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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내려 오지 못한 이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0. 8. 17. 08:20 Writer : 김홍덕

최근에 복음에 대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나를 흥분시키고 그 토론에 몰입하게 한 것은 "예수도 처음부터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은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에게서. 그 말의 배경에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못했는가?"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에 대한 의미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한 관점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다는 의미다.

 

비유하기 어림 없지만 "예수도 처음부터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을 듣는 심정은 여호와를 모욕하는 골리앗의 고함소리를 들은 다윗의 마음과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지금도 몸이 떨린다. 그렇다고 카페에서 목소리 높여 다툴 일은 아니기에 설득되지 않는 상대와, 설득당할 수 없는 내가 계속 토론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대화를 마무리하였었다.

 

예수님이 처음부터 온전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생각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다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성경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보고 예수님과 우리의 하나됨을 육신의 동일성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못한 이유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로라는 생명이 가진 본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육신을 가진 사람 안에 있을 때 존재하는 생명의 본성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기에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이 되었을 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거듭난 생명이 바로 그리스도, 곧 하나님 아들이란 존재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함이고, 육신은 그 목적을 표현하는 형식이자 형상이고 물리적 실존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다. 하나님의 의와 육신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이 하나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하나됨이다.

 

이것을 함축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와 그 목적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의 육신이 일치된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이 가지신 인생의 목적, 육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사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게 되면 어떤 모습인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우리의 공통점은 육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의 삶을 이끄는 본성이 되면 그것이 그리스도다. 따라서 사람이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자신의 운명이고 본성이고 삶의 목적이며 의미라는 것을 깨닫고 순종하면, 그 순종하는 마음을 성령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으로 잉태케 하셔서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거듭난 사람이라하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났을 때의 이야기지 거듭남과 무관하게 육신이란 이유한 이유 하나 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육신이란 공통분모 때문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내려오시지 못함도 육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반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난 존재가 되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같은 생명인 the Christ 속의 a christ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지 못하거나 지나친 모든 것은 우상이다.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그 품속에 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있던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있었기에, 그 뜻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을 때 모습인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품 속에 있었던 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건축하는 자가 건축하려고 할 때 그 마음에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생각과 같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이 완성된 모습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못한 이유가 단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더 근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모르는 것은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목적이 사람 안에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도 처음부터 온전하지 않았다는 어둡기 짝이 없는 말이나, 그런 것에 빌미를 제공하는 예수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졌기에 십자가에 내려 오지 못했다고, 그것이 내려오지 못한 이유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우매한 믿음이고, 성령이 없는 빈껍데기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신앙에 매료되기도 한다. 물론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행위로 지켜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얻으려는 신앙 아닌 종교단체인 우리가 길을 가며 쉽게 보는 교회의 신앙은 그것에 조차 한참 미치지 못한다. 아마도 이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나선 여정에서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지친 마음에 자신이 육신이라는 것을 위로하는 것에서 하나님 아는 여정을 스스로 마무리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여기를 보라고 손가락을 가르키면 손가락 끝을 본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하기 위하여 그 말을 한다. 육신이라는 예수님과 우리의 공통분모도 그렇다. 육신이라는 것이 공통분모나 본질이 아니라, 육신이 이유,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이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이유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있다는 것이 보여야 성경을 바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보지 못하면 여기를 보라고 할 때 손가락을 보는 사람에 불과하다.

 

이번의 일을 겪으며 이 블로그에 글을 씀에 있어 정말로 정성을 다해서 설득하고, 설명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을 돌아보게도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보는 교회로 대변되는 기독교에서 진리를 찾지 못하여 길을 떠나서 더 힘들고 방황하기도 하고, 방향을 잃고 어리석은 길로 가는 것이 심히 많음에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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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16. 04:00 Writer : 김홍덕

육신을 보는 성경 속 두 번째 관점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관점이다. 아담이라는 말은 ‘붉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황토의 색에서 왔고, 사람이 흙에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아담은 천지창조 시점에서 아담이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다. 아담은 흙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말한다. 이는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관점에서도 궤를 같이한다.


선악과의 일은 모든 사람의 이야기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육신을 보는 관점은 단지 아담이라는 한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사람의 관점 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면 육신을 어떻게 보는지 아담이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아담이 육신을 보듯이 사람의 육신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상태라는 의미다. 그리고 먹었다는 것은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이기에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관점은 선악과와 하나가 된 관점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자신을 아주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숨었다. 성경은 이 부끄러움을 아담이 하와 앞에 벗은 것을 부끄 러워했다고 하지 않는다. 아담이 피해 숨은 대상은 하나님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감추려는 모습을 말한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8)


심지어 아담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벗었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사람이 두려워했다는 말이다. 엄청난 모순이 시작된 것이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0)


아담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사람 앞에서의 부끄러움과 두려 움이 아니다. 벗은 것이 부끄러워 보였다면 나뭇잎이든 무엇이든 몸을 가리는 것으로 족하였을 텐데 아담은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한 다음에도 하나님을 피해 숨어 있었다는 것은 단지 옷을 입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에 있어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두려웠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드러났다는 것이 두렵고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처음 창조되었을 때도 벌거벗은 상태였는데 갑자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드러났다는 것이 부끄러 워졌다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옷입은 상태로 만들지 않으셨으니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할 이유도 전혀 없다. 그런데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육신의 모습 아닌 어떤 것이 창조되었을 때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뿐!!


아담이 처음과 달라진 것은 단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뿐이 다. 육신이 달라진 것은 없다. 하다못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두드 러기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눈이 밝아졌 다. 그런데 눈이 밝아져서, 밝아진 눈으로 보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눈이 밝아져서 발견한 단 하나의 인식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존재라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만족하셨던 것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관점을 달리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람의 육신에 대한 관점 하나뿐이다. 그것 외에는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이 다른 유일한 것은 바로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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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장, 막 8장, 눅 9장)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더이다” 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다. 이때 베드로의 유명한 신앙고백이 나온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뜻밖에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대회를 시작으로 그리스도라는 존재 정체성에 대한 갈등의 시작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과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래서 늘 하나님과 사람이 갈등했던 그리스도라는 한 정체성에 대하여 양 끝단의 이견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표현된 것이고 히브리어로 표현하면 ‘메시아’다. 이를 오늘날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꾸면 ‘Hero(히어로, 영웅)’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는 의미인데 고대로부터 기름을 머리에 부음으로 직위를 부여하는 것은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들이었다. 이는 한 마디로 사람의 삶을 통치하고, 사람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의 대명사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구원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생각에 별다른 말을 않고 바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그에 대하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칭찬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대화의 핵심은 그리스도다. 베드로의 고백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표현은 달라도 모두 ‘그리스도’라는 것은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막 8: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눅 9:20)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제자들과 베드로는 ‘그리스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밝히신 것이다. 핵심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신 예수님께서 것이다. 그리스도란 그렇게 의를 주장 하는 자들에게 끌려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말씀이다. 여기서부터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시작된다. 당장 방금 큰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부터 예수님을 만류했다. 유대인이나 예수님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제자들부터 예수님이 전하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려 한다. 


그런데 베드로의 만류는 살짝 이상한 점이 있다. 누가 누굴 죽이려 하면 죽이려는 사람에게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데 베드로는 죽임을 당한다는 예수님께 그러지 말라고 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지 않을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죽는 존재가 아니라는 자기 생각을 아주 분명하게 말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견해가 만난 것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는 죽음도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베드로와 같은 기준을 가진 자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존재다. 이것은 완전히 반대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에는 서로 동의한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생각이 달랐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는 의미와 ‘그리스도란 존재에 대한 정의까지 포함되어 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인식이 문제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오”라는 것은 온전히 믿었기에 대답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존재라는 것은 베드로와 제자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아니었다.


베드로(와 제자들)가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사실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것은 그의 고백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예수님과 생각이 달랐다. 이 차이는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들과 제자들을 다르게 대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물을 때는 인자(人子)를 누구라고 하는지 물으셨다. 인자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자신을 지칭한 표현이었다. 반면에 제자들에게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것은 제자들과 예수님은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지속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이견 속에서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을 붙잡는다. 이것이 얼마나 제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는지를 정말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베드로다. 앞으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베드로는 빌라도의 뜰에 따라가서 예수님이 왜 저러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예수님께 고백한다. 낯선 그리스도에 대한 갈등이 감동으로 바뀐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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