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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문제다. 그 절대성에 비하면 사람들은 의외로 구원을 간단하게 생각한다. 아니 그냥 교회에 출석하고 등록하면 당연히 구원은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생각 아니 질문을 해 보자. 구원을 받았다면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며, 구원 받기 전과 지금 무엇이 다른가?


구원은 죽을 자리,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서 은혜를 입어 그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구원을 쟁취했다고 하지 않고, ‘얻었다’,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죽을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자기의 노력이나 공로 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다. 


자기 힘이 아닌 은혜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구원은 명백히 죽을 자리,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원은 도무지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인가? 이것을 분명하게 정의하지 못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고 말장난에 불과하다.


물론 상투적인 표현으로 죄와 사망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또 죄의 자리는 어디며 사망의 자리는 어디인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려면 자신의 과거 어떤 자리가 죄의 자리인지, 어떤 상태가 사망이었는지는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을 구원한 이를 믿고, 감사하고, 그가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진심일 수 있을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려면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는 알아야…


어디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니 상투적으로 죄와 사망에서부터라고 하는 것 때문이다. 어떤 자리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제 그 자리와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아무리 양보해도 자신이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이제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있어야 할 텐데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이 과연 그럴까? 


오늘날 예수를 믿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구원을 받았다면서 기도할 때 마다 ‘회개’와 죄를 뉘우침으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인가? 그런데 그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이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은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 말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엄청난 모순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것은 큰 문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의 이면을 살펴보자. 이를 위하여 이 모순을 다시 생각해보자.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죄 없는 사람이 되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믿는 모순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것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에 있다. 그리고 죄를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어긴 것이 죄고,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 죄의 자리에서 건져내시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모순에 빠졌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의미다. 안다는 것은 모순이 없다. 모든 것을 막는 방패와 모든 것을 찌르는 창, 어느 것이 이기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모순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무엇인가? 죄의 시작은 선악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이 죄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또한 순종을 지극히 강조하고 있으니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그것은 어려운 선악과가 어려우니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접근하고서 그것을 선악과의 문제 전부라고 보는 것이다. 불순종을 죄의 시작이라고 보기에 죄는 성경이 명한 것을 순종하지 않고 그릇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신학과 생각과 신앙은 결국 죄를 <행위>로 본다. 성경을 지키지 않는 <행위>를 죄로 본다. 


죄를 행위로 보는 것은 죄에 대한 아주 간편한 해석이고 접근이다. 물론 죄는 결국 불순종이라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행위는 언제나 본질이 아니다.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생각이 나타난 것이고, 그 생각은 그 사람의 본성과 정체성(Identity)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죄의 개념이 가진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행위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는데 있다. 이것은 도저히 메울 수도, 분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 말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죄의 주체, 개념을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죄라는 것은 행위가 주체이고 본질이라고 여겨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행위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거나 범하는 불순종의 자리가 구원을 받아야할 죄의 자리였고, 구원은 죄가 없어진다는 것이니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성경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면 죄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지 않은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신호위반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작 자신은 여전히 죄를 짓고 있으니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면서 죄 없다고는 하지 못하는 어이없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나마 자신이 이런 모순에 있다는 것을 인지라도 하고 있으면 다행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기독교인이라고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모순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인정하지 않으려니 변명이 필요하다. 자기 상태, 자기 신앙의 모순을 감출 변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변명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집단이 있는데 바로 신학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변명들을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며 저주하셨고, 회 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그 대표적인 변명이 바로 “예수님과 우리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경 읽고, 기도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깨어 있어서 죄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노력을 효율적으로 할 것인지 연구하고 서로 나눈다. 심지어 그것을 나눔이라고 한다. 점점 수렁으로 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달궈지는 냄비 안에 있는 개구리마냥 자신이 더 깊은 수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더 열심히 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수렁과 늪에서는 열심일수록 더 빠져든다. 이런 어리석음을 신학이 이끌고 있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죄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죄의 정의가 잘못된 것은 행위를 죄의 주체로 보기 때문이다. 행위를 기준으로 죄를 판단한다는 것은 행위의 주체인 육신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나타난 것이 본질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믿는다는 의미다. 성경도 문자 그대로 보고, 성경에 있는 기사도 기사 속의 사람들의 행위를 기준으로 본다. 그렇게 나타난 것을 행위로 보니 구원 받은 사람이 천국에 가면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 것이라고 말한다. 천국에서 금은은 도대체 어디다 쓸 것인가? 배고프지 않고 항상 기쁜 곳이 천국이라고 하면서 금 면류관에 큰 기와집은 도대체 왜 필요한가? 이렇게 모순이 끊이지 않는 신앙을 하나님 믿는 신앙으로 여기고 있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죄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든지 아니면 구원을 받지 않은 것임을 자백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그마저도 신통치 않다.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기 때문이지, 정말로 하나님의 의와 뜻과 생각이 무엇인지, 그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결정적으로 그것이 자신과 어떤 상관인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이 제 아무리 자기 입으로 또 신학적 논리나 교회의 증서로 구원을 주장해도 그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그런 구원은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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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육신의 희생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9. 1.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육신을 부끄러워하는 아담을 위해 가죽옷을 입히 셨다. 어떤 동물의 가죽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죽음은 사람을 대신하는 제사의 원조로 볼 수 있고, 제사의 궁극은 예수님 이시며,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표현하므로 일반적으로 양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아담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기 위하여 다른 것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육신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어떤 육신이 소비(희 생)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에는 육신이 소비된다는 것을알 수 있다. 이것을 희생이라고도 한다. 제사가 희생인 이유다. 무엇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다. 그러니까 구속에는 육신이 소비되는 희생이 절대적이다. 이것은 육신의 존재 목적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낮아지고 희생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 하는데 육신은 절대적으로 온전하며, 그 온전함으로 인하여 하나 님께서 육신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겠다는 뜻을 정하신 것이다.


사람을 육신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육신의 소비가 있어야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 희생하는 육신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면 사람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 께서 인생을 조성하신 목적을 알게 된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 임이 드러난다는 것이 바로 이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인생이 소비되고 희생될 때 하나님이 나타나니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영광이란 나타나는 것이다. 인생은 단 한 번이고 사는 동안 소비되듯 연약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속이 있다는 것은 대속물의 육신이 소비되었다는 것


예수님의 구속도 이것이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법도 이것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도 이것이다. 예수님은 이법대로 오시고 희생의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 법은 모든 인생의 존재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뜻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보는 관점이다. 하나님께서 육신 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은 그 목적에 너무 적합하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는 육신을 다르게 보게 한다. 세월과 함께 소비 되는 연약한 육신은 하나님께 부정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부끄럽게 여긴다. 사람 안에 욕심이나, 정욕이 가득함이 하나님 앞에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육신 가진 인생을 창조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만드신 이를 비난하는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해서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벗어난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과 다르게 보던 우리가 육신에 대하여 가지는 관점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 가가 밖에 없다. 구원을 얻게 할 이름(정체성)으로 예수 외에 주신 적이 없다고 하신 것이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것은 오직 육신의 정체성이다.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에게 온전한 육신의 정체성을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이 옥합과 같이 깨어지니 옥합에서 향기가 나듯 물과 피가 나왔다. 육신이 희생되고 소비되니 물과 피, 즉 하나 님의 말씀과 생명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본 사람들도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보여 주신 대로 자신에게 주신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존재임을 깨닫고 예수님과 같이 다시 육신으로 종과 같이 섬겨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일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형벌을 대신 받은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육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이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육신의 희생을 드리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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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한 담론 - 나는 구원 받았을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0. 8. 31. 11:20 Writer : 김홍덕

예수를 믿을수록 구원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깊어진다. 구원의 기준은 생각보다 엄격한 것이라는 것을 점점 믿게 된다. 그리고 구원의 기준이 엄격하다고 할 때 그 엄격함이란 우리가 흔히 보는 교회들, 어느 날 어떤 이유로 출석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세례문답 교육을 마치고 부활절 혹은 추수감사절 언저리의 어떤 주일에 받는 세례를 구원의 기준으로 여기는 것보다 좀 더 엄격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형식적이고 율법적이며 하나님께 삶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목적인 일반 종교적 신앙 안에서는 생각해보지도 못하는 세계에서도 범접하기 힘든 엄격함일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구원의 기준이나 자격에 대한 사설, 구원이 무엇이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담보하는지에 대한 담론은 1+1=2라는 지극히 단순한 명제를 산수 이상의 논리로 끌고 가려는 시도 같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을 한 번만 사는 인생의 목적과 희망사항에 가깝다고 해도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의 문제로서 여기거나 신앙하는 사람에게 구원은 사실 유일하고 절대적인 문제이다. 구원을 유일하고 절대적인 문제로 심각하게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고, 설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자기 입으로 믿는다고 해도 다 회칠한 무덤과 같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은 너무 쉽고 단순하며 그야말로 길가다 줍는 돈과 같이 쉽게 얻어지는 것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교회에서 말하고 심지어 강요하다시피 전하는 구원이 어떻게 베풀어지게 되었는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국한해서 봐도 그 절대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아버지가 지은 피조물의 손에 죽임을 당하므로 베풀게 된 구원이다. 그것도 당시 최고 극형인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말이다. 설사 그 덕에 구원이 쉬워졌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구원이라는 개념의 성립을 위해서 지불한 값은 지금 기독교인들이 의미도 모른 체 세례문답식에서 몇 개의 답에 형식적인 답으로 얻을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것은 아니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신앙인들이 구주로 믿고 심지어 자기 목숨을 바쳐 따르겠다고 하는 예수께서 자신이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는 점이다. 십자가를 지므로 구원을 얻게 될 사람들에게 자기 십자가가 있으니 그것을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구원을 베푸시면서 그 대가처럼 말씀하신 그 말씀은 한 편으로 생각하면 진정한 구원의 자격, 구원의 기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구원을 베푸니 너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는 자들을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가는 삶이 구원 받았다는 증거와 자격과 기준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를 져야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쉬운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삶이 그러한가? 무엇보다 받았다는 구원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가서 받은 것인지, 아니면 세례문답에 정해진 답을 공개석상에서 인정하면 되는 더할 나위 없는 간편한 방법으로 받은 것인지 반추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구원에 대하여 이와 같이 깊이 있는 상고가 필요함에도 그냥 구원은 받은 것이라 여기면서 구원의 증거나 확신에 대한 묵상은 그냥 덮고 넘어가려니 성경을 깊이 알 필요도 함께 덮여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구원은 너무 기초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라 다시 들먹이는 것은 괜한 분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모든 기초와 출발이 구원이라는 것은 불변이다. 그렇기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신앙에 있어, 성경이 의도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의문을 없게 하는 것이다. 행여 의문이 생겨도 자기 삶으로 또 묵상함으로 속에서 생수가 넘쳐듯 깨우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구원 받은 증거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줄 알면 그 속에서 생수가 넘쳐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와 그 보내신 목적과 그 목적대로 사는 것에 있어 의문이 해결되지 않고 마냥 노력만하고, 예수님과 자신은 다른 존재이기에 노력하는 것으로 모든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삶의 목적과 살면서 마주하는 일들의 의미들을 깨우칠 본성이 없다면 그건 구원이 없다는 증거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을 공부하는 신학은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보내신 자에 대하여 또 그 보내신 목적과 의에 대하여 알지 못함을 자인하는 집단의 허울이다. 행여 신학교를 졸업하면 그것을 깨우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바 아닌가?


구원은 기초 같지만 뿌리고 신앙의 시작이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구원은 신앙의 종착지나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살 동안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죄 없다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고, 자신의 행위가 자신을 정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정죄함에 자신이 반복적으로 뉘우치는 것은 신앙의 경건이고 예수님과 같이 되려는 노력으로 믿고 있다면 구원받은 삶이 아니다. 어쩌면 신앙은 바로 이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라는 생각을 지나노라면 구원의 자격이라 할까? 아니 구원의 기준이라 할까? 그 자격과 기준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한 것은 세례문답으로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생명을 얻는 것인데, 생명을 얻었다면 그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도 본성도 그 본성이 이끄는 삶도 없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아니 도리어 더 위험하다. 없는 것을 가졌다고 착각하고 있으면 구원을 얻으려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 받았다 할 수 있나?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또 성경에 대하여 더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먼저 돌아봄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다. 어떻게 돌아 볼것이냐고? 



먼저 당신이 하나님께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돌아보라. 

자신과 자신의 가족 또 사랑하는 이들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다. 왜냐고? 하나님은 그런 것을 본질로 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곧 존재의 신이시며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 축복이 아니고, 또한 환난과 실패가 하나님의 벌이 아니다. 그게 벌이라면 사도들은 어떻하라고? 십자가를 진 예수님은?



또 당신의 말을 들어보라. 

주변의 어떤 이의 세상 일이 잘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지, 또 자신이나 사랑하는 이가 속한 사회에서 터부시하는 일을 당했을 때 ‘내가(그가) 하나님께 무언가 잘못한 것은 없나?’ 돌아보거나 걱정하는 말과 생각을 하는지. 그렇다면 그 또한 구원받은 삶이 아니다. 하나님은 행위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은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답하지 못한다면 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구원도 없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죄를 어떻게 사함을 받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이 죄를 사했다는 구원을 받았다면서 아직도 스스로 죄 없다 말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중 어느 하나라도 해당한다면 구원은 없다. 단언코.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구원의 자격을 사람의 말과 문장으로 정의하기는 힘들지 몰라도 적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그분의 구원을 알 것인데, 앞서 열거한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들춤에도 자신의 구원을 외면한다? 그게 바로 성령을 훼방하고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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