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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2:28-32)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7. 04:00 Writer : 김홍덕

요엘은 자녀들, 늙은이와 젊은이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씀하는 것에 이어서 남종과 여종에게도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남종과 여종에게 신을 부어주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말씀이 없다.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면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종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해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사람을 때로는 ‘아들’이라 하시기도 하고, 또 때로는 ‘종’이라고도 하신다. 문제는 때로는 종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 3:35)


옛날에 종이 되는 이유는 전쟁에서 져서 포로가 되거나 아니면 빚(debt)을 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종은 ‘빚진 자’이다. 전쟁이나 경쟁에 나서서 지면 이긴 자의 의(義)에 순종해야 하는 빚을 지는 것이고,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면 그 또한 빚을 지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종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의 종이고, 또 하나는 세상의 종이다. 그 둘은 ‘하나님’과 ‘세상’ 이렇게 주인은 다르지만 의에 대하여 빚을 졌다는 것은 같다. 세상의 가치를 좇으며 그것을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의 의를 성취해야 하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뚜기 떼와 같은 수 많은 세상의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를 좇아 열심히 살면서 그것을 삶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선하고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가르치고 배우며 그렇게 살아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니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으로 안다. 그것이 메뚜기 재앙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메뚜기 떼와 같이 허다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크고 위대한 것을 좇는 삶이 세상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게 세상의 종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종은 종이라는 점에서 빚을 진 것은 동일하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에 빚진 자이다. 목적에 빚을 졌다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안에만 있는 일이다. 지은이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까지는 아니지만 우리가 생활에서 사용하는 모든 제조물들을 예로 보면, 전구나 전화기 또 식칼과 같이 우리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그것을 제조하고 사용하는 이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전구나 전화기, 식칼은 그 제조자 혹은 주인이 의도한 목적에 대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가지신 창조의 목적에 대한 빚을 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목적을 가진 유일하고 완전하며 절대적인 창조주라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며 믿지 않으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당연히 목적의 연관성도 없다. 즉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종이 될 여지조차 없어진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창조주주로 믿지 않으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교회에 가면 늘 볼 수 있다. 목사나 장로가 그들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라가 어떻다든가, 세상에 악이 넘치지 하나님이 도우셔야(일하셔야) 한다 기도할 이유가 없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만들고 실수 없이 다스린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럴 수 없는데, 말은 실수도 않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는 세상에 악이 넘치니 하나님이 일하셔야 한다고 한다. 그건 하나님이 직무유기 중이니 빨리 업무에 복귀하라고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그것을 기도라고 예배시간에 한다. 그 모습은 하나님 종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을 절대 창조주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절대적인 조물주로 믿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형상)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에 순종한다는 것은 의가 육신이 되는 것이니 곧 아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종은 같은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절대적인 명제가 선행된다. 세상이 추구하는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첫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것과 같이 낮아지고 낮아져서 십자가를 지는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교회에 다니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 신학을 공부한 것, 장로나 목사가 되는 것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세상의 이긴 자가 되는 것을 영광과 은혜로 여겨서도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더 뛰어난 세상의 종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종은 관점의 차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 앞에 죄인이 되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을 생명의 법으로 보면 아들이 되고, 목적이란 기준으로 보면 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종으로 거듭나게(잉태케) 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에게 신을 부어 주신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끄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끄시는 사람의 삶은 예언과 꿈과 환상으로 말하고 보여주신 대로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아니 살 수밖에 없게 된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생명으로 났는데 그 본성대로 사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 곧 삶이 된다는 것이므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바로 그런 본능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굳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준 신이 어떤 능력을 나타낼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운 기적을 행하게 하심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게 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게 하신다는 뜻인 것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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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는 것 역시 이 맥락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젊은이들은 늙은이와는 달리 과거보다 미래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늙은이가 육신으로 노인이 아니듯 이 젊은이 역시 육신의 청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이상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을 닮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게 젊은이다.


육신으로 젊은이들, 세상의 젊은이들은 유토피아 같은 이상적인 사회나 미래를 꿈꾼다. 그게 젊은이들의 이상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것은 환상과 같이 현실적이진 않다. 괴리가 있다는 말이다.


그 젊은이들의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있듯 신앙인들에게도 늘 괴리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라 형제라 하셨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우리는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느새 경건함과 같이 되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예수님과 같이 되는 이상이 없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나님의 신, 그 의가 임하지 않고 내재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교회를 아무리 열심히 다니고 그 신분이 목사 아니라 그 할배라도 구원이 없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다시 돌아와서, 젊은이들이 이상(환상)을 본다는 것은 메뚜기 떼와 같이 그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 재앙이라 깨닫는 어두움과 캄캄함을 지나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될 것이라는 이상을 보게 된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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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두 종류의 사람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7. 5.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에 있는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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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육신으로 산 사람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보실 때 산 사람이다. 이것을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유 1:19)과 영에 속한 사람으로 표현하 기도 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영에 속한 사람은 육으 로도 산 사람이나 육에 속한 사람은 육신은 산 사람이나 하나님의 목적을 기준으로 보면 죽은 자요,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적 발상에 대한 차단을 위해 이것을 미리 밝혀 둔다. 영지주의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루도록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살았다고 인정하시는 사람이 따로 있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에 그치면 그 역시 모르는 것만 못하다. 그 어설픈 지식으로 이곳저곳을 어지럽게 하는 것 외에 자신이나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 줄로 아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하심이 바로 그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경을 보는 사람, 또 이 책을 보는 우리 각개인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사람의 자리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 성경의 본질적인 목적이다. 그 목적을 기준으로 산 사람과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분한다. 분명하게 두 종류의 사람을 성경이 제시했다는 것은 “너는 그 둘 중에 누구냐?”라는 것을 물으시는 것이다. 마치 선악과와 같이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물으시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만 하나님이 가진 생명의 관점이 이해된다.


하나님께서 성경과 만물을 인지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일차적으로 “죄와 사망에 빠진 자”라고 하시고, 죄와 사망에서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신다고 하시는 것은 분명히 육신의 호흡이 있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육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라는 의미다. 육신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삶을 주신 이유를 알 기회로 주신 것이다. 물론 기회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경영하시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아들을 직접 보내시기까지 그것을 사람에게 설명하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호흡이 있는 모든 사람은 그 호흡이 있는 동안 하나 님께서 자신에게 호흡과 삶을 주신 이유를 알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기 전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자신이 창조된 목적,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알기 전까지는 살아 있는 것조차 아니므로 삶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그것 알기를 소망하고 간구하여야 한다. 이는 굳이 성경 말씀이 아니어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기까지는 삶을 살아 있는 삶이라고 말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하여 전도자는 말하기를,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 12:1)

라고 하였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묻기를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25장(5절)의 말씀 으로 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주 저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37)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 사람인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그 뜻을 아는 것이 가장 먼저고,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랑이란 서로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


그러므로 사람은 육신이 살았다고 하나님 앞에 산 것이 아니므로 그 육신의 삶이 주어진 목적과 의미,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를 알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죽은 것은 물론 철학 적으로도 의미 없는 인생이므로 하나이자 전부인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기 위해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야 한다.


육신의 호흡이 있는 동안 하나님이 뜻하신 인생의 목적을 알도록 모든 것을 쏟아야…


여기서 우리는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든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로 선택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하여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만물과 세상의 모든 일로 우리에게 존재와 정체성을 보이셨고 그뿐 아니라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그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육신은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또 스스로 선택할 수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선택해야 해야 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예비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을 보지 못하고 선택하지 않아 하나님의 의가 삶을 주관하지 못하면 그것이 소경이고 중풍병자며 문둥병자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선택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한 그 선택에 책임이 따르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심판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으로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생명이 있는 자리로 옮겨가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 선택이 순종이고 거듭남이며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이것이 육신으로 살 동안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다. The Man이 하나이니 그 존재 목적도 하나다. 사람을 질그릇이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 께서 정한 목적과 뜻을 선택하여 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른 선택은 하나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에 대하여 강제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선택에 맡기셨다. 선택과 순종 없이, 또 의식 없이 하나님만 찬양 하는 존재를 만들 이유는 없다. 그건 하나님 스스로도 충분하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다. 고백은 새로운 시작(The Beginning)을 선택한 사람이 이전에 자신이 있던 자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었음을 시인하는 것이 다. 그것이 바로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담을 그릇 으로 지음 받았는데 하나님의 의를 선택하지 않은 상태로 사는 것은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자리를 떠났다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罪)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육신이 살아 있을 동안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자리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창조목적과 사람에 대한 뜻을 가장 기본적으로 설명하는 책으로 성경을 주시고 무엇보다 가장 온전히 설명하는 것은 바로 육신이므로 예수님을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보내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에 살 동안 하나님의 의가 아닌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 의의 자리로 가서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으로 옮기는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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