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는 유대민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스더 Date : 2025. 2. 16. 14:06 Writer : 김홍덕

모르드개와 유대인을 모두 죽이려는 하만의 계획은 수포가 된다. 하지만 하만의 계획은 오히려 자기를 죽음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계기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에스더가 왕후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르드개가 왕을 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만이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한 이유는 자기에게 절하지 않은 모르드개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백성, 세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에 대한 세상의 핍박을 대변한다. 세상은 왕의 권세를 자기 것으로 생각한 하만처럼 하나님이 주신 삶을 자기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인 높은 자리와 영광을 구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며 핍박한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바로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의 모습이고, 그들이 보여준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과정이자 하나님의 섭리다.

 

높은 자리와 영광을 진정한 가치로 생각하는 세상은 낮아지는 본성을 하나님의 영광과 가치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다. 굳이 잡아서 때리고 고난을 가하지 않아도 세상 가치의 낙오자라며 비웃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핍박이다. 이런 핍박의 극치는 뭐니 뭐니해도 십자가다. 십자가가 이 모든 핍박을 이겨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모습은 십자가의 한 단면인 셈이다.

 

모르드개는 민족의 위기를 에스더에게 전하면서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4:14)"라고 말했다. 이런 날을 예상하고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왕후로 만든 건 아니지만, 왕후라는 자리가 백성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분명하다.

 

앞에서 우리는 왕후라는 자리, 아내라는 자리는 왕과 남편의 의라는 내용에 대응하는 형식이라는 걸 비유한다고 설명했다. 왕후가 왕의 후사를 잇는다는 건 왕이 가진 의가 육신이 된 아들을 낳는다는 것으로 결국 왕의 의라는 내용과 여자라는 왕후의 형식이 하나가 되어 아들을 얻는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신이 되어 얻게 되는 하나님 아들로 사는 삶을 설명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 상황과 전개는 에스더가 가진 왕후라는 지위가 유대인을 세상의 핍박과 멸망에서 구했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을 때 세상의 핍박을 이길 수 있다는 걸 설명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에스더는 그 유명한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말로 대변되는 용기를 보여준다.

 

이는 왕의 허락 없이 왕에게 나아갔다가 왕이 허락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당시의 법을 인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자기 백성을 위해, 세상의 핍박을 이기기 위해 왕에게 나아간다. 왕이 허락하므로 에스더가 죽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입긴 하지만 에스더로서는 죽을 수 있는 자리로 스스로 간 건 분명하다.

 

에스더의 이런 모습은 십자가로 스스로 가신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하다. 물론 에스더는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죽을 자리로 스스로 갔다는 건 같다. 이 에스더의 모습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스스로 낮은 자리로 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상고할 것은 이런 에스더의 모습이 자신과 유대민족을 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세상의 핍박을 이길 수 있다. 세상과 복음이라는 이런 가치의 선택에서는 하나를 부인하는 거로는 이길 수 없다. 세상의 가치를 부인하고, 추구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길 수 없다. 어둠을 향해 "물리 가라" 소리친다고 물러가지 않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빛이 있어야 한다. 즉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의 가치가 진정한 가치가 되어야 이길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왕후라는 자리, 여자라는 자리는 왕과 남자가 가진 의를 형식으로 바꾸어 내는 존재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여자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남자로 표현하는 건 하나님의 성별이 남자여서가 아니라 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인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온전한 존재가 된다. 온전하다는 건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유혹이나 핍박을 이길 수 있다. 인생으로서 자기 존재 목적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건 가장 합당하고 온전한 일이다.

 

우리가 세상의 핍박, 높은 것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받는 비난과 조롱은 낮아지는 가치를 진정한 가치로 여길 때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노력이나 자기 세뇌로 안 된다. 그리스도의 낮아지는 본성으로 거듭나야 한다.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다. 늑대가 아무리 노력해도 늑대인 이상 고기의 가치를 버릴 수 없다. 양으로 거듭나면 고기는 무의미해진다.

 

또 하나 유대인을 구한 힘은 모르드개가 아하수애로를 구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에스더 2장 말미에 나오는데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통해 역모를 미리 알려 주는 일이었다. 그런데 잠들지 못하던 아하수애로 왕이 이 일을 상고하게 되고, 그때 어떤 보상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되므로 이를 보상하는 일이 유대인을 구하는 또 하나의 힘이 된다.

 

구조상 모르드개가 아하수애로 왕을 구하듯 사람이 하나님을 구하는 일은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능력이나 의는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셔야 하는 필요가 있다는 건 분명하다. 사람은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존재라고 할 수도 있는 셈이다.

 

이는 아하수애로가 자신을 영화롭게 할 사람이라고 모르드개를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분명하게 언급하셨는데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고 선언하셨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요 17:10)

 

하만은 유대인,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을 핍박했지만, 하나님은 아하수애로를 통해 오히려 모르드개가 절대자를 영화롭게 하는 사람임을 확정했다. 하나님을 찬양 하는 자,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이 아니라 여기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 이걸 알아야 거듭난 사람이다.

 

세상은 높은 곳을 앙망하고 평안과 성공을 구하면서 그 길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핍박한다. 이런 그들의 행동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주신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낮고 천한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라는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이 능동적으로 핍박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핍박에 거하는 꼴이 되기는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영화롭게 여기신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하만과 모르드개의 전세 역전을 가져온다.

 

세상을 사랑하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은 하만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화롭게 여기는 줄로 안다. 착각에 빠진 하만은 결국 그 망상 속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무지보다 착각이 위험하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이게 하만과 모르드개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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