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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2:1-11) 어둡고 캄캄한 여호와의 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21. 07:14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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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는 2장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메뚜기 떼와 같은 신앙으로 인한 재앙은 진행 중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1장에서는 메뚜기 떼로 인한 자체적인 재앙 현상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2장에서는 메뚜기 떼와 같이 대중적 신앙에 메인 자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대응과 마음? 그리고 심판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요엘의 말씀에서 메뚜기 떼로 설명하신 신앙,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지만 하나님의 의에 반하는 신앙은 그 자체로도 제사가 끊어지고, 그 안에 먹을 것이 소멸되는 현상을 초래한다는 것을 이미 말씀하셨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오늘날도 유효한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신앙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교회에는 양식이 없고, 양식 없는 교회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제사가 없다.


낮아지신 예수님과 달리 높아지는 것을 의로 삼는 세상의 가치관을, 메뚜기 떼와 같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과 영광으로 추구하는 가치관과 간음하여 크고 위대한 교회 건물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성도 중에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음을 또한 영광으로 아는 신앙은 그 자체가 이미 양식도 아니고 당연히 제사도 아니다.


그런데 재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메뚜기 재앙의 뒤에는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데 그 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빛이신데 하나님의 날이 어둡고 캄캄하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두워진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이 스스로 사랑하지만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에 대하여 어둡고 캄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날이라는 의미다.


이 어둡고 캄캄한 여호와의 날이 임한 것과 유사한 상황이 인생에게 늘 있다.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는 순간, “인생은 무(無)다”라는 말,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넋두리 같은 것들은 모두 한결 같이 사람이 스스로 추구하고 나름 성실하게 살았지만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인생으로 살면서 인생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어두움과 캄캄한 것이다. 자기 인생의 날이 어둡고 캄캄함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날이 시작되기에 이 날을 두고 여호와의 날이 임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처음 시작 창세기에서 분명하게 보듯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이 “흑암이 혼돈하고…”라고 하신 것을 상기해 보면 하나님의 세계, 곧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가 어두워져야 하는 것이다. 성경 전번에서 말씀하시는 종말,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것과 같은 말씀들이 이와 궤를 같이한다.


자기 세계가 무너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세계가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날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엘서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것 위에 있다.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성, 메뚜기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 육신의 정욕이 추구하는 것을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가치의 끝에는 곡식의 소산이 없으므로 사람이라는 존재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없는 삶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 선이며 정의며 그것의 성취가 영광이라 여기는 대중성적 신앙에서 정통성과 명분을 찾고 그렇게 스스로 부여한 가치가 어두워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맞이하는 세월, 그 날들은 여호와의 신이 임하는 여정이 시작되는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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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ginning - 빛이 있으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6. 21. 04:00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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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육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이 살아 있다고 여기시지 않는다. 육신에 생명이 있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깨닫는 기회의 시간이다. 하나님께서 삶을 주신 이유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육신의 세월은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되 지도 않았고 빛도 없고 어두운 시절이다. 그 시간에 속한 삶에 “< 빛>이 있으라”고 하시므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시작되고그 인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다. 삶의 어느 순간, 어떤 환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는 순간이 바로 그때다. 그리고 말씀대로 빛이 있게 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때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태초다. 아브라함의 일로 보면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들을 그때가 바로 “빛이 있으라”고 하심과 같다.


빛은 ‘인식’이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다. 이는 육신의 시력뿐 아니라 지식이나 사고의 세계에도 동일하다. 컴퓨 터를 모르면 컴맹이라고 하고, 글자를 모르면 문맹이라고 하는 것은 컴퓨터나 글자에 대하여 인식이 없고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눈은 잘 보이는데 어둡다고 하는 것은 어둡다는 것은 인지하고 인식할 수 없는 상황이나 존재라는 말이다.


빛이 있으라고 하기 전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였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인지하기 전까지 사람의 상태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사람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에 있고,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우왕좌왕하듯 혼란스럽고 바쁘게 살지만 정작 늘 공허한 인생을 산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빛을 인식했다는 것은 자신이 빛 없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상은 어두운데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빛은 의미가 없다. 예수 님을 만나서 거듭난다는 것과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고백한다는 것도 자기 안에 하나님을 인식하는 빗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죄와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여기지 않거나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은 구원 받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만날 방법은 없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인식하는 빛이 있는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이 어두운 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들 자신은 어둡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이런 것이다”라고 안주 삼아 말하는 사람들, 신학을 전공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빛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 자신은 어둡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 뜻을 찾는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빛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빛도 있고 밝으니 보이지 않을 리 없다. 또 빛이 있으니 삶이 좌충우돌할 리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고 삶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데 자신은 하나님의 세계와 나라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리고 빛이 있다면 최소한 자기 인생이 존재하게 된이유와 목적을 안다. 그것이 빛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의 목적도 모르고, 육신을 주신 이유도 모르면서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구하는 삶 속에 있다면 빛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으로 혹은 다른 이유로 빛 가운데 있다 여기는 착각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It ain ' t what you don ' t know that gets you into trouble. It ' s what you know for sure that just ain ' t so.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영화 <빅쇼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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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13-20) 장로들아 부르짖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20. 13:24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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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에게 또 제사장들에게 슬퍼하라고 하신 것이 슬퍼해야 할 상황인데 슬퍼하지 않기 때문이듯, 장로들에게 부르짖으라고 명하신 것 역시 부르짖어야 하는 상황인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슬픔이나 간절함이 바탕이 되는 부르짖음은 본능적인 것이지 명령에 의해, 또는 작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모든 거민을 모아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씨, 생축, 소, 양 모두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모든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천부께서 알아서 기르신다”고 하셨다. 즉 그들의 먹을 것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끊어졌다? 그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피지 않으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멸망이며,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이 말씀에 있는 멸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말론과 궤를 같이하는 멸망과는 다르다. 현상적으로는 육신의 생명이 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언제나 현상은 보이지 않는 본질이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당연히 먹이신다고 하신 것이 죽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먹이지 않으신다는 것이고, 먹이지 않으신다는 것은 생축과 식물과 양과 소의 존재 목적이자 먹이시는 목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의 본질인 하나님께서 창조한 목적이 소돔과 고모라의 때 10명의 분량만이라도 남았다면 진멸 당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사와 궤를 같이한다. 제사라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다.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주관하시는 것에 자신을 내어 준다는 의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주관하신다는 것은 그 뜻하신 목적과 의도대로 주관하시는 것이 근본이다. 따라서 제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뜻하신 것을 나에게 이루시게 우리 자신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뜻이 땅(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하는 목적이 사라지는 것이 종말적 멸망이다. 그 보다 더한 멸망은 없다. 사람도 존재이므로 당연히 그 법 아래 있다. 그리고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사람 스스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이 “스스로 있는 자”인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의 목적을 계획하고 경영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이 믿음 위에서 모든 것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제물로 드리면서까지 보이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버리고 자기들 무리를 모아 그 허다함이 좇는 것에 인생의 목적을 두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의로 그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게 멸망이다. 멸망은 육신의 평안이나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삶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목적에서 떨어진 것이다.


요엘서는 하나님께서 장한 사람의 자리를 떠나 대중성에 기대어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멸망이니 그 멸망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장로들에게 거민을 모아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명하고 있다.


땅의 거민, 땅에 거하는 사람은 하늘에 종속된 사람이다. 땅은 하늘이 변하는 것에 따라 변하고 순종한다. 하늘이 따뜻하게 되면 땅이 여름이 되고, 하늘이 차가워지면 땅이 겨울이 된다. 그리고 땅에 속한 모든 것 역시 땅이 하늘에 순종한 것에 따라 순종한다. 하늘이 차가워지면 땅이 겨울이 되고, 땅의 모든 것은 겨울에 맞게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의를 상징하는 대명사다. 즉 하나님의 뜻에 땅에 거민은 기본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것 아니면 죽음을 맞는다.


그리고 장로는 이러한 것을 오랜 세월 겪고 그 가운데서 지혜를 얻은 자다. 요엘서를 시작할 때 나오는 늙은이들과 교집합의 사람들이다.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찌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찌어다 …”(욜 1:2)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세우신 뜻을 사람이 버리고 사람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들이 떼를 이루어 추구하는 것을 좇을 때 일어나는 일을 보았으니 그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께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뜻에 순종하겠노라 구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 이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메뚜기 떼로 인하여, 육신의 정욕을 좇아 세상의 가치를 좇는 허다한 무리들의 가치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고, 하나님께서 생명이라 여기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생명이라 여기는 것이 없으면 세상을 경영하시는 목적이 상실된 것이고, 본질인 하나님의 목적이 상실된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 속, 육신의 생명 또한 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기에 땅에 거하는 거민은 이 지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구하라고 명하신다는 것 조차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실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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