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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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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ginning - 하나님이 살았다고 여기는 것


사람들은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생명이 있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육신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지 않기에 의학적, 생물학적인 생명을 생명으로 여기시지 않는다. 육신의 생명이 귀한 것은 그 생명이 있어야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지 육신의 생명 자체가 하나님이 보실 때 산 것은 아니다. 단지 가능성만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성경에서 육신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으로 죽었다고 하시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지할수 있는 육신이 살아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거듭난 생명이 되기 전까지는 사망과 어두움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 가운데 있으니 그 자리를 떠나라고 늘 말씀하신다. 그 말씀의 대상은 분명히 육신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육신이 살아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있는 육신을 가진 사람을 죽은 존재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하나 님께는 살아 있는 세계가 달리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보실 때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산 것이 아니고,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실 때생명 있는 존재가 된다.


그 전환, 그 선택이 바로 The Beginning이다. 이 시작을 창세기에서는 태초가 열리는 것으로,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으로 그리고 성경 전반에서 거듭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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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8-12) 끊어진 제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13. 10:52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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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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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에 나오는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결과의 핵심은 곡식의 훼손으로 인한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에 드리는 제사가 끊어졌다는 것이 핵심적 주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가지고 구하는 것, 그것이 마음이든 재물이든 시간이든 그 어떤 것을 드리는 것이 과연 진정한 제사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드린다고 한 번쯤 생각하는 모든 것은 사실 다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과연 제사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람이 육신으로 살면서 육신이 취할 수 있고, 자기 생각에 하나님께 드리면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간과하면 안 된다.


따라서 이 진리를 알고서 제사가 끊어졌다는 것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곡식이 끊어지고 이를 인하여 가축도 죽게 되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소와 양이 없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진정한 제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순종하는 것, 즉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포도나무와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예수님이 구하신 무화과나무의 열매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사람 안에 들어와 속심령에서 생명이 되어 거듭난 생명이 되고, 그 하나님 의의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속심령에 들어온 하나님의 의를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드리고 허락하는 것은 오직 자기 심령에 하나님의 의가 자리하도록 순종하는 것 그 하나뿐이다. 그 순종이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의 뜻이 땅(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 이루어지기를 기도(순종)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이 만드신 금과 은 같은 세상의 어떤 것이나,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의 시간이나 가치와 같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목적에 순종하는 것이다.


메뚜기 떼, 즉 많고 크고 위대한 것을 선으로 여기는 대중적인 신앙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끊어지게 했다고 하심도 바로 이 온전한 제사의 개념 위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고 크고 위대한 것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도적절에 가깝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 그것은 공장의 물건을 사장에게 선물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으로 보아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이 추구하면 선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사를 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제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제사다. 십자가는 낮아질대로 낮고 사람들이 가지 않는 좁은 문 너머에 있다. 그것이 온전한 제사인데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이 추종하는 것이 선하고 옳게 여기는 신앙이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사가 끊어졌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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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5-7) 내 포도나무, 내 무화과나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11. 10:04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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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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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욜 1:7)


포도나무는 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무화과나무는 율법과 관련되어 있다. 율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무화과가 이스라엘의 나라 나무라는 점도 연관이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관련성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실 때 “열매가 없다”라고 하신 점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열매는 삶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였다는 의미고 그 육신이란 형식은 결국 육신으로 사는 삶이다. 이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 약 1:18)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본성으로 거듭나야 하는 사람이란 존재의 삶이 어떤 것인지 십자가에서 처음 보이셨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열매는 삶이다.


그리고 무화과나무가 율법을 의미한다는 것은 율법적인 삶이라는 의미다. 특히 요엘서에서 하나님은 메뚜기 떼가 무화과나무의 (껍질을) 긁어 말갛게 벗겨버렸다고 하고 있다. 껍질은 형식의 가장 표준적인 상징이다. 즉 무화과나무를 긁어 그 껍질을 말갛게 벗겨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삶의 모습, 신앙의 행동과 규례가 모두 없어졌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바로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성으로 인하여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형식을 중시하신다는 말씀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여기에 무화과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와 함께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 이전에 먼저 메뚜기 떼가 포도나무를 멸하였다는 말씀이 있다. 포도나무는 그리스도와 그 본성을 의미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즉 요엘 1:7절의 말씀은 메뚜기 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본성이 도말되므로 그 결과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의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이 기본 구조다. 그 이유로 형식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형식으로 사람의 육신을 만드시고, 그 속에 거해야 하는 하나님 의의 본성이라는 생명을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인 그리스도라고 하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속심령의 본성이 되어 그 본성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을 묵상하고 순종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 곧 많은 것이 이기고 선한 것이라는 가치를 하나님의 땅인 신앙에 가지고 와서 교회도 크게 건축하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은혜가 넘친다고 하고, 많고 크고 이긴 것을 성취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고 합하려 하니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법이 완전히 훼손되는 것이다.


포도나무 곧 예수님은 낮아지고, 좁은 문으로 가고 섬기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은 그 반대인 세상의 높은 곳, 이긴 곳, 많고 큰 것을 향해 가고 있으니 포도나무가 메뚜기 떼로 인하여 다 훼손되었고,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어지고 나니 당연히 하나님을 섬기는 온전한 삶의 모습도 말갛게 벗겨진 무화과나무와 같이 없어졌다. 이것이 바로 요엘서가 오늘 교회에 하시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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