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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선지자는 자녀가 장래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환상)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장래일과 꿈과 이상은 초인적 능력을 의미하거나, 그것을 행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하는 사람을 성령의 능력 소유로 구분하는 것을 위함이 아님을 이미 설명하였다.


장래일과 꿈과 이상,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것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깨닫고 순종하게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은 신비하고 초인적인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을 깨닫게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궤도를 벗어난 성령의 역사하심은 없다. 이상이든 환상이든 물 위를 걷든, 죽은 자를 살리든 이 모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것에 수렴한다. 그것이 성령의 일이다. 단지 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혹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변에서 소위 성령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며 치유의 기도를 하거나 다른 사람의 미래를 기도로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그 능력이 사람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낮은 자리로 이끄는 것에 쓰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믿으면 위대해진다는 것을 보이고자 함인지로 구분해야 한다. 당연히 위대해지는 것을 향한 사람은 성령의 정체성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성령과 무관한 것에 그치지 않고 구원도 없는 것이다.


성령의 모든 일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알게 하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는 삶이 어떤 것인지 삶으로 깨닫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삶을 보고 들은 사람의 심령에서 그것이 생명이 되어 그 사람의 삶이 되게 하여 예수님과 같이 낮아지는 자리로 이끄시는 성령의 직임과 반대로 세상에서 위대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직임에 대한 근본을 말씀하시는 사건은 예수님의 잉태하심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사건에서부터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성령의 본질적 직임이 있다.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심이 예수님의 잉태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성령이 임하셔서 말하게 되는 장래일이나 꿈이나 이상이 무엇인지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도우시는 성령이라는 성령의 직임을 기반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사람의 능력 이상의 초현실적 현상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성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므로 자신이 이 요엘서의 말씀에 나오는 장래일과 꿈과 환상을 기이한 능력이라는 맥락에서 보고 있었다면 신앙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럼 성령의 직임 아래서 장래일과 꿈과 이상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경험하게 되는 일들은 대상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의로 알고 좇는 신앙이 재앙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자녀와 늙은이 그리고 젊은이와 남종과 여종 이 모두가 육신의 나이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회개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을 앙망한 세월이 긴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곧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이상을 가진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으로 일하게 하는 종과 같은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자녀들은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먼저 자녀들은 장래의 일을 말한다고 하신다. 자녀는 부모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면서 그들의 장래는 또한 그들의 부모와 같은 생명으로 사는 존재다. 사람의 자녀는 나면서부터 그 부모와 동일하게 사람이라는 존재로 살아가니 사람의 자녀들, 그들의 장래는 그들이 사람으로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본성, 삶의 본성이 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 그들의 장래일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사람이 하나님 의가 자신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고백하면 성령께서 그 고백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렇게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의로서 살게 된다는 것을 고백하고 말하며 소망하며 믿는 삶을 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자녀들이 장래의 일을 말한다는 의미다.


<늙은이는 꿈을 꾸며>

이어서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라고 하신다. 늙은이는 미래보다 과거가 많은 사람, 곧 세월과 기억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늙어서까지 알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는 꿈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다.


늙은이, 어떤 것을 추구하고 앙망한 세월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그 꿈은 더 간절하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시므온과 80년 과부생활 동안 사모한 예수님을 만난 안나와 같이 대중적 신앙이 재앙임을 깨닫고 오랫동안 주의 신을 기다린 사람들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은 다름이 아니라 인생의 목적이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것도 그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간절하게 바라는 꿈, 바로 <인생의 목적>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 바로 늙은이가 꾸는 꿈, 이루어지는 꿈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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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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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말씀 곧 예언하고 있다. 자녀들은 장래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보게 될 것이며, 하늘과 땅에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는 이적을 베풀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령에 대한 관점, 곧 초인적이거나 초자연적 이적을 일으키게 되는 것으로 보면 장래의 일은 일반인이 하지 못하는 예언으로, 꿈은 징조를 미리 아는 신비한 경험으로, 이상은 환상으로 생각될 것이다.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은 초자연적 이상현상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기에 사람의 능력과 한계 그리고 용량을 분명하게 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주시든 그 한계에 맞게 주신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보다 앞서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되는 것을 주신다는 점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이를 더 알기 위해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했을 때를 상기해 보자. 하나님께서 바위를 쪼개는 바람으로, 또 돌과 흙을 사르는 불로 나타나셨지만 엘리야는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하나님이 사람에게 임하시면 사람의 능력과 한계를 훨씬 넘어선 존재로 임하시기에 사람이 감당할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보면 죽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 이 말씀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초월적 능력의 하나님을 사람이 만나면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늘 사람에게 만나겠다고 하신다. 그러면 다 죽이시겠다는 의미인가? 당연히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은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사람들이 정의하는 하나님, 사람의 생각이 만든 하나님을 만나면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모습으로 사람에게 오시면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측면도 있고, 사람이 그렇게 마음대로 정의를 내린 하나님은 우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인 성령 역시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사람의 능력과 인간의 한계 이상의 모습으로 임하시면 사람은 그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임재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정한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목적 아래 가장 적합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신다면 그것은 그 창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모습으로 임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성령과 사람의 관계는 바로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장래일과 늙은이의 꿈 그리고 젊은이의 이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반드시 궤를 같이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과 능력 그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가치로 하나님을 정의 내리고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사람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성령이 임하면 주말 복권 번호를 미리 알듯이 꿈을 꾸고 예언하며, 기이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며 종말을 외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영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무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다. 즉 구원도 거듭남도 성령으로 잉태됨도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 성령이 임하면 초인적인 일을 행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자신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 생각해도 거의 무방하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면 그것이 구원이 된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을 부인하고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면 양심에 화인 맞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성경은 바로 이렇게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먼저 알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과 능력과 한계는 그 목적에 부합되므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그 맥락 위에서 성령도, 구원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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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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