀으로 설명한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히 11:39)


증거와 약속은 선후 관계가 있다. 선후 관계에 있어 먼저는 약속이다. 증거는 약속이 표현되고 나타난 것이지 본질이 아니다. 사실 믿음장이 있는 히브리서에서는 1장 초반부터 약속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이 약속은 손가락 걸고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약속은 창조주가 정한다. 상호 간에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이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을 떠나 ‘약속’한 땅으로 가라고 할 때 그 땅에 대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 약속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땅이 어딘지도 말씀하지 않았다. 그런데 약속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목적을 가진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설계하는 사람의 설계 내용이 자동차에게 약속이 된다. 설계자가 구현하려고 하는 정체성과 기능의 계획이 자동차로 나타나 약속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약속이다. 그리고 증거는 바로 자동차다. 자동차가 시판되는 순간 그 자동차의 설계도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설계한 사람의 철학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증거다. 설계자의 약속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약속과 증거의 관계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뜻이 사람의 모든 능력과 본성을 정했고 그것이 사람에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있음을 사람에게 약속하셨다.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약속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 이루어지고 사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약속의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거듭난 사람이 바로 증거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증거는 약속이 나타난 것이지만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바로 약속이다. 그래서 증거를 받은 많은 순교자의 믿음보다 약속을 받은 믿음이 더 크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것은 증거를 믿는 것이 아니라 증거로 나타난 본질을 믿는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상이 믿음의 본질이란 말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세상의 모든 만물로, 또 사람으로 나타난 본질인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임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의가 나를 주관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나를 주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그 생명이 주는 안목으로 보면 나타난 세상의 모든 것이 증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할 증거는 결국 증거를 증거로 볼 수 있는 믿음이 있을 때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 안에 약속이 있는 것이고, 그 약속이 있는 사람의 삶이 약속의 증거다. 사람이 순종한 하나님의 의가 증거의 본질이고, 모든 나타난 것의 본질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없이 객관적인 증거를 찾는 사람들, 그들이 증거를 찾는 곳이 바로 나타난 세계다. 자기 자신 안에 약속의 믿음이 있고, 그것이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실존의 증거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없는 사람은 약속이 생명이 되는 과정을 모르니 건너뛰고 단지 나타난 것에서 증거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에 약속이 없으므로 증거를 증거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 님의 말씀과 의와 믿음이 아닌 세상의 과학과 논리로 하나님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실존과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증거다. 그 믿음으로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 님의 의로 말미암아 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증거 그자체라는 말씀이다.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믿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실존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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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손으로 빚은 하나님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10. 11.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상세보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구원을 얻으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께서그 아들이 원하는 것을 주실 것이라 믿고 <자기 것>을 구한다.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주겠느냐?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주겠느 냐?”는 말씀이 그것이라 믿으면서.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다. 질그릇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먹을 것, 곧 자기 안에 채워야 할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구하는데 돌에 새긴 율법을 지키면 주겠다고 하신 것이고, 뱀과 사탄의 유혹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육신을 초월한 능력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떡과 생선을 먹는 존재이므로 하나님은 그 존재 정체성에 맞게 기도하면 당연히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 곧 십자가의 도를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심기고 생명이 되기를 구하라고 하셨다.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도 그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기도라고는 단 하나 가르치셨는데 그것과 상충되는 것을 구하는 말씀을 하셨을 리 없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아느냐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의와 그가 사람을 왜 창조하셨는지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와 사람인 나와 어떤 관계인지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면 무엇을 구할 것인지 분명해진다.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Ⅰ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Ⅱ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Ⅲ

[주제별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Ⅳ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겠다고 한다. 돌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제안을 늘 꿈꾼다. 예수 믿으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예배드리는 것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선 대신 뱀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생선을 구하면 뱀을 주지 않고 떡을 구하면 돌을 주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생선과 떡을 구해야 한다. 자신의 신념을 행위로 지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돌을 구하거나, 예수 믿으니 늘 육신을 초월하는 일만 있게 해 달라는 뱀의 유혹을 구할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의 몸, 곧 그 삶을 이끌어 내는 생명을 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육신의 것은 이미 다 준비해 두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담고자 하시는 것은 뒤로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만 구한다. 군인이 되지도 않았는데 좋은 군복을 달라는 것과 같다. 사람이 차를 사면 차가 염려하지 않아도 기름 넣고 정비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목적대로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살아가는 삶을 준비하지 않으셨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지는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조각하여 “하 나님은 이것을 좋아하신다”며 말한다. 그것이 사람의 손으로 빚은 우상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저마다 다르다. 심지어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에 이견을 확인하고 다투기까지 한다. 전쟁도 불사한다. 서로 다른 하나님 곧 우상들을 믿고 있기 때문 이다. 세례와 예배가 다르고 하나님의 뜻이 달라 종파가 갈라지고 나라가 갈라지며 서로 성전(聖戰)이라며 전쟁도 한다. 그렇게 믿는 하나님이 우상이고 형상화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손으로 빚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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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경스럽겠지만 예수님의 그리스도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혼돈을 겪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욥의 고난에 비할 수 있다. 이것이 생경스럽게 여겨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는 욥기에 대한 이해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안목 역시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속적이라고 하는 것은 누누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은 육신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이라고 믿는 신앙을 말한다.


사람들이 가진 욥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그렇다. 멀쩡한 욥을 마귀가 시험하여 욥이 고난을 당하고, 그것을 견뎌낸 욥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물질과 행복을 곱절로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관점을 관통하는 가치관은 육신의 축복이다. 축복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시련이 있으며 그 시련을 견디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가치관이 뼈대다. 이것은 예수님이 육신과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이기를 바랬던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날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구하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대부분 신앙인들의 믿음이다. 그리고 욥의 고난을 육신의 축복의 자격과 조건으로 여겼듯,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육신으로 힘들지만 성경을 지켜내는 공로를 하나님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막히게 일치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기도하는 아버지 집에서의 장사라고 일갈하셨다.


욥기는 이 블로그에서 제법 상세하게 다루어 두었다. 아마 일반적인 교회나 신학에서 만나지 못한 본질적인 내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상세한 내용은 해당 포스트를 보면 되겠으나 간략하게 욥기를 정리해 본다면, 욥기가 말하는 욥의 고난은 하나님이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갈등의 곤고함이다.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정체성은 알았는데 그것이 왜 세상의 기준으로 귀한 모습으로 연결되지 않는지를 알지 못하는 괴로운 과정을 보여준 것이 욥기의 핵심적 내용이다.


욥이 겪은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신으로 알다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며,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난 다음에 겪는 영적 갈등임을 보여준다.(출처: https://www.elphis.or.kr/category/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Bible become My Story])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 욥기를 마치며...



욥은 욥기에서 앞서 말한 세속적인 관점을 가진 세 친구(빌닷, 소발, 엘리바스)와의 변론에서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았고, 여호와는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여 그 심판의 결과를 보고 사람에게 고난이나 혹은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고난이 자기 행위로 인함이 아니라는 것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는 것에서 욥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오늘날 신앙인들은 물만 엎질러도 자신이 하나님께 뭐 잘못한 것(행위)가 없는지 생각한다. 심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런 욥이 고난을 당했다는 것은 친구들에게 변론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행위로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이 분명하고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귀한 것이라는 것도 알겠는데, 그렇게 귀한 것을 아는 사람은 왜 세상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것에 관한 곤고함이었다. 더 나아가서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시는 신으로 아는 이들(친구들)에게 이렇게 학대를 받아야 하는지 그것을 알 수 없는 욥의 마음이 바로 욥의 고난이다.


이 욥의 고난은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받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욥이 왜 세상의 가치로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지 알지 못하는 곤고함이 욥의 고난이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분명하게 알겠는데, 그 하나님 아들 예수가 왜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저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배신 같은 말을 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겪는 말할 수 없는 곤고함과 같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데 대접 받지 못하고 고난당하는 욥의 마음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알겠는데 왜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지를 알 수 없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갈등이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이 장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와 욥의 상관성을 논하는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과연 이런 고난과 갈등을 체휼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성경이, 아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간절하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보이셨음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심판한 세상 가치관으로 이기고 성공한 자리에 오르려 한다. 그런 이들에게 욥의 고난이 제자들이 이 깊은 고뇌가 있을 리 없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을 보고 있노라니 그 마음의 갈등을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다. 아마도 그것은 욥기를 통해서 묘사한 욥의 고난에 버금가는 갈등이다. 그리고 그들과 같이 오늘날도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대접 받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천지를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더 이상의 귀함이 없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 동일한 곤고함, 정말로 욥의 처절한 괴로움과 베드로와 제자들의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을 동일하게 겪을 수밖에 없다. 


그게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는데 구원이 어디 있으며, 거듭남이 어디 있겠는가? 부활과 영생 ? 그건 꿈이다. 자신이 오히려 세상에서 천한 자리에 처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 예상치 못한 전개에 감당하기 어려운 갈등과 고민을 겪은 신앙인들의 심령 또한 그와 같이 감당하기 힘든 여정을 지날 것이다. 이 과정 없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천한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낮아지는 그리스도를 온전히 발견했다면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모습들을 자신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수 없이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의지하여 세상이 귀하다고 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과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예수님은 낮아지고 낮아져서 세상에서 가장 천한 사형수가 되어 최고의 악인들에게 언도되는 십자가를 지고 그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빌고 있다는 것이 정말 신앙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상식적 논리로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상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좋은 신앙이라 생각하니 어떻게 베드로와 제자들의 이 갈등을 이해할 수 있고, 욥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명확한 괴리를 아무런 갈등이나 고민이나 묵상 없이 알 수는 없다. 예수님을 지척에서 함께한 제자들도 죽을 만큼 힘들었고,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자랑할 정도의 욥도 오히려 죽기를 구할 정도의 갈등이었는데 그냥 교리 문답 때 소책자에 적힌 대로 답하는 것으로 이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신앙으로 여기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니 참으로 참담한 것이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마주한 낯선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였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창조하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말인가?” 제자들로서는 이 악몽 같은 의문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제자들은 회복되지 않았다. 모두가 기대했던 대로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셨고, 그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그들에게는 “어떻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라는 이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뭔가 제대로 된 것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부끄럽고 예수님 앞에 고개 숙이게 만들었지만 그런 죄책감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게 하지는 않았다. 눈앞에 분명히 보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열리지 않는, 자신의 것이 되지 않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나중에 성령이 오시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하신 말씀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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