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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3:1-8)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이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28. 10:39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이 내 백성을 흩어지게 하고, 또한 내 땅을 나누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인 소년을 팔아 기생을 사고, 소녀를 팔아 술을 샀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요엘서에서 하나님의 제사를 폐한 주체는 이방인이 아니라 메뚜기 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메뚜기 떼가 곧 이방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사도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며,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방인이 육신의 혈통으로 이방인이 아니다. 이방인이라는 것은 그 육신의 혈통이 무엇이든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것을 의로 삼는 사람이 이방인이다.


요엘서에서는 하나님의 제사를 폐하는 대중적 신앙이자 의로움을 추종하는 것이 바로 이방이며,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유는 이방적인 생각과 믿음과 신앙이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땅을 갈라 놓으며 하나님의 백성인 소년과 소녀를 팔아서 기생과 술로 바꾼다고 하시고 있는 것이 요에서 3장의 말씀이다.


사실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땅 역시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땅을 나누는 것은 같은 의미기도 하다. 백성이 흩어지는 것은 바벨탑의 일에서 본 것과 같이 같은 것에 대하여 서로 이해하는 것이 달라져서 흩어진다. 세례의 의미를 형식에서 찾으려고 하였더니 세례와 침례를 기준으로 종파가 흩어지고 또 나누어진 것이 좋은 사례다.


그리고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진 신앙은 소년을 기생으로 바꾼다고 하셨다. 소년과 소녀는 미래가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들어가서 구원 받고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살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런데 그런 가능성을 기생과 바꾸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여러가지를 남편, 곧 자기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으로 삼는다는 말씀이다. 그 여러가지는 당연히 돈과 권력과 같이 세상이 귀하고 좋게 여기는 것이다. 이는 메뚜기 떼와 같은 오늘날의 대중적 신앙이 비싼 것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사람이 교회에 출석하면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소녀 또한 미래가 있는 사람이다. 특히 모든 인생은 하나님 앞에 여자와 같다. 하나님의 의를 자기 심령에 받아 그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곧 소녀다. 그런데 그 소녀를 팔아서 술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것에 술 취하듯 취하여 산다는 것이 이 또한 소년을 팔아 기생을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방을 심판하시는 이유의 모든 근원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것을 자기 삶의 의로 삼고, 더 나아가서 그런 사람들이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음을 보고 그것이 온전한 의라고 믿고 신앙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지고 살면 그 의가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간다고 의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요엘서는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관하여 좁은 문으로 가라는 말씀으로 확증하셨다.


그 외에도 이방은 하나님의 금과 은 그리고 진기한 보물을 그들의 신전으로 가져갔고, 하나님의 백성을 팔았다고도 하고 있다. 이방, 곧 하나님의 의가 아닌 세상의 가치 기반 위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앗아간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의 모든 가치는 하나님의 의에 기준을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치를 좇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외면하고 그 가치를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것을 신앙하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행한 악행을 그대로 갚으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이 심판은 오늘날도 항상 있다.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어려워하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인생은 곤고한 것”이라고 뇌까리는 것이 바로 이 심판 아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다른 것을 의로 삼고 있으면서 어리석게도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종교를 이루고 살아가다보니 그들의 삶는 늘 곤고함이 있고, 여러가지 신앙의 일로 다투고 교회가 갈라질 뿐 아니라, 언제나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교회의 일을 기획하고 진행하기에 끊임없는 갈등 아래 있다.


우리가 자주 대하는 일로 교회 안에서의 다툼과 분열을 생각해보면 요엘서에 하나님께서 다짐한대로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먼 나라로 이방인의 신앙을 가진 이들을 팔아 버리겠다는 말씀이 오늘날에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멀리 팔려 갔다는 것은 오는 길이 멀다는 의미인데, 오늘날 사람들이 가진 신앙이 그렇다. 단적으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기 때문에 노력할 뿐이라는 것이 이것을 대변한다. 그 노력으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기에는 그들이 가진 신앙을 인하여 너무 멀리 팔려가 있는 것이다. 그 엄청난 노력에도 죽을 때까지 노력만 하고 있다는 것은 이르지 못할 정도로 멀리 가 버린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삶에서 헤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평안과 성공을 추구하고 이루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평안과 성공에 볼모가 된다. 그래서 평안과 성공을 위해서나 혹은 그것을 헤치는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를 궁리하고 그것을 의로 삼는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고, 그 본질을 위해 행위와 형식에 매몰된 결과다. 


그리고 그 기반에서 자신들이 가고 있는,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거꾸로 가고 있는 길을 서로 보증하고 위로하려 세를 모아 메뚜기 떼와 같이 모인다. 그뿐 아니라 그것을 정통 신앙이고 옳은 신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오랫동안 그 추구하는 바를 좇고 행하고 노력하다 보면 그 끝이 없음을 필연적으로 알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멀리 팔아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재앙이지만 그것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정한 자리가 아니기에 그 모든 것이 ‘죄’지만 그 죄를 시인하는 그 하나를 하지 못해서 떠나지 못한다. 그런 반복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방인 곧,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진 사람에 대한 심판이다. 그것은 곧 자신에겐 재앙이다. 그것을 알고 시인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심판에서 구원 받을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주어졌음에도 그 안에 있으니 그것이 또한 심판을 지속적으로 받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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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3:1-8) 하나님 심판의 대상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27. 18:22 Writer : 김홍덕

메뚜기 떼로 비유하신 신앙의 대중성의 본질은 결국 죄다. 하지만 대중적이라는 이유 만으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수의 많음으로 의를 삼고 승부를 본 결과가 무엇이냐가 핵심이다. 요엘은 그 결과를 하나님께 제사가 없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시대가 언제라도 사람들이 많은 수를 모아 자신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규정해도 하나님께서 제사로 여기시는 제사가 없다면 그것은 메뚜기 재앙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은 분명히 메뚜기 재앙에 해당한다.


우리가 조금만 양심을 가지고 오늘날의 예배,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을 보면 그것은 하나님이 제사로 여기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 오히려 세상이 영광과 복으로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예배와 신앙은 모두 세상의 가치 기반 위에 있다. 예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좋은 건물, 좋은 시설, 좋은 악기, 훈련된 설교자, 전문적인 성악가가 필요하다고 다들 생각한다. 물론 이런 저런 변명으로 이런 것을 회칠해 보려 하지만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진 않는다.


건물과 악기 그리고 시설이 좋은지 나쁜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세상의 가치 기준에 전적으로 따른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비싼 것이면 좋은 것이라 여긴다. 비싸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이라는 것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설교자는 세상적 경쟁제도의 근본인 시험과 교회에서의 성과 곧 공로의 업적을 기준으로 자리를 얻어서 설교를 하는 권리를 얻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예배, 그 설교가 목이 매이도록 외치는 예수님은 비싼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 경쟁에서 이기고 쌓은 공로가 많을수록 높은 자리에 오르는 그 가치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구주시다. 생각해보면 이런 모욕이 없다. 예수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로 평안과 성공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그것을 받으실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사람들의 예배는 제사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제사를 능멸하는 것이고, 그들의 믿음과 신앙은 십자가에 예수님을 다시 못 박는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그런 예배와 믿음을 가진 사람의 수가 많다는 이유 만으로 그것은 온전한 신앙이라 여기고 있기에 그것이 바로 메뚜기 떼, 곧 대중성의 재앙이다. 


그리고 당연히 죄다.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우상 숭배며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요엘3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을 심판하시는 이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대상을 향해 내 백성을 흩어지게 하고, 또한 내 땅을 나누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인 소년을 팔아 기생을 사고, 소녀를 팔아 술을 샀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한 번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일을 행한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엘서에서 말씀하시는 중심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없어지게 한 대상이 있다. 그것은 메뚜기 떼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없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고 계획하신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된 육신 가진 인생이 그 삶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사용되는 것에 자신을 드리고 내어 놓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세상에서 살 동안 세상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안과 성공과 영광과 복을 구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제사가 사라졌다고 말씀하시는 말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그런 신앙이 심판의 대상이고, 그 신앙이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땅을 나누고, 소년과 소녀를 팔아 기생과 술로 바꾸는 주체라는 뜻이다. 그러면 오늘날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를 좇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땅을 나누며, 소년과 소녀를 팔아 기생과 술로 바꾼다는 것일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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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호흡 있는 육신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7. 26.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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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람은 육신으로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본성과 또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된 세상과 사람에게 직접 전하신 성경과 이 모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의 자리로 삶을 옮겨 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것은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 성품이 어떤지, 그 뜻과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고 내용 이며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강제로 그 자리에 두지 않는다. 사람이 육신으로 나면서부터 아무런 의심이나 감정 없이 그저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오직 하나님 찬양만 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 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님 창조한 사람이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하나님만 찬양하는 것은 전혀 영광스럽지 않기 때문 이다. 그건 그냥 짜고 치는 고스톱일 뿐이다. 사람도 그렇다. 자기 의지가 아니라 협박이나 강요 혹은 세뇌나 최면 상태로 한 것은 법정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만드셨을 뿐아니라 그 육신 앞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만들어 놓고 사람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자신을 만든 목적을 알기 바라 시며 사람의 선택과 순종을 기다리며 경영하신다. 탕자의 아버지 처럼.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0)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것을 주(主)로 선택한다. 이유는 육신에 있다. 자신이 육신을 주관할 수 있는 것 같은 삶이 주어졌다 보니 자신이 창조하지도 않은 인생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정한 것이 아닌 것을 자기 뜻대로 선택 한다. 흡연을 금지하는 것에 대해 “사람은 자신의 몸을 해칠 권리도 있다”라고 말하며 그것이 선택의 자유를 가진 인간의 존엄이라 말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뿐 아니라 아내나 자식 그것도 모자라 회사의 부하 직원이나 사회의 법으로 자기보다 ‘을’인 사람까지 자기 맘대로 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육신에 대하여 주권을 맡기신 것은 삶을자기 맘대로 주관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주권으로 하나님의 의를 선택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청지기라고 하신다.


사람의 육신은 가능성의 존재라 할 수 있다. 비유하자면 빛을 밝히기 위하여 만들어진 전구가 공장에서 품질 검사를 통과하고 당장이라도 전기만 연결되면 빛을 낼 수 있는 상태로 마켓 진열장에 놓인 것과 같다. 빛을 밝히겠다는 사람의 마음이 전구로 형상 화된 것 같이 하나님이 성품을 드러내시려는 뜻을 나타낼 형식으로 육신을 주신 것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빚(Debt)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으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롬 8: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살기로 순종하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해야 할 가장 중요하고 선행되는 일이며 유일한 일이다.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하고, 예수 외에 구원의 이름이 없다고 한 것은 이 유일성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으로선 당연 하고 마땅히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선택하라고 주신 육신을 자기 것으로 삼고 육신의 평안을 추구한다. 이것은 분명 도둑질이다. 그래서 십계명에 도적질 말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 님이 주신 인생을 자기 것으로 훔쳐 가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빛을 내기 위하여 만든 전구가 빛을 내는 일이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진 자신이 보존되는 것을 위해 노력한다면 전구를 만든 사람의 목적에서 벗어나 버린다. 빛을 얻기 위해 전구를 만들거나 구매한 사람의 목적은 빛을 밝히는 데 전구를 소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보존하는 것에 전구의 모든 역량을 사용한다면 그 주인들이 그 전구를 어떻게 여길까? 그게 바로 죄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창조목적을 위해 육신을 소비하라고 주셨는데 육신을 보존하고, 육신에 유익한 것을 구하며 늘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의 유전이 아브라함의 본토 아비 집이고 애굽이며 죄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정하고 뜻하신 사람 존재 목적에 순종하는 삶을 선택해야 하며 그것은 육신으로 사는 세월 동안 해야 하는 유일한 의무다. 그것이 우리에게 호흡 있는 육신을 주신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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