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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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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욜 1:6)


하나님께서는 메뚜기 떼를 하나님의 땅에 올라온 이족 곧 다른 족속이며 그것은 마치 사자 같은 아주 강한 군대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메뚜기 떼가 하나님의 땅에 올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메뚜기 떼가 하나님의 지경을 장악했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앞에서부터 이어 설명하고 있듯 이 메뚜기 떼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들어온 아주 강하고 수많은 세력을 의미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이 메뚜기 재앙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 굶주림이란 벌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들어온 강하고 많은 세력에 관한 말씀이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교회 안에 위대하고, 크고, 강하고, 이긴 것을 사모하고 찬양하는 것이 요엘서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땅에 올라온 메뚜기 떼다.


마르고 닳도록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그 십자가의 본질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의 주장에 의하여 낮아지고 천하디 천한 사형수가 된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믿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같이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것을 신앙으로 삼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죄한 세상의 기준이 선하고 이긴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와 그 속에 있는 신앙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 세상의 가치 안에서 자신들이 성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욕하고 수치스럽고 경멸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는 정말로 통탄할 일임에도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이 메뚜기 떼와 많으므로 그 세력이 사자와 같이 되었다.


그러나 잠깐 시간을 내어 자신이 하나님께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만 돌아봐도 알 수 있는 이족(異族-이방) 같은 세력은 이제 너무 거대해서 메뚜기 떼 그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며 기도하는 것을 돌아보고, 교회가 광고시간에 무엇을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 내용들이 하나 같이 육신의 일일 뿐 아니라 세상의 가치로 이기고 성공하고 평안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육신이 평안해지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 생활하는 것이 수월하다는 명목으로 평안을 구하고,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출석하거나 크고 아름답게 교회 건물을 지으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자신도 그 하나님을 믿고자 교회로 올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교회에 가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고, 큰 교회는 하나님께서 물질적, 사회적 복을 주셔서 그렇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목적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을 바람이다.


그 세상에서 이긴 것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 가치로 이긴 자기 되려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극도의 파렴치한 생각으로 가득한 교회에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오는 것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 더 온전한 것이라는 가치가 여기도 지배한다. 많은 사람이 와서 많은 것을 도모하고 얻으며 추구하는 교회와 신앙이 온전한 것이라며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메뚜기 떼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과 교회에 충만하니 그것이 하나님의 땅에 이족이 올라와서 하나님의 그리스도(포도나무와 기름)를 먹어 치워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온전한 제사를 다 상하게 했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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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1-7) 포도주가 끊어지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9. 09:13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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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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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 재앙이 가져온 결과에서 특히 포도주가 끊어진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선지서에서 재앙을 선포하는 것에 비해 눈에 띄는 대목이다.


포도주와 포도나무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라고 하심이나,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라고 하신 것에서 이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의미함을 확신할 수 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나님 아들이 무엇인지를 보이셨고 이를 사람들이 보고 들을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십자가의 의미가 사람 안에 심기고 인식되는 것이나, 포도를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상하신 것과 같이 짓이겨서 짜낸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궤를 같이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사람 안에 심겨서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또 하나의 예수님과 같은 a christ가 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그것에 취하는 것이 바로 포도주에 취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포도와 포도주는 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 메뚜기 재앙이 온전한 그리스도를 마시는 것, 즉 그리스도의 성품이 사람 안에 들어가서 취하게 만드는 일이 메뚜기 재앙을 인하여 그치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에 심취하지 않고 그냥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묻혀 가는 현상이 바로 메뚜기 재앙과 그로 인하여 포도주가 끊어진 것임을 요엘서가 말씀하고 있다.


이를 오늘날 현상적으로 한 번 보면,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구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세상에서의 이김인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지금의 신앙이 포도주가 끊어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세상의 법으로 “너 같이 천한 것이 하나님 아들일리 없다”는 심판을 받아 세상의 가장 낮은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 낮아진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대중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다.


먼저는 사람들 스스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들 그렇게 사니까?’와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대중성에 기대어 자기 안에 있는 온전하지 않은 믿음의 퍼즐을 마무리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아직 노력 중이라는 것은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들이나, 또 생명이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생명으로 나는 것이다. 아들이면 아들이지, 아직 더 노력해서 아들과 같이 되려고 한다는 것도 몰상식한 사고이고, 사람이 날 때 사람이지 나서 노력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님에도 거듭난 생명이라면서 온전해지려고 노력한다는 모순에 매몰되어 있음에도 그것이 신학이고 신앙이라는 대중성에 의지하는 모습을 포도주에 취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온전하지 않음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자신과 동일한 사람들이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메뚜기가 포도나무를 상하게 하여 포도주가 끊김과 같이 그리스도를 찾지 않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이 바로 메뚜기 재앙을 당한 것임을 요엘서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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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1-7) 대중성의 폐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8. 10:21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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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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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에 나오는 메뚜기 재앙을 단순하게 하나님 앞에 타락한 백성을 심판할 목적으로 농사를 망하게 하신 재앙이 아니다. 이는 그렇게 백성을 굶주리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심이 목적이라고 하기에는 메뚜기 재앙이 가져온 폐해에 대한 요엘서의 기술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요엘서에서는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결과를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끊어짐”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수많은 개체군에 의한 엄습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귀한 것을 앗아갔다”고 하신 말씀 속 귀한 것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일 끊어진 것이 메뚜기 재앙의 실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것이 요엘서가 기술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살펴보면 이 메뚜기 재앙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과반수, 대중성, 중다함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그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이 메뚜기 재앙이 어떤 말씀인지 온전하게 알 수 있다는 의미다.


우선 이 글에서 정의하는 대중성은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중성 중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관한 것이 논점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대표적 기준이 이 대중성이라는 점이다.


잠깐 부언하면 사람들은 이단이라고 하면 사회적으로도 골치 아픈 행태를 보이는 집단으로 일반화하지만 사실 기독교에서 이단이라며 터부시하는 집단들 중에서는 그 행실이나 성경을 사모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반적인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과 같은 종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다.


종교는 사회의 일부인데(하나님을 믿는 것을 종교라고 여기는 관점에서 보면) 사회에 해악적이지 않고 도덕적이고 선량한데 단지 성경에 대하여 정통에 비추어 다른 해석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이단을 싸잡아 일반화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자신보다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을 매장하는 상당히 무례한 일일 수도 있다.


이단의 문제는 잠시 미뤄두고 다시 기독교 신앙,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대중성은 어떤 모습인지를 이야기해보자. 대중성이 가진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신앙의 근거, 믿음의 뿌리가 자기 안에 있지 않고 자기 밖에 있는 사람들의 수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많은, 아니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여기지 않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은 물론,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표상인 교회가 늘 문제가 있다고 말할 뿐 아니라 자신이 ‘죽으면 정말로 천국에 갈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 교단, 신앙에 함께 한다는 이유 만으로 그 모든 의문과 문제가 해결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요엘서가 말씀하고 있는 메뚜기 재앙, 곧 대중성의 폐해인 것이다.


신앙인들이 가진 그런 생각은 자신을 구원과 신앙에 온전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 아직 온전하지 않은데, 더욱이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부족하니 예수님과 같아 지기 위하여, 아니면 본받으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교회 다니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구원받은 것이라고 하는 것에 자기 영혼을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고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당연하게도 마땅히 자기 과정에 적합한 제사를 드리지 않게 한다. 아직 예수님과 같지 않기에 노력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죽으면 천국에 갈지 의문스럽다면, 나의 행위가 혹시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은 아닌지 의문스러운 지경에 있다면 당연히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부인하면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한, 즉 동일한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시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을 위한 것인데, 아직 자신은 예수님과 다른 존재기 때문에 노력하여야 한다면 당연히 성경의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나 사회가 그것과 무관하게 교리나 교회 출석이나 헌금이나 간헐적 선행과 같은 것을 단초로 구원받은 사람 취급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 영혼을 대중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 안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밖에 있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나 이론에 자기 영혼의 구원을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란 의미다.


이것은 결단코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이다. 구원은 생명의 법이다. 거듭남과 부활이란 말은 기계에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에 적용하는 말이다. 생명은 그 모든 본성이 속에 있다. 세포 속에 또 유전자 속에 있는 본성은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대중성이나 과반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수가 아무리 많아도 내 육신 밖에 있는 존재에 나의 본성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자기 영혼의 구원, 그 영원에 관한 운명을 자기 속심령이 아닌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의 말에 자신을 의지하는 엄청난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신앙인들이다.


이와 같이 자기 안에 구원이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와 제도가 그렇다고 하니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는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메뚜기 떼로 인하여 하나님께 제사가 끊어졌다는 요엘서의 말씀이다. 바로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대중의 수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그 삶이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리지 않게 하고 있음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예배, 자기 안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대중성에 자기 영혼을 의탁한 사람들의 예배는 하나님이 보실 때 전혀 제사가 아니라는 것을 함께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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