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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13-20) 제사장들아 슬퍼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19. 08:07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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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에 대한 포스팅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바와 같이 메뚜기 재앙이 가져온 결과, 아니 어쩌면 경고의 본질은 제사가 없다는 것이다. 메뚜기 재앙으로 인하여 제사에 필요한 곡식과 포도와 기름이 생산되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인데, 그것은 나타난 것이고 보이지 않는 본질은 사람들이 대중성, 많은 사람들이 소망하고 의로 여기며 선으로 여기는 크고 위대하며 평안하고 성공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양식도,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도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요엘서다.


농부들이 슬퍼해야 한다는 말씀에 이어서는 제사장들이 슬퍼해야 한다고 명령하신다. 슬픔이라는 것이 명령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님에도 ‘슬퍼하라’고 하신 것은 제사가 자신의 본분인 제사장에게 제사가 끊어진 상황, 곧 본분이 다 망가졌음에도 슬픔조차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메뚜기 떼와 그 재앙적 결과가 제사장에게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는 방증이다. 메뚜기 떼로 인하여 제사가 끊어진 것이 자신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슬퍼하라는 명령 같은 것 없이도 신랑을 잃은 신부와 같이 슬플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메뚜기 떼로 인한 재앙적 결과가 자신에게 전혀 어색하거나 슬프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 주체이거나 동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제사장,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사람이나 무엇보다 자신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으로 드려야 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바로 보지 못하고 슬픔조차 없음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의 세계가 이렇다.


십자가로 낮아지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다수가 추구하는 것, 그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하는 많고, 높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슬픔이라 생각지도 않는 것이 그렇다.


우리가 교회에서 듣고 보고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상황이 요엘서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평안해질수록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내셨는데.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장 천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낮아진 예수님의 이름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법의 근원인 가치관의 가치를 구한다. 그 뿐 아니라 그것이 슬픔인지 모른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것인지 모른다. 메뚜기 떼로 인한 재앙적 상황이 전혀 낯설지도, 이질적으로 다가오지도 않는 신앙과 삶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칭 제사장의 계통이라는 목회자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드리는 제사가 삶이 되어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슬퍼하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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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8-12) 농부들아 부끄러워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17. 09:44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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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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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소제의 원재료인 밀과 곡식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농부들을 책망하신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메뚜기 떼가 몰려오는데 농부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메뚜기 때가 재앙과 같이 몰려온 것은 천재이변이자 자연재해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면 더더욱 농부로선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농부들에게 부끄러워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육신의 먹거리 생산에 관한 농업이란 범주에서 농부의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농부는 씨 뿌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땅은 흙이고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늘 씨로 비유된다. 이를 종합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심는 사람, 곧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바로 농부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요 15장)”이라고 하신 것이나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 사도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며”라고 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농부가 소산이 없다?


소산이 없어 부끄러워해야 하는 농부에 관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전했는데 하나님이 열매로 여기시는 소산이 없는 전도자나 말씀 전하는 이들에 관한 말씀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들을 수 있고 믿음의 열매라고 여기는 좋은 신앙의 결과인 세상에서의 성공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첫 열매가 되신 것은 낮아지는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지 세상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거나,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어 부자가 되는 것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열매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하자면 교회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듯 전한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했더니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었다며 예배시간에 영광스러운 일이라 광고하고, 또 그것이 감사하다며 헌금하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면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물론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남다른’을 주장하는 것도 자기 의로움이지만,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의로움과 정의가 되지 않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세상의 사람들, 그들이 교회에 다니든 그렇지 않든 결국 추구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이라는 것에 매몰되어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노력이나 세상의 방법과 편법에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 뿐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또 목회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교인들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성공하고 평안을 얻는 것이 신앙의 열매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열매가 아니다.


근원적으로 십자가를 생각해보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첫 열매인데 그것과 정 반대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열매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오히려 그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치부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추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꿈, 곧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성이 먹어 치운 자기 영혼의 피폐함을 열매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 하나님은 그것을 열매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에 간음하듯 혼용해서 전하고 그 결과로 대중성이 추구하는 것이 성취된 것을 열매라고 착각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열매가 아니니 부끄러워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열매가 아닌 것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사람들이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을 영광이라 여기는 그 가치로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첫 열매라고 하신 것에 비추어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열매라고 여기시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 그렇게 이긴 자가 되고 싶어 하는 그 가치에 의하여 낮아지고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이 열매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으로 이긴 자가 되는 것을 열매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열매도 아니고, 그것이 열매가 아니니 당연히 그 소산으로 드릴 제사도 없다. 그래서 제사가 없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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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8-12) 제사 없는 슬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15. 10:34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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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와 전제는 곡식과 포도주가 쓰이므로 곡식과 포도나무가 없으면 드릴 수 없는 제사이므로 메뚜기 떼로 인하여 곡식과 포도나무가 상하면 제사의 제물이 없다는 합리적 당위성이 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대중성에 의지하는 신앙에는 열매가, 소산이 없으므로 그 신앙의 어떤 예배도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다. 제물의 원료인 열매와 소산이 없기 때문이다.


크고 위대한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안목으로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드리는 예배, 오늘날의 제사라 말하는 그 많은 예배들이 멀쩡히 드려지고 있는데 예배가 없다고 하는 것에 무리가 있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사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온전한 제사를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것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 가장 온전한 제사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크고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지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보이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가고 있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로 심판 받아 낮아지신 예수님께 기도하여 예수님을 심판한 세상 가치로 높은 곳에 갈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고, 세상의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 세상에서 높아지고 세상 가치로 귀한 것을 얻는 영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참아가며 성경을 행동으로 지켰다는 공로와 육신으로 수고하여 얻은 돈과 같은 열매를 제물이라며 하나님께 드리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다.


오늘날, 아니 요엘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항상 있는 사람들의 이런 믿음과 신앙은 완연하게 하나님의 의와 뜻에 반하는 것이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로 성공이라는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것에 편승하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로움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제사가 끊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 앞에 낮아지고 오히려 죄인이 되어 세상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 앞에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고, 종과 같이 섬기는 것에 자신을 드리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높고 위대한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아들이라는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는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셨다. 그 십자가가 더 이상이 필요 없는 단번에 드린 가장 온전한 제사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제사는 이 십자가에 수렴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의 가치에 편승하여 이긴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 소산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제사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가장 온전한 제사인 십자가를 본받아 세상의 가치에 매여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 종과 같이 육신의 수고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뜻에 자신이 순종하는 것, 그것에 자신을 드리는 그것이 제사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는 위대해지고 이긴 자가 선이 되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제사라 여긴다.


좋은 곳에 취업하는 것, 고시에 합격하는 것,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교회 광고에 내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고 부러워하며 그 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수고와 공로의 결정체인 돈을 헌금한다. 그리고 또 세상에서 성공을 바라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고, 성경을 잘 지켜 자신도 그 결과를 손에 쥐려 한다. 


그리고 이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으므로 이것을 의롭고 선한 것으로 둔갑시켰다. 메뚜기 재앙이 이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하나님의 제사가 있을 리 없다. 하나님의 의와 뜻, 그 반대로 가는데 하나님의 제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슬프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슬프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는 제사,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것이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에 자신을 내어 준다는 것이(드리는 것이) 온전한 제사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에 부합된다는 뜻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한 뜻에 순종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대중성에 편승해서 위대하고 높은 것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영광이라 믿는 것이 슬프지 않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사람의 존재 목적인 세상 가치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버린 것이다. 대중성에 자기 신앙의 뿌리는 두는 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버린 것인데 그것이 슬프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에 자신을 드리는 제사가 없는 인생, 그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그것이야 말로 인생이 가진 가장 큰 슬픔이기에 메뚜기 재앙으로 제사가 끊어진 것을 슬퍼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슬퍼하는 것은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슬퍼하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슬픔을 잊었다는 것이다.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성에 편승한 신앙에 매인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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