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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3:1-13) 하나님 심판의 보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2. 08:31 Writer : 김홍덕

심판은 일종의 보복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곧 이전의 것에 대하여 보응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행위나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의에 관한 것이다. 의로운 자에게 은혜를 베푸심과 동일하게 하나님 의에 불의한 것에는 보응하신다는 것이 바로 심판이고 심판의 후속조치다.


앞서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의로움이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 설명을 잘 이해하였다면 심판이란 구원과 별개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다른 의로움, 스스로 가진 선과 악에 대한 기준, 스스로 정한 인생의 목적이 심판을 받아 소멸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곧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대상이 내 안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 곧 하나님이 원하지 않고 싫어하시는 것이 구원 받은 사람 안에 공존할 수는 없다.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뜻에 순종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생명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의와 뜻에 반하는 것이 공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의로움이 대상이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다는 것이 심판의 이유다. 


이것을 안다는 것은 심판이 육신으로 어떤 혈통, 도둑질과 같은 육신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 곧 속심령에 있던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본성이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고, 육신과 행동은 속사람에 있는 의가 표현되는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임을 알았다는 의미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곧 우리 안에 있던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의로움, 스스로 정한 선과 악의 기준과 인생의 목적은 구원을 받고 심판 받은 사람의 속사람 안에서는 먼 나라에 팔려간 것과 같이,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분리되고 구분이 될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면 하나님 심판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심판되고 하나님의 보응을 받아 망하게 된다. 구원을 받았는데 이전에 옳다고 한 것이 그대로라면, 심판을 받지 않고 소멸되지 않고 멀리 팔려가듯 멀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사람에게 팔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욜 3:8)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속심령에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이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소멸되는 것이다.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가치가 없는 것이 되는 그것이 심판이다. 따라서 교회 나가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 다니기 전에 바라던 세상 가치 기준으로 좋은 것, 곧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예수 믿는다는 것을 원인자로 하여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성경과 심판과 하나님과 믿음에 대한 완전한 오해이고 무식이다.


반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사람, 메뚜기 떼로 비유하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신앙은 재앙이며, 그것을 좇던 자신의 모든 지난 날을 주관하던 가치, 곧 자기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여 구원을 얻은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기 때문에 이전에 좋았던 것,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좋은 것이 이제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이전에 하나님의 의를 대했던 것 같은 외면과 경멸과 가치 없는 것으로 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응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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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육신을 보는 첫 번째 관점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2.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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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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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언급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신 직후에 하신 말씀 속에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을 끝으로 천지창조를 마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 1:31)


이것은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모두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은 창조된 상태 그대로 온전하다고 보고 있다는 의미다. 창조목적 안에서 보면 하나님도 사람이 만족스럽고, 사람도 서로를 볼 때 자신도 만족스럽고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것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거한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다. 만족의 동산에 있었다. ‘에덴’이라는 말이 ‘만족’이라는 의미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사람의 상태는 벌거벗은 상태 였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아내인 하와를 창조하시고 함께 거하게 하였지만, 이들은 서로가 벗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 2:25)


여기서 우리는 벗었다는 것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옷을 입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옷, 즉 사회적 신분이나 어떤 것으로 자신을 가리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사람이 사회적, 세상적 관점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을 감추어지지 않아도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에덴, 곧 만족의 삶이다.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면 그것이 바로 만족하는 삶이다.


이처럼 성경 속에서 사람의 육신을 보는 첫 번째 관점은 하나 님의 관점이다. 창조된 모습 그대로를 온전하게 보기에 어떤 자기모습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만족하게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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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3:1-13) 하나님의 심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1. 08:42 Writer : 김홍덕

모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심판의 본질적 대상은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의로움과 그 의에서 비롯된 형식이다. 형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과 행동, 의복과 예식, 규례와 법과 같은 것이다. 특히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의와 뜻과 생각이 심판의 대상이고, 그 의와 뜻과 생각이 표현된 삶의 모든 요소와 행동이 심판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판을 대할 때는 자기 심령에, 속사람에, 의와 생각에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이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심판은 육신의 혈통이나 행위가 아니라 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도적질이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그 생각에 의로움을 부가하여 남의 것까지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심판의 대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의는 생명이기 때문에 일부만 의롭거나, 일부만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심판의 대상은 겉으로 드러난 혈통이나 행위가 아니라 속에 있는 의로움, 즉 무엇을 의로 삼고 있는지가 심판의 대상인데 그것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있는 의로움이라는 것이 반은 의롭고, 반은 불의하지 않고, 반은 하나님의 의를 반은 세상의 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는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반반인 생명은 없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모습의 근본적인 이유도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신을 섬겼다”고 늘 진노하시지만 사살 대부분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대로 제사를 드리고, 규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방신을 섬겼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절기와 규례를 지키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세상에서 평안하고 성공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형식은 하나님을 섬기나 그 섬김의 목적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날도 동일하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고 쫓아내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곳이지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 역시 형식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나 그 목적은 육신이 원하는 것, 곧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것이고, 세상의 가치관이 좋다고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 기만하여 하나님께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나님의 규례와 말씀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규례와 말씀을 지키는 행위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얻으려는 장사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변함 없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가치가 다 세상에서 왔다. 비싸고 좋은 자재로 교회를 건축하고, 그 속에 비싸고 좋은 치장을 하고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일상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이 곧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라 생각하는 세상의 가치관에서 온 것이다. 가치는 세상에서 가져오고, 섬기는 대상은 하나님인 것처럼 섞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전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모습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예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 것이 세상의 가치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수의 사람들이 그런 가치로 하나님을 혹은 다른 신을 섬긴다. 그것이 메뚜기 떼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이고,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근본이다. 그러니 그것이 재앙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육신의 혈통이 이방인이어서, 아니면 기독교라는 종교 집단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보다 행위로 성경을 어기면 받는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메뚜기 떼와 같이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세상의 가치관 위에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앙과 믿음이 심판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반반이 될 수 없다. 생명은 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고양이면 고양이지 반은 고양이, 반은 개인 동물이 없다. 반인반수는 더더욱 없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여 생각과 말과 삶과 가치와 의 그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의와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있든지, 아니면 세상의 가치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다. 하나님은 당연히 순전한 것을 받으시므로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가치가 혼합된 것은 받지 않으신다. 그것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제사가 없어졌다고 하심과 같이 온전한 제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 자신의 속심령과 삶을 이끄는 본성과 목적이 하나님 의로 거듭나서 그 생명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를 돌아 보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신앙의 어떤 일부가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에 있거나,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이 곧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라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면 자신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마저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을 깨달아 자신이 그간 살아온 모든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구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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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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