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짧은 요엘서의 전개는 신앙 여정을 함축하고 있다. 메뚜기 재앙이란 인생이 하나님이 자신을 지은 목적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에 매인 다수의 사람들의 가치를 좇아 사는 것이라 말씀하고, 그렇게 다수의 사람이 좇는 것이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 여긴 자신의 삶이 곧 재앙이었음을 깨달을 때 여호와 하나님이 임하신다고 하시며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재앙 곧 죄와 사망이었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세계가 임하고 열린다는 회개와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을 이어 왔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하신다. 자신의 삶이 곧 재앙이었다는 고백에 이어 물세례와 같이 자신이 그 속에 살 수 없다는 어둡고 캄캄한 날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 날이 곧 여호와의 날이고 그 날로 인하여 하나님의 양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회복된다. 그것은 곧 제사의 회복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육신의 삶으로 그 의를 나타내시는 것에 자신을 드리는 제사가 회복된다는 의미다.


제사의 회복은 곧 사람의 창조 목적의 회복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실존과 성품과 의를 표현하기 위한 형식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고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는 것에 자신을 순종하는 것이 제사고, 그 순종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사람을 통하여 그 의를 나타나는 육신의 삶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된 사람이 그리스도(a christ)다. 하나님의 의가 형식이 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 곧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니 그리스도다. 그리고 이것은 메뚜기 떼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정욕을 좇아 가는 것과 반대로 아주 적은 수지만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는 삶이기에 거듭난 삶이다.


그게 구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것은 사뭇 다른 세계다.

사실 이 사이에 욥기가 있고 복음서 후반에 나오는 제자들의 갈등도 있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고난은 구원을 받고 성령이 임하는 때 그 사이에 사람이 겪는 곤고함이기 떄문이다.(이것은 이 블로그 욥기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다.) 바로 그 깊은 신앙의 여정을 요엘에서는 “어둡고 캄캄한 여호와의 날”로 간략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성령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요엘은 꿈과 예언과 환상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거저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의라 생각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로 살고, 그것을 말하며, 그 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예언하며, 사람들에게는 환상과 같은 하나님의 세계를 자신의 일로 말하게 되기까지의 신앙 여정을 요엘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은 초능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리스도로 잉태케 하시고, 신앙에 대한 의문을 없게 하시는 분이다. 즉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대하여 밝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인지 알게 된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과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성령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령 세례, 곧 성령이 자신에게 임했다면 삶의 목적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인지가 밝히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성령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능력을 얻지 못했다거나, 아니면 신앙의 고급 단계 혹은 성숙함에 이르지 못한 문제가 아니라 구원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성령으로 잉태되어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상세보기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육신 - 생명 있는 사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6. 28. 04: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호흡이 있다고 살았다고 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기준으로 생사를 구분하기 때문이다. 목적 안에 있으면 산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다. 호흡 있는 육신의 세월은 목적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올 기회로 주어진 시간이다.


사람도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시계나 휴대폰, 컴퓨터와 같이 사용 목적이 분명한 것은 그 목적에 맞는 기능을 제공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죽었다는 의미의 말로 그 상태를 규정한다. 시각을 정확히 알려 주지 못하는 시계는 아무리 명품이라도 죽은 것이고, 멀리 있는 사람과 연락을 할 수 없는 전화기도 죽은 것이며, 게임이나 연산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컴퓨터는 못 쓰는 것이라고 한다. 기능을 발휘하도록 수리(회개하고 목적 안으로의 구원 을)받을 때까지 기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런 하나님의 관점은 단지 창조목적이 생명의 기준이 된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것으로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아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신과 분리할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남자로 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유전자를 여자로 바꿀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자기 존재 정체성과 삶의 본성이 된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인정하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하나 된 사람 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나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것도 동일하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야 산 생명이 된다. 이와 같이 육신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이 되는 것을 거듭난다고 한다. 생명의 본성이 같아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산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살았다는 생명이 있어야 하나님께 사람을 창조목적을 기준으로 살았다 죽었다 판단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은 기준을 가지는 것은 같은 생명 본성을 가질 때만 가능하다. 본성이 같지 않은데 같은 기준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엘 2:21-27) 이른 비와 늦은 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27. 09:57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상세보기


우리 속담에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아주 평범하고 변함없는 진리다. 육신의 문제, 평안이나 사업의 성공, 건강과 같은 것이 좋아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회복케 하신 것이라 여기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심은 것은 육신의 일이다. 하나님께 육신의 일을 구했고, 육신의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노하게도 기쁘게도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은 신앙의 한 부분의 문제가 아니다. 은혜나 회복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신앙의 모든 문제를 눈에 보이는 육신을 기준으로, 육신의 문제로 본다.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 가도 새기 때문이다. 회복과 회개를 육신의 문제를 보는 사람은 영원함도 그것을 기준으로 본다.


그래서 죽어서 천국에 가면 세상에서 귀한 것으로 여기던 것들로 보상을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그 보상 받은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결국 육신으로 사는 동안은 물론 죽어서도 이 육신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귀한 가치로 보는 신앙이다.


문제는 하나님도 그렇게 보시면 괜찮은데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 메뚜기 떼로 비유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육신과 세상에 대한 가치를 재앙이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 안에는 하나님의 양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없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치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늦은 비와 이른 비를 주신다고 하는 말씀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자기 가치관 안에서 그 말씀을 해석한다는 뜻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 즉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도 결국 육신의 문제로 치부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교회에 가서, 기독교 방송이나 채널에서 듣는 목사들의 설교가 뻔히 이것임데도 구분하지도 못하고, 설사 얼마 간 구분한다고 해도 자신 역시 육신의 문제를 귀한 가치로 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육신의 문제 해결의 적절한 때에 사람들이 은혜라 생각하는 조치를 하나님께서 취하신다는 것이 아님에도 다들 그렇게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하늘에서 오는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면 ‘시온의 자녀들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이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바로 그런 이들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가치의 근본이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그들에게 가치는 하나님의 가치와 같다. 그 의는 다름 아닌 십자가다. 십자가는 메뚜기 떼와 같은 수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반대에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로 예수님이 심판을 받아 낮은 자리로 간 사건이다.


육신의 일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가치,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잘 되는 것이라고, 귀한 것이라고 여긴다고 생각하고 싶은 그들의 가치가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갔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치나 의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그 비로 인하여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잘 되어 기뻐하기를 바라실 리가 없다. 그 딴 것은 신앙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것을 학문으로, 신의 학문이라고 만들고, 그것을 이수했다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팔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의지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이루려 스스로 종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앙이다. 메뚜기 재앙이고, 자기 인생의 재앙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하여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재앙으로 알고 예수님께서 가신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을 위하여 적절한 비와 같이 말씀을 주시는 분이심을 요엘이 말씀하고 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