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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정체성을 잃은 육신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7. 12. 09:58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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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죄는 아담의 범죄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음에서 비롯되었다. 선악과는 앞으로 많이 이야기할 것이니 조금 미루어 놓고, 여기서는 죄를 범한 아담을 부르신 말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범죄하고 자신을 부끄 럽게 여기고 숨어 있는 아담에게 찾아가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 3:9)”라고 부르신다. 상식적 차원에서 명령을 받고 순종해야 하는 사람이 그것을 어겼을 때 명령하는 사람의 질책은 보통 “무슨 짓을 했느냐?”거나 아니면 대부분 “Why?”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디(where)?”를 물으신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창 3:9)


이 아담과의 대화에서 숨은 것이 소용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질문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전지전 능한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으며 부른 것이 아니다. 아담이 숨은 곳은 지도상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목적을 기준으로 한 정체성의 자리다. 다시 말해서 “네가 어디에 있느 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은 “네가 사람의 자리에 있느냐?”, “네가 지금 사람의 존재 목적 안에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죄의 개념이 정립된다. 죄는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다. 죄라는 말의 원어 역시 ‘자리, 과녁을 벗어나다’는 의미의 “하말티아(ἁμαρτία)”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다. 그리고 주기도문에서는 ‘빚’이라는 의미의 debt를 사용하고 있다. 죄는 법과 기준을 어기거나 미달한 행동이나 결과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된 존재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며, 피조물이 창조된 목적대 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아야 하는 채무를 감당하지 않는 <상태 >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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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온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도 그랬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막 13:24)


그렇다면 성경, 그리고 이 요엘이 말씀하고 있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하는 것’이 지구의 종말과 같은 세상의 종말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쉽고 반사적인 접근이지만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성경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관한 말씀이냐는 것이다.


성경은 영적인 말씀이라고 쉽게 말하면서 그 속에 있는 말씀을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로 보는 것, 성경의 구원을 세상의 일이나 육신의 목숨을 구하는 것으로 보는 것, 성경이 말하는 축복과 은혜를 세상에서 잘 살고 세상의 일이 잘 풀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접근이냐는 것이다.


요엘서에 한해서만 봐도 메뚜기 재앙에서 시작해서 절망과 돌이킴 그리고 회복과 성령에 관한 전개로 이어지다 주의 영이 임하고 난 다음에 세상이 망한다는 전개가 합당한지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자녀들의 장래일은 무슨 소용이며, 늙은이의 꿈과 젊은이의 이상은 모두 멸망에 관한 것이 될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성령, 하나님의 신은 멸망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해도 최소한의 언어 능력만 있어도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표현된 종말론적인 말씀의 의도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멸망에 관한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학을 전공하고 신앙을 사모한다는 사람일수록 이 말씀을 세상의 종말로 보는 경향이 짙다는 점이다. 그것은 요엘이 메뚜기 떼로 비유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또 예수님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는 신앙을 외식하는 신앙, 율법적인 신앙,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인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행간을 읽지 않고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여기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한다는 것이 하늘의 해와 달이 아니고, 이 종말이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의미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난센스 같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상기해 보자. 지구의 멸망과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이 차이가 있는지를.


영화나 소설에서 지구 혹은 세상의 종말을 다루면서 어떻게든 그것을 막아보려는 영웅적인 이야기를 만들곤 하지만 사람이 죽지 않는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 세상이, 지구가 멸망할 때 함께 죽으나 생을 마감하는 것이나 개인에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한 개인의 세상, 그것의 마지막이야 말로 진정한 종말이란 의미다.


그리고 한 개인의 세상 역시 물리적인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간혹 남들과 다른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일컬어 “자기 만의 세상을 산다”고 말하는 것에서 보듯 한 개인에게 세상은 자신의 가치관과 안목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기 만의 세상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자신이 목숨을 걸 정도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망가지거나 무너지거나 빼앗기는 경우 간혹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보면 사람에게 있어 세상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그 위에 구축된 육신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질그릇’, 혹은 ‘그릇’이나 ‘성전’과 같이 안을 채우는 존재로 사람을 표현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그 안에 아무 것이나 채우거나 이것 저것 여러 개를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분명한 존재의 목적이 있다는 것에서 그 안에 채울 수 있는 것 역시 그 존재 목적에 맞는 단 하나만 채울 수 있다. 사람이 그 존재 목적에 맞는 것을 찾아서 자신에게 채우면 인생은 허무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 목적을 알지 못하면 인생이 허무하고 또 한편으로 그 맞는 것을 찾기 위해서 돈을 좇다 명예를 좇기도 하듯 이것 저것을 다 자신에게 채우려고도 한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는 두 가지 의를 섬길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옳다는 것을 좇지만 여러가지 의를 좇을 수는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와 같이 사람이 단 하나의 의로움만 좇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유일한 뜻을 사람에게 두셨다는 의미고, 바로 그 하나님의 법 때문에 사람 안에 다른 의가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전의 의와 그 먼저 있던 의 위에 세워진 세상과 먼저 있던 의로 세상을 보던 안목과 가치가 종말을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종말적 말씀은 자아,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로움 위에 세워진 세상, 자신이 가진 의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세상을 보던 자기 세상의 종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로움으로 세상을 보는 가치관과 안목이 있는데 하나님의 신이 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은 이미 자기 의로움으로 세워진 세상,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보는 자아가 이미 멸망했다는 뜻이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했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 자신의 외로움이 모두 무너진 사건이라는 의미며,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의 기준, 선과 악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기준과 의가 다 어두워지고 망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빛은 곧 인식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빛이 없다는 것은 매우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빛이 없다면 인식과 의가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물리적인 빛, 광학적 빛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 곧 세상의 이야기이다. 컴맹, 문맹과 같이 특정 분야에 대한 어두움은 그 세계에 빛이 없다는 것이듯, 해와 달이 그 빛을 잃었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신이 임할 수 있도록 자신이 판단하고 인식하던 모든 가치가 종말을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때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 이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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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2:28-32) 이적을 하늘과 땅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8. 11:11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신을 자녀와 늙은이 그리고 젊은이와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말씀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말씀을 시작하는 첫 머리에 <그 후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사건은 어떤 일의 후속적인 일이라는 말씀이다. 그 일은 다름이 아니라 옷(행실과 형식)을 찢지 말고 마음(본성과 본질)을 찢는 회개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회복이다. 즉 회개와 회복에 이어 하나님의 신이 임하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일 자체는 아주 개인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러하듯 자신이 하나님의 의와 동일한 본성이 되지 않으면 성경의 어떤 말씀도 자신의 사건이나 일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회개와 회복 그리고 그에 이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이적을 보게 되는 것도 하나님을 믿으려는 사람 각 개인의 영적인 일이 기본이라는 것이다. 기본적이고 개인적인 사건들을 서로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푸신다는 것이나 해와 달에 관한 말씀 역시 각 개인의 일이다. 하늘이나 땅 그리고 해와 달 그 어떤 것도 살아 있을 때 의미가 있고, 그 살아 있는 사람들 각자가 하늘로 또 땅이나 해와 달로 여기는 것이 공유되면서 세상의 하늘과 땅 그리고 세상의 해와 달이 되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죽으면 하늘도 땅도 해도 달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자기의 하늘과 자신의 땅이 변하기 때문이다. 하늘은 의와 뜻이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가진 곳이 하늘이고, 자기 인생의 목적이 있는 곳이 각 사람의 하늘이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돈 버는 일에 있어 자기 능력 밖의 영역을 ‘하늘의 뜻’이라고 하고, 큰 수술을 했을 때와 같이 건강이 가장 절실한 시점에서는 건강에 대한 운명이 하늘에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땅은 사람이다.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땅은 언제나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 하나님의 신이 이적을 베푼다는 것은 사람이 하늘로 여기는 의와 육신 가진 인생에 하나님의 이적이 임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므로 앞서서 개인적인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에 일어나는 이적은 사람이 가진 옳음에 대한 가치, 의와 선에 대한 기준에 이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여기고, 스스로 정한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알고 살다가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 바로 하늘과 땅에 베푸신 이적이다. 


이러한 접근이 타당한 것은 사람에게 사람이 변하는 일이 가장 큰 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사람은 스스로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았으므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신의 본질적 존재 이유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 하늘이 변하고 땅이 변하는 일이다.


그 변화를 요엘은 피와 불과 연기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은 제사의 요소다. 앞서 요엘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사라졌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앙이 옳은 것이라 생각하고 따라 가는 신앙은 메뚜기 떼가 다 먹어 치운 땅과 같아서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지 못하였는데 그것에서 돌아서면 온전한 제사가 회복된다는 말씀이다.


다시 한 번 제사라는 것은 사람이 자기 삶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용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것임을 상기해 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곧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에 내 자신을 드리는 것은 그 목적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들어와서 그 삶을 주관하시겠다는 것이다.


제사라는 것, 산 제사이기도 하고, 우리가 거룩한 성전이기도 한 것은 우리 삶의 심령에 하나님의 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어 육신의 삶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보이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과 의를 표현하는 것에 나를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법이기에 피가 있고, 거듭나기 전의 모든 자아를 도말하기 위하여 불이 있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육신으로 나타난 삶은 연기와 향기 같이 하나님께 드려지기에 연기이다. 바로 이런 기적이 회개한 사람의 하늘과 땅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가는 신앙이 옳은 것이라 여겼지만 그것은 육신의 정욕을 구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 삶이 재앙이었음을 또한 깨달을 때 임한 여호와의 날에 돌이며 회복된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의 삶을 온전한 제사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하늘과 같은 자신의 의와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의 삶이 바뀐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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