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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공생애 마지막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서 보내신 7일이다. 그 기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감동적인 사건들이 기록된 시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당연히 감동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사람들이 아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 오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리스도가 무엇이고 어떤 존재인지도 함께 전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이견이 있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전하신 것이 온전한 것이다. 전하는 분이기도 하고 전하는 내용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전한 것이지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 전달을 받는 사람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기준이고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고 지금도 다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진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오늘날도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많은 집단과 그에 속한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다르면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성경을 리빌딩한다. 그렇게 리빌딩하는 사람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 리빙딩이 바로 십계명에서 금한 우상을 만드는 것이다.


언제나 기준은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뜻을 숨기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더하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와 삶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과 동일한 의와 생명 그리고 성령이 없거나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모르고 어림을 고백하는 것 없이 예수님을 알 수도 없다.


십자가 이전에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다 그리스도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시작되고, 그리스도 정체성에 대하여 사람들과 괴리가 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 때가 있다. 바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때다. 그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마 16:16)라고 말했다. 좋은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로서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상상도 한번 해 보지 않았던 아주 낯선 그리스도가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때부터 아주 집중적으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 시작이 바로 십자가를 질 것이라는 말씀부터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류하였지만 돌아온 것은 예수님의 책망이었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아주 낯선, 생소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고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괴리는 상당히 오래 지속되다 오순절 성령이 오시면서 모든 것이 정리된다.


이때부터 예수님과 그 외의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속내가 다 드러나고 가룟 유다와 같이 정리될 사람도 정리된다. 그리고 이 갈등은 단지 예수님과 예수님을 반대하는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과의 갈등이 핵심이 아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3년간 함께 한 이 제자들의 갈등이다. 그것은 오늘날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줄로 아는 대부분의 신앙에게는 시작도 되지 않은 갈등이다.


이 갈등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갈등이다. 그리스도란 어떤 존재며, 어떤 모습이며, 사람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는 존재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의와 사람들의 기대와 생각 그리고 욕망과의 갈등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라고 생각했고, 그 관점에서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고 말씀하시 전까지의 예수님은 충분히 기대할만 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소경, 귀머거리, 문둥병, 중풍 등을 치유하심은 물론 죽은 자도 살리셨으니 사람들의 기대는 충만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너무나 합리적인 기대였다. 제자들도 그에 덩달아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이 고위 관직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대가 현실로 무르익어갈 것 같을 때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제자들이 자신을 누구로 여기는지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가 정답을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때부터 십자가로 가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안 된다며 말렸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니 베드로가 즉각 나선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고 사탄이라고 책망하셨다. 예수님의 책망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과 다르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생각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사탄의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존재라고 처음 말씀하신 장면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후부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간절하게 설명하신다. 처음 십자가를 지신다고 말씀하신 때부터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에 대한 간절한 말씀이다. 정말로 간절하게 전하셨다. 땀이 피가 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여 전하신 말씀이다. 이 간절함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쩌면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이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경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7일,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그 시간부터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는지,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얼마나 그릇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지 보고, 반대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간절하게 전하고자 하신 온전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그것을 왜 알아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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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8. 13. 09:39 Writer : 김홍덕

요엘서를 마치고 <낯선 그리스도>라는 제하의 글을 연재합니다. 이 글의 전체제목은 <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입니다. 이 내용은 책으로 발간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인데, 책보다 아 불로그에 올리기로 결정하고 이렇게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낯선 그리스도

모든 신앙인이 본받고자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변화산 사건 전후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다. 제자들의 혼란은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ridibooks.com

 

“예수는 그리스도” 이 말은 아마도 기독교 신앙을 정리하는 대표적인 문장일 것이다. 그리고 이 책, 이 페이지를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문장 속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책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당연한 믿음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게 알고 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히브리어로 “메시아”라고 하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로부터 기름 부어 그 직위를 세운 것은 왕과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가 대표적이다. 이런 신분들은 모두 사람을 다스리고, 삶의 곤고함에서 빛을 제시하는 직임으로 이 모두를 합하여 사람들에게는 구원자라는 의미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 안에서 구원자는 예수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아무래도 예수님을 가장 지근에서 본 12명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자신들이 믿었던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각과 기대 그리고 믿음과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다시피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 혼돈의 핵심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믿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듯이. 그런데 제자들, 유대인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성경을 경전으로 삼은 신앙을 가진 신앙인들, 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반대였다. 그 괴리를 가장 일선에서 마주하고 심한 갈등을 느낀 것은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의 행적 마지막 부분에 여과 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 괴리와 갈등은 그리스도의 정체성, 더 정확히는 가치와 능력 그리고 임무에 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 기준에 관한 것에서 이기고 귀한 존재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믿는 반면,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한 목적이 삶이 된 그리스도는 자신을 종과 같이 내어주는 존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은 완전히 반대의 개념이다. 그 괴리와 그로 인한 갈등 그것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낯설게 만들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 책은 바로 그 그리스도에 대한 괴리와 그 괴리로 인한 갈등과 그 갈등을 겪는 제자들의 모습과 해결 과정을 다루었다. 제자들이 느꼈던 그 낯설음은 성경에서 보듯이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그 낯설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신앙 여정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필수 과정이다. 자신의 신앙 여정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한 번도 낯설지 않았다면,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 몸부림쳐 보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긴 힘들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거듭났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인 사형수가 되어 죄인들의 십자가를 진 예수님께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있다면 과연 그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반추해 볼 문제다.

 

이 책은 또 그것에 대하여 질문하고 답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어떤 그리스도로 믿었는지 반추해보고 제자들 앞에 그렇게 낯설었던 그리스도를 여러분이 만나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 예수님을 만나면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곤고함을 피할 수 없을지 모른다. 제자들이 그랬고, 욥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 과정이 없으면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 그리스도도 알 수 없다. 

 

이 책은 어쩌면 여러분을 그 갈등으로 초대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던 날부터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느낀 그 낯설음은 구원의 좁은 문이다. 그 좁은 문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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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를 마치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12. 10:41 Writer : 김홍덕

<요엘의 주제와 내용 요약>


요엘서는 3장 밖에 없는 작은 성경이지만 우리가 아주 익히 아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시면…”에 관한 말씀과 그에 이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혹은 드리지 않는 자리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흐름의 시작은 “메뚜기 재앙”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리는 자연 재앙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이방으로 여기시는 가치관에 관한 것이다. 제사를 없게 만든 것은 메뚜기 재앙인데 그에 대한 보응은 이방에게 하시는 요엘서의 구조와 말씀이 그것을 설명한다. 결국 온전한 제사를 폐하는 이방인의 가치가 메뚜기 재앙인 동시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이며 무엇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런 요엘서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 온전한 구원을 얻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원 받아야 할 자리라고 말씀하시는 메뚜기 재앙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우리의 어떤 삶과 가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제사를 폐하였는지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치 않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제사라는 행위가 주는 선입견을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의 의가 나의 삶을 주관하는 것에 육신으로 사는 삶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나를 드린다는 측면에서는 제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생은 하나님의 의를 담고 그것을 육신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존재 목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온전한 제사다.


그렇다면 요엘이 메뚜기 재앙으로 인하여 제사가 폐하여 졌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사람이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메뚜기 떼와 같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제사가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수의 많음에 기초하여 온전하지 않은 제사를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구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진 Conventional Wisdom이 서로가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으니 그것을 온전한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실상은 온전한 제사가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자리라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사람들이 가진 Conventional Wisdom은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에 기인하여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제사(예배)드리는 것이다.


오늘날 이단은 물론이고 자칭 정통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실체는 사실상 우상이다. 먼저는 믿음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구원의 표상으로 보내신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저주받은 낮은 자리인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렇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이고, 그 구원의 실체도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이나 그것을 담보하는 (세상적 가치로)선한 행위를 행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사람을 만든 목적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메뚜기 재앙으로 요엘서가 비유한 하나님의 제사를 폐한 신앙은 하나님께 자신들이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베푸시는 마음이 들도록 성경을 지키는 행위의 공로, 착한 말과 선한 행실을 드리는 것을 신앙이다. 특히 이것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대중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메뚜기 떼라고 한 것이다.


이런 신앙들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이 아니라 행위를 의로 여기는 하나님으로 조각한 것이고, 영광과 은혜와 복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도 아니고 뜻도 아니며, 성경 말씀도 그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런 신앙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방이 바로 그런 신앙, 그런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그 신앙이다. 따라서 그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다들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말로만 안다. 행위는 곧 형식이고 나타난 것인데, 그것을 의로 여기지 않는다면 육신의 성공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라 하지 않을 것이며, 좋은 교회 건축물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하나님의 복과 은혜라 말하고, 좋은 건축물인 교회를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이 모순이고 거짓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니 메뚜기 재앙이다. 그 속 자기 신앙을 두고 의지한다는 것이 바로 재앙이고 어둡고 캄캄한 것이다. 자신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려면 그것이 재앙이고 어둡고 캄캄한 거시며 하나님의 제사를 폐한 것이라는 온전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과 여호와의 신이 임하는 시작이고 구원의 문이다. 


감히 말하거니와 이 고백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절망적인 고백일 것이다. 그 고백을 하기 전까지 자기 인생이 모두 죄와 사망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피를 토하는 것 같은 회개가 없었는데, 단지 교회에 가서 세례 문답했다고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다. 구원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라면 하나님이 아들이 십자가를 질 이유조차 없다.


요엘서는 작은 성경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 전반을 경고하고 있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은 하면서 자신이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신앙이지만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구원이라 말하니 그런 줄 아는 신앙,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했고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니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라는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 신앙 역시 다들 그렇다고 하니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 대중성이 메뚜기 재앙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방이고, 구원을 받아야 할 자리다.


성경이 이렇게 오래 전부터 간절하고 명료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어제처럼 교회가 그렇다고 하니 자기 안에 확신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잘 받을까 고민하고, 또 반대로 어떤 행위를 하면 안 되는가를 염려하는 것을 경건한 신앙이라 말하는 것에 계속 있을 것인가? 요엘서는 말한다. 그것이 재앙이고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방인의 모습이라고. 무엇보다 그 신앙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죄와 사망의 자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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