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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장)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었지만 그리스도라는 존재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눈 베드로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를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다. 성경에 예수님의 일을 기록한 것이 그와 동일한 생명으로 사는 것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으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여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화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세 번에 걸쳐 같아 보이는 대답을 하는 대화가 그것이다. 이 대화 중 예수님의 첫 번째, 두 번째 질문 속 ‘사랑’은 아가페(Agape)의 사랑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질문 속 ‘사랑’은 Phillia 곧 형제간의 사랑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하는 모든 사랑 역시 Phillia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Agape)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Phillia)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Agape)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Phillia)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Phillia)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Phillia)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여기서 한 가지 하나님의 사랑은 흔히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라고 한다. 장사하듯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며, 하나님의 관점과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 그런 의미다. 먼저 사랑하는 존재는 받은 것이 없으니 당연히 무조건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에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신다는 말씀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창조하셨다는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는 의미다. 피조물인 사람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이 가지셨다는 말이다. 당연히 그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지고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겠다는 사람 창조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것은 의미 있는 관계 속에 있다. 세상에 남녀가 각각 반이지만 그 중에서 사랑하는 한 남자, 한 여자는 나에게 의미 있는 한 남자, 한 여자라는 의미다. 의미 없는 관계에 사랑은 없다. 즉 존재로서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고, 또 나의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것, 하나님의 의가 나의 의미가 되는 것, 삶의 의미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졌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람 창조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 했느냐?”고 물으신 것은 “내가 너에게 하나님의 관점과 마음으로 의미가 있었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필리아(Phillia, 동료애)였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고 답을 했다. 그것은 자신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않았다는 고백이고 시인이다. 두 번에 걸친 동일한 질문과 대답 이후에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러면 네가 나를 Phillia의 사랑으로 했느냐?”고 물으신다. 마치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산신령이 착한 나무꾼에게 묻듯. 베드로는 그 질문에도 자신이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라 사람의 기준으로 보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한다.


그 솔직한 고백에 대하여 예수님은 만족하셨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이제 예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안목이 같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베드로의 안목이 예수님과 완전히 동일하게 되는 것은 오순절이 되어서지만 적어도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뜰에서 매 맞는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던 것은 자신이 예수님과 안목과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그랬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항상 그렇듯, 자신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고 시작이다. 나머지는 성령이 오셔야 한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오시므로 베드로와 제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이 완성된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하신 대로 된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이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말씀이다. 이미 목욕한 자요, 온전케 된 자에 속하는 베드로와 10제자들에게 열리지 않았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일깨우시는 대화가 갈릴리 바닷가의 대화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간절하게 설명하시고 계신다. 십자가를 지고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오셔서 이를 완성한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시듯,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과 같이 보잘 것 없을지라도 육신을 가진 존재라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순종하므로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존재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잉태케 하신다. 우리가 육신으로 사는 삶을 부여 받은 것은 바로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낮아지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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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 두 가지 믿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0. 8. 04:00 Writer : 김홍덕

(요 17장)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두 가지의 명제가 함께 있는 말이다. 먼저는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것으로 그리스도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낮은 자리 십자가로 가는 존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 있고 이어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둘은 연결되어 있어서 둘 중의 하나만 믿는 믿음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지금이야 성경에 권위가 부여되어 있고, 그 성경을 신앙의 경전으로 삼는 사람과 종교가 많은 중에 성경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알고 인정하지만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편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성경에 있는 문장을 믿는 것, 더 자세히 말하면 자신에게 감흥도 없고, 자기 일로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믿음이고 문자를 인정하는 수준이다. 물론 그 마저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러나 오늘날도 당시의 예수님처럼 찌질 한 모습을 한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사람들은 하나님 아들이라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최상위의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인들, 창녀들과 먹고 마시는 것이나,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기에 사회적 규범과 동일한 종교적인 계명을 어기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모습은 한 마디로 사회적으로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오늘날도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사실은 예수님 당시보다 더 심각하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적어도 세상의 가치를 좇는 자기 가치관 앞에 거짓을 행하지는 않았다. 하나님 앞에 악한 것이지만 거짓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신앙적 교리와 사회적 명제로서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교회를 좋게 지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고, 세상의 일에서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요 영광스러운 일이라 말한다. 세상 가치를 좇는 본심이 세상의 가장 천한 신분인 사형수로서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는다는 어이없는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기에 한편으론 더 심각하다.


그런데 가룟 유다를 제외한 베드로와 제자들은 죄인, 창기들과 먹고 마시는(의를 같이 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나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쉽지 않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이것을 간과하거나 아예 이런 개념조차 없어 보인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존재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이 육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 창조되었고, 이 육신은 그 창조목적과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본질이며 핵심임을 순종하는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베드로에게는 보잘 것 없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며 그리스도였다. 다만 그들에게도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세상의 임금과 같이 높은 존재였다.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므로 지금은 초라해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임금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스도는 그런 존재라고 믿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자신이 가진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상충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확증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치 없는 종의 값을 받고 팔았다. 하지만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은 혼돈에 빠졌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도 확실하고, 그리스도는 로마 황제보다 더 나은 신분이라는 자신들의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하나님의 법과 의, 그리고 그 법과 의가 다스리는 세계 안에서는 상충되는 것이고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자신들의 혼돈 중에서 기준을 육신으로 오신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이라고 기준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문제 삼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 번 확증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제 곧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임에도 그들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의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주로, 또 하나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심령에 거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과 능력을 빌어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어렵다는 말이다.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과 같은 삶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있다면서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보고,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은 가룟 유다와 같다.


예수님은 육신 가진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아들, 곧 하나님의 의이자 인생의 목적이 하나가 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셨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른 존재로 여기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니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게 된 목적임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며, 예수님이 보이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며 가시고 있는 십자가의 길이 그리스도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그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는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을 따라간 베드로가 자신으로서는 저렇게 매 맞고 있는 예수님을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저 꼴로 있는 예수를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죄인들과 함께 먹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과 낮아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은 맥을 같이 하는 것이고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은 결국 생명이 되는 것이기에 아기를 얻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결혼과 같고, 그리스도가 낮아지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은 결혼한 신부가 남편의 유전자를 받아 잉태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가 잉태되는 것은 사람이 조성한 것이 아닌 생명의 법이 있기에 가능하다. 결혼하여 동침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생명이 되는 법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법이다. 그와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리스도는 낮아지는 존재라는 것 사이에는 성령이 계신다. 그래서 성령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예수님이 나셨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할 것은 결혼하지 않으면 아이를 얻을 수 없듯, 말구유에 오신, 초라한 육신의 신분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당연히 성령이 역사할 이유가 없다. 당연히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는 것에 이르지 못한다. 그것을 믿을 수 없다.


베드로와 10제자들을 가룟 유다와 구분하신 것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들과 함께 먹고 마시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으며,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이유로 무시하고 외면한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했을 때 제자들의 말 속에 있는 사람들의 관점,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는 관점은 선지자요, 엘리야였다. 사람들은 자기 병을 고칠 때 예수는 선지자요 능력자로 인정하기도 했지만 하나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모습과 놀랍도록 동일하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믿고 그 능력을 의지하지 하나님의 의와 법이 육신이 된 존재로 믿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의와 법이 육신이 된 존재로 믿는다면 육신 가진 자기 자신과 예수님을 다르게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 17:8)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성령만 오시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가지를 말씀하셨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셨고, 저희로 인하여 영광을 받았다고 하셨으며,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 저희도 하나가 될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 기도를 마치면 그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 갈 사람인데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 17:10)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요 17:16)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 단지 성령이 오셨는지 아닌지의 차이뿐이다. 하지만 먼저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 것,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그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놀랍게도 그것이 선행되면 성령이 오시는 것과 성령께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하셔서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셔서 낮아지는 본성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본능적으로 이루어진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 믿는 것이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심령에 심긴 말씀의 씨앗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 믿음이 있었기에 목욕한 자였다. 그 믿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아직 분명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아직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면 오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단계의 상황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반대로 그것만 있다면 성령이 오셔서 생명이 되게 하시고 생명으로 거듭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이 우리 삶을 주관한다. 그게 그리스도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본분임을 보이신 이유다.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지만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다.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가진 자신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믿음이다. 기준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예수님 관점에서 보겠다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심령이다. 그렇게 수동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주로 주관하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은 것은 성령이 오시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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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 신념 vs. 믿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10. 7. 04:00 Writer : 김홍덕

믿음에 대한 또 하나의 생각으로 불가능한 것,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될 것이라고 신념을 가지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마음과 신념을 하나님께서 믿음이라 여기시고 기쁘게 이루어 주시리라 생각한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상은 현실을 더 믿는다.


한 예를 들어보자. 아들을 간절히 바라는 부부가 임신하고 그 아이가 아들이라 믿는다면 설사 딸로 태어나도 다시 아들로 바꾸어 주시리라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 주시리라 믿는 것은 간절한 믿음이라고 말하지만, 현실보다 약한 믿음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면 사람들의 믿음처럼 보이는 이 신념은 순종과 반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신념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하나님을 위한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념을 넘어 협박이다. “하나님 이거 들어주지 않으면 당신 손해야?”라는 말로 자기 신념을 관철시키려는 시도는 협박 그 자체이다.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권면이 필요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걱정할 것도 아니다. 걱정, 아니 생각은 그냥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움직이려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다고 믿기도 하는데, 그 믿음도 사실은 신념이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것은 기도와 기도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이전과 달리 하나님의 뜻에 순종되었을 때의 일이지, 사람이 기도했다고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다. 기도라는 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뜻과 정체성에 맞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에 맞게 답하신다.


그리고 육신의 정욕으로 쓰려고 육신의 것을 구하는 기도 역시 기도하는 방법을 바꾸든 내용을 바꾸든 장소를 바꾸든 소용없다.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 가도 샌다. 집에서 하나님의 뜻과 달리 부자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는데 응답이 없다고 교회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신앙을 떠나 무식한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다면 기도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바뀐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유익과 육신의 정욕으로 쓸 것을 구하다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구하는 것으로 기도가 바뀔 때만 하나님도 마음이 바뀐다. 사실은 하늘 곧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져 사람이 바뀐 것이다. 그것을 순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면 하나님이 마음을 바꾼 것이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한다. 하나님을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담보하는 신으로 믿는 자리에서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를 가진 분으로 대하면 하나 님이 마음을 바꾼다. 그것이 아닌데 바꾸실 리 없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꾸는 것은 수동적인 믿음,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관하심에 순종하는 믿음 그것만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욥 13:7,8)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 11:34,35)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위한 자기 생각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자기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의 배려나 변론이 위함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사람이 할 것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부터 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고 백성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로 사는 사람들의 나라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뜻이 자기 안에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다 된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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