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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스스로 정죄하는 인생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25. 04:00 Writer : 김홍덕

살펴본 바와 같이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나 하나님과 육신을 다르게 보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상태에서 육신을 바라보면 육신은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로 본다는 것을 보여 준다. 자신이 먹은 선악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선과 악의 기준이 자기 인생의 연약함과 육신의 부정함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를 꾄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듣고서 보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 보였다. 먹으면 하나님과 같아질 것처럼 보여서 선악과를 먹었더니 그 선악 과가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


하나님 같아지려는 잘못된 안목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해보니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과 비교할 때 정말로 비교조차 안된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당연히 그 인식은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한 그릇된 관점에 기반을 둔 것이다.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내용이요 본질이신 하나님의 의와 형식인 육신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과 존재가 같아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말 그대로 어두운 것이다.


그 어두움 안에서 보면 사람은 예수님과 절대 같아질 수 없다. 어두움에 빠진 사람들은 왜 하나님 앞에 육신이 너무 부끄럽고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원인을 생각지 않고 무화과 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 한 아담처럼 어둡고 하나님을 떠난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그런 어리석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한 것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것으로 온전히 가릴 수 없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많은 사도가 율법의 한계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율법, 즉 사람이 생각한 법과그 법에서 파생된 생각인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그 관점에서 시작한 그 어떤 것도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스스로는 다시 만족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안고 있는데 만족스러울 수는 없다. 만족의 동산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끊임없이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한 신약성경을 문자대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만족과 안식과 평안함이 없는 것이다. 다이루었다면 그럴 이유가 없는데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 앞에 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사람의 문제다.


그래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육신으로 지켜내려 하고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하려 한다. 신부나 수녀가 되고 속세를 떠난다며 중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노력은 비겁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마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라 여긴다. 성경은 그 노력을 바벨탑을 쌓는 것이라 말한다.


사람들의 소망이 담긴 그 피나는 노력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 하면 그것이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다. 하나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안 될 것 같으니 포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그 각각으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육신 가진 인생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고 포기해 놓고 노력은 끊임없이 한다. 율법주 의와 영지주의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그 둘을 혼합 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신앙이 당면한 절대적인 문제가 또 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 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육신을 부정하게 여긴다는 것이 문제를 심화시킨 것이다. 예수님 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자기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흙을 짓이기고 불에 구워 벽돌을 만들 듯 흙으로 지음 받은 삶을 단련하고 금욕적인 노력을 쌓아 하늘에 오르려는 바벨탑을 쌓듯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려 노력도 해 보고, 이것저것 해도 안되니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포기하고 단지 할 수 있는 노력이나 하자는 식으로 주저앉아 있는 것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인생의 모습이다. 그것은 흑암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심각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오히려 신앙의 경건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육신을 가진 인생들은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끊임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그래야 경건한 것이라 외친다.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외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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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영지주의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24. 04:00 Writer : 김홍덕

복음적 관점에서 보면 율법주의는 전통적인 이단이고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 새롭게 자리한 이단이다. 영지주의는 신약성경 후반부를 기록한 사도들, 요한과 유다 그리고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이 많이 언급했다. 이는 다소간 사도들의 사역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는 상대적으로 영지주의보다는 이방인의 신앙과 철학 곧세상의 가치가 복음과 간음(혼합)하는 것과 율법적 신앙에 대하여 많이 경계한 반면, 이스라엘 내의 교회와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비중이 높았던 사도들은 영지주의를 많이 경계했다.


영지주의는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에 있어 육신과 영혼을 따로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육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니 구원과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영지주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하신 것이라고 하거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더 나아가서 육신의 행위는 하나님 심판과 무관하니 방탕하든 상관없이 자유롭게 지내도 된다고 주장도 했다는 것에서 육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주목할 것은 영지주의는 사도시대, 초대교회 시대에만 반짝한 시대적 신앙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이 자신들은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고 단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거룩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영지주의와 본질이 같다. 예수님의 육신과 자신의 육신이 다르다고 판단하는 것도 영지주의고,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육신의 행위에 찔려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생각도 영지주의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역사 속 한 시대의 신앙이 아니라 오늘도 현존하는 신앙이다. 오히려 사도들의 때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칭 정통이라는 신앙에 영지주의가 혼합되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영지주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관점이다. 하나님과 다르게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의 한 모습이다. 육신은 부끄러운 것이니 감추어야 하며, 육신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두려운 것이 라는 판단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히 두 번째 관점이다.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영지주의는 육신을 부끄러워하는 두번째 관점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육신에 대한 관점이 같다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육신을 터부시할 이유가 없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는 육신을 하나님과 다르게 보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신앙


그러므로 영지주의도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에서 율법 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즉 율법주의나 영지주의 모두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두 번째 관점에서 비롯된 신앙이고 믿음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기에 그것을 만회하려고 성경을 지키려는 것이나, 육신은 어떻게 해도 항상 부정하니 이것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육신을 하나님과 다르게 보고 하나님이 만족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은 같다. 둘 다 같은 뿌리가 같고, 둘 다 선악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다.


다만 율법적 신앙이나 영지주의는 뿌리와 본질은 같지만 해결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영지주의가 가진 특징은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옥합을 깨뜨리듯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을 보이셨다. 그렇게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상 이라는 것을 보이셨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을 수 있을지를 비교하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니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예수님과 자신의 육신을 다른 것으로 규정해 버린다. 예수님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를 비교하므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른 육신이라고 생각한다.


영지주의는 없어진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기독교의 신앙 근간이 되어 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말하 면서 예수님과 같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증거다. 예수님과 육신이 같고, 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같으면 예수님과 다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우리가 예수님보다 큰일도 할수 있을 것이라고도 하셨는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님 같이 온전해질 수 없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온전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영지주의의 본질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신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화를 내고 성욕이 일고 욕심에 매인 자신의 모습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니 부끄러워 도저히 예수님과 같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 겸손한 것 같지만, 사람의 육신을 그렇게 본다면 그 육신을 만드신 하나님은 실패자가 된다. 물건으로 치면 불량을 생산한 것이다. 온전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온전하게 사람을 만드셨 는데 그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모욕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한 영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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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율법주의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23.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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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린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 가진 인생을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해보니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약한 육신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관점을 가진 자에게 한없이 부끄러움이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숨기 려고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특히 신약성경 속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이는 신학의 영향이 크다. 공부라는 <행위>로 성경을 대하는 신학은 그 자체가 이미 행위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상식인데 이 상식을 가리고 신학을 거룩히 치장하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행위로 좇는 것은 거리낌 없이 복음적 생활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약성경의 말씀도 행위로 지키려 하면 율법이 되고 복음도 Have To가 되면 율법이 된다


하지만 그런 편법적인 노력들도 엄연히 아담이 무화과 나뭇 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한 것이다. 오늘, 그리고 모든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미리 아담으로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아담의 생각이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 주러 오신 예수 님과 자신을 다른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으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생각 한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자신을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면 이단시하고 터부시한다.


이는 다분히 성경을 기반으로 둔 많은 이단을 인함이 크다. 하지만 자신이 예수다, 혹은 하나님이나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단 들은 예수님의 권세나, 능력이나, 지위를 도용할 뿐 예수님의 생명 이나 정체성,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어 십자가를 지신 본성이 같으 므로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단들의 생각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원이 다르다. 결론적으로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십자 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동일한 생명이 된다는 것이지 복제되듯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생각 한다. 사람은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경건한 신앙 이라고 가르치고 믿고 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신앙의 실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온전하다면 노력할 필요가 있는지를. 노력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을 부족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그것을 감추거나 메우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끊임없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다. 잎이 마르면 또 잎을 따서 옷을 만들어야 한다. 무한 반복이다. 성경대로 살겠다 다짐하고 실패하고 회개하고 다시 다짐하고 노력하는 반복과 같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가죽으로 옷을 해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사람의 무한 반복하는 노력을 쉬게 하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하셨다고 믿으면 서도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은 입으로는 “예수님의 구속을 믿노 라.” 말하지만 실상은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끊임없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예수님과 같지 않은 자신을 메우려는 것이다.


예수님 같이 되려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구원을 믿지 못하는 삶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 노력>하는 사람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성경을 행위로 지켜 의로워지려는 무화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사람이다. 그것은 자신을 부끄러운 존재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며, 그렇게 판단했다는 것은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었고 아직 그 문제를 벗지 못한 상태이다.


이것이 율법주의 신앙이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과 하나 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달력의 시대가 예수님 오신 이후의 세월을 산다는 이유로 자기 신앙을 복음적이라 생각하 고, 또 구약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 라는 기만으로 복음적 신앙이라 생각한다. 성경을 모른다는 부끄 러움에서 시작한 공부라는 행위의 산출물인 신학이 이를 붙들고 있어서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신앙은 서기 30,000년에 살아도 그의 신앙은 율법주의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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