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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 유대인의 왕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0. 15. 04:00 Writer : 김홍덕

(마 27장, 막 15장, 눅 23장, 요 18,19장)


예수님은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에 달린 죄인의 명패는 “유대인의 왕”이었다.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하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자고 했지만 빌라도는 “쓸 바를 썼다”고 말하고 요구를 일축했다. 이 작은 장면에서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지 자신들이 인정하는 진정한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유대인의 왕은 다윗과 같이 모든 싸움을 이겨서 나라를 굳건한 왕국으로 세우는 것과 같은 능력 있는 왕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라고 하며,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로 이긴 자, 그것도 모든 것을 다 이긴 존재가 되어서가 아니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으로 너무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졌는데,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패배자요 사형을 받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는데 왕이신 것은 낮아지는 법에 있어서 왕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왕 중의 왕이며, 우리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신다고 하니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이 왕이신 이유를 인함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관념 속 왕, 곧 모든 것을 이긴 자가 왕이라는 점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보다 잘 되어야지’라는 이 한 마디에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좋아하는 모든 이유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다신 한 번 설명하지만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신 이유는 낮아지는 것에 있어서 왕이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낮아지는 것에 왕이신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에 대한 모든 개념들 중에서 낮아져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진정한 왕이라는 의미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이고, 그 세상에 오셔서 낮아지심으로 왕이 되신 예수님을 왕 중의 왕이라고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왕으로 여기시는 왕은 낮아지는 것으로 왕이 되는 자라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왕은 낮아지는 자며, 그것이 하나님이 왕으로 여기시는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성품과 뜻이 바로 낮아지는 것에 있다는 확실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두고 빌라도와 제사장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상반된 견해와 궤를 같이 한다. 빌로도, 곧 세상 왕의 지위에 있는 자가 볼 때 한 없이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총독으로서 정치적 의도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그의 모습이 바로 성전 모퉁이 돌로 사용될 돌을 버리는 건축자의 모습이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죄인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죄인이요 하찮은 자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수 없이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멸시와 천대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은 유대인의 왕이 아니므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세상의 실패자는 하나님의 아들도, 그리스도도, 유대인의 왕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버려진 돌을 성전의 기둥으로 삼으셨다. 세상의 가치로 멸시 받아 버림받은 예수님이 곧 유대인의 왕이요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이와 같이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다시 한 번 세상에서 이긴 자가 왕이 아님과,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단지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명패에 대하여 빌라도와 유대인들의 작은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 = 세상에서 잘 된다’는 기독교의 일반적인 믿음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가치관이라는 것을 외면하면 안 된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어원적으로는 야곱의 4번째 아들 유다(하나님을 찬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런 백성들의 왕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백성의 주인인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무 분명하게 세상의 가치로 이긴 자를 왕으로 여기는 유대인과 세상사람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달리 십자가를 지는 낮고 낮은 자리로 가는 예수님이 하나님 백성의 왕이라 말씀하신다. 


낮아진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은 낮아지는 법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다. 더 낮아지는 자가 왕이 되는 법의 나라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그것이라는 의미다. 유대인의 왕에 대한 말씀은 이것을 선명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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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 십자가의 본질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10. 14. 04:00 Writer : 김홍덕

십자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든 사람의 구원인 것은 틀림 없다. 자기 안에 십자가가 구원인 이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구원이지만, 왜 십자가가 구원인지 모르고, 십자가가 구원인 이유가 자기 안에 없다면 구원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 영혼 구원의 문제고 구원받은 삶은 영원한 것이니 영원한 문제인데 인과관계도 모르면서 헌금 내면 “너는 구원받았다” 말하는 사람 말만 믿고서 그냥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할 문제로 여기기엔 너무 중요한 사안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사건이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목적은 어떻게 달성되는지그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까지 사람인 나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보이려 하셨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의 정체성으로 보이지 않으면 십자가의 구원이 미칠 리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또 하나는 역시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죄명으로 보면 유대인의 왕이 라고 말하는 것이 반역죄에 해당하지만, 그 죄를 심판한 빌라도가 보기에도 예수님의 모습은 왕이라고 하기엔 너무 형편없어 그냥 놓아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 아들은 그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정의가 있는데 예수님은 그 정의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하고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을 것 같으니 하나님 아들에 대한 자기들만의 우상이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예수님을 살려 둘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은 그때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떻다는 자기 생각을 다들 가지고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나 오늘날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이 하나님 아들에 대한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기 모습이 의롭지 않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세리와 창녀와 함께 먹는 나사렛에서 난 목수의 아들이 하나님 아들일 리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 둘 다 사람의 모습이 문제였다. 사람이라는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다는 것이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의 공통점은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관점이고, 하나님과 다른 관점이기에 죄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스러운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왜 심문을 받으실 때 다른 모든 송사에는 답하지 않으시다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두 가지 질문에만 답을 하셨을까?. “유대인의 왕이냐?” 물으니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답하시고, “네가 찬송 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라고 물으니 “내가 그로라”라고 죽을 답만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외에 성전을 3일 만에 건축하겠다고 했다는 것과 같은 송사들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질문은 뭐라고 답해도 매를 맞기는 하겠지만 죽을 죄는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이유를 아는 것은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을 받겠다는 사람에게 아주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곧 우리 구원의 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답하신 이유를 모르는데, 자기 안에 그것이 생명과 본성이 되어 있지 않는데  “나는 구원받았다” 말하는 것은 답안지도 제출하지 않고 나와서 “합격했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선언 이다. 독립선언이 선언을 낭독하는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의 것이듯, 예수님의 선언은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존재라는 선언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독립선언문을 듣고 참여하면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는 것처럼 자신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 죽을 줄 알면서 답하신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보이기 위함이고 십자가로 가신 것도 사람의 정체성을 보이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임을 보이셨다. 그 모습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모습이 라는 것임을 보이셨다. 십자가에 달리시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들이 존재하면 아버지도 존재하니 하나님 아들임이 드러났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낸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아들로 보이니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려면 십자가로 가기 전에 속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십자 가는 아무나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과 본성이 된 사람이어야 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만 질 수 있다.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지니 하나님 아들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것은 군병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이라는 본성이란 의미다.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십자가에서 아들임이 드러났다면 십자가 이전에 이미 아들이었다는 의미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이미 아들이었고, 그 아들의 본성이 십자가로 데려간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조각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비추어 예수님을 죄인으로 삼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여기겠지만, 사실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생명과 법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데려간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가게 한 것은 신념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


이것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사들과 맞선 베드로에게 이 상황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성경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의무감에서 나온 신념을 가지고 십자가로 가셨는가?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다. 성경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하나님 아들이다.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니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십자가로 가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생명의 법이 끌고 가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십자가로 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자기가 지겠 다고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 곧 하나님 아들만 질 수 있는 것이다. 그 정도 구분은 있어야 영광의 십자가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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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 십자가의 섭리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10. 13.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상세보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사람을 구속한 역사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죄를 사했다는 결론적 명제만 믿는다. 그러너데 너무나 놀랍게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자신의 죄를 사하는지는 잘 모른다. 단순하게 죄는 내가 지었고 벌은 예수님은 받았다는 식이 전부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속한다는 것도 그냥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로 아는 식이다. 예수님의 피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그런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고 말씀하신 문자 그대로만 믿는다.


십자가가 왜 구원인지 모르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


그렇게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잘 믿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당장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도 안 믿는다. 그것을 믿는다면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등의 방법 같은 것을 궁리하지 않을 것이다. 안 되니 궁리한다.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명하셨을 것이라는 믿음만 있어도 되는 일인데 그것은 못 한다. 그런 믿음도 없으면서 십자가의 능력은 그냥 믿는다.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이 되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구원을 믿지 않는 것이다.


더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도 있다. 십일조와 삼겹살과 안식일에 관한 것이다. 모두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씀인데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지키고, 안식일은 일요일로 변경해서 지키고, 삼겹살은 그냥 먹는다. 같은 구약에 있는 율법 같은 말씀인데 다르게 대처 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른다.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나 기독교인 들에게 물어보면 “왜 시비를 거느냐?”는 식으로 본다.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 1. 삼겹살, 안식일, 십일조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든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해석을 하면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은 가감 없이 믿고, 돼지고기는 성경과 다르게 먹어도 된다고 하려면 그것을 구분하는 기준이라도 있어야 하겠지만, 없다.


이렇게 각개전투로 들어갔을 때 많은 모순이 나오는 것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몸의 어느 세포로 DNA 검사를 해도 동일하게 나오고, 몸의 어떤 부분도 그 사람의 정체성에 맞게 움직인다. 약속과 증거로 본다면 성경책 안의 문자로 표현된 약속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뜯어볼 때 의문이 많아지는 것은 생명이 그 속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정작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골머리를 앓는 말씀들은 거의 그 말씀을 지켜야 육신의 복락이 있을 것 같은데 잘 지키지 못하겠다 싶은 것들만 고민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고민도 필요 없고 어떻게 죄가 사해지는지 알 필요도 없을 정도로 심플하게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설명할 정도로 자기 안에 분명한 것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관한 사람이다. 시험지에 있는 답을 알려면 자기 안에 그 문제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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