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요엘 2:28-32) 구원은 남은 자들의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17. 12:09 Writer : 김홍덕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에서 ‘누구든지’는 ‘아무나’가 아니라 엄격한 자격이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앞선 글에서 설명하였다.

 

그 자격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좇아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하나님께 구하는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회복과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하고,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그 날까지 자기 삶의 해와 달과 같았던 자신의 의로움과 가치가 지배하는 자아의 세상이 망한 사람이 자격자라는 말씀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를 확증이라도 하듯이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하)”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예루살렘에 피하는 자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자는 <남은 자> 중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는 ‘아무나’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단지 세례문답이나 교회의 예식에 참석했다는 것 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믿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성경을 학문화 한 신학을 육신의 노력으로 공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교리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은 더 기가 막히는 일이다.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알도록 주신 성경을 학문으로 성역화하고, 그 학문을 이수한 사람들이 종교 안에서 육신으로 이룬 업적으로 설교하는 권리를 얻어서 떠드는 말에 행위나 업적을 의로 여기시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을 의탁하는 도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결코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너무 쉽고 상식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것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면 너무 쉬운 것인데 사람들에게 구원이 쉽지 않고 어려운 것은 그 단순한 순종을 등지고 있어서다.

 

하나님 의에 온전히 순종하기로 하면 쉬운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사람이 자기의 의를 좇아 살다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기 위해서 겪는 과정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물론 그 과정은 사람에 따라 다르고, 성품이나 겪은 세월에 따라 다르겠지만 삶의 여정이 순탄하거나 아니면 험난하거나 자기의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런 과정을 지나지 않았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아무리 가르치고 믿어도 그것은 착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기 전에도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이었는데 교회에 다니면서 동일한 것을 바라면서 단지 그 성공과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면 다르고, 성공과 평안의 세월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겠다고 다짐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거듭났다면 이전과 다른 생명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교회에 다니기 전,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믿고 난 다음이나 귀한 것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생명을 거듭났다고,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다.

 

세상이 크고 비싼 자재로 지은 건물을 좋은 건물이라고 하듯이 교회를 크고 비싼 자재로 건축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 말하는 것은 전혀 가치가 변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도 시험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을 복 받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라고 생각하는 생각 어디에 거듭난 변화가 있는가? 그런 것은 거듭난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성경 이전에 상식적 논리로도 말이 안 되는데, 그것을 성경을 채색하여 말한다고 상식 넘어 신앙이 된다고 가르치고 믿으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만인가? 

 

더욱이 그런 기만적 신앙은 단순하게 구원을 얻지 못했는데 얻었다고 착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지극히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은혜와 복과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복과 영광으로 여긴다고 하나님도 그것을 복과 영광으로 여기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도 세상과 동일한,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을 가진 신으로 치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하나님도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영광과 복으로 여기신다면 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말구유에 나고, 세상 가장 천하고 저주 받은 사형수로 십자가에 못박히게 두셨을까?

 

이 하나만 양심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이 사람들과 동일한가치관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은 내려놓지 않고 거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니 자신들도 믿고 있으니 그것이 진정한 재앙인 것이다.

 

구원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수에 의지하여 믿고 있는 대중적 신앙이 자기 영혼의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께, 교회에 가서 세상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 이름으로 구하고,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쓰겠다고 부도 수표 발행하는 신앙이 구원 받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행할 사람, 하나님을 위한 능동적인 사람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사람, 수동적인 사람이 필요한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서 파생된 가치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금과 은, 그리고 피조물인 사람에게서 나온 사상적, 철학적, 도덕적 가치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 가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규정한 신앙이 구원 받은 신앙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신학도 뭐도 아닌 그저 피조물인 사람이면 아는 상식적 논리다.

 

구원은 남은 자들의 것이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의로 여기고, 가치로 여기고, 신앙으로 여기나 하나님의 정체성에 반하고,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맞지 않고 사람들의 상식에도 위배되는 신앙이라는 재앙에서 남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메뚜기 떼의 재앙에서 남은 자는 대중적인 가치와 신앙이 하나님 앞에 자기 영혼의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대중적 신앙이 망한 신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믿음의 여정을 출발한 사람들 중에서 남은 자들에게 있다는 말씀이 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남은 자들은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적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므로 매우 어둡고 캄캄한 날을 맞이했던 사람이고, 그 어둡고 캄캄했던 날이 여호와의 날임을 체휼한 사람이며, 그 여호와의 날을 인하여 자신의 가치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기준으로 회복된 사람이며, 그 회복을 인하여 임하신 하나님의 영이 일으킨 이적을 보고 그날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가치와 의와 선과 악의 기준과 같은 해와 달이 모두 어두워져 그날까지 자기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길고 긴 여정을 지난 사람이다.

 

구원은 그 여정을 지나기까지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회복이자 은혜와 생명이다. 그런 여정이 자기 삶에 없다? 그럼 당연히 구원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자신을 구원 받았다 여길 일이 아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엘 2:28-3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16. 11:5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즈음에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죽은 세례 요한,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아닌가 말한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다시 물으셨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우리는 이 대화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한 번 본적도 없고 인간적인 관계가 전혀 생성되어 있지 않지만 한쪽 상대가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선수와 같이 유명인이라서 누구라도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유대인들에게 죽은 세례 요한이나, 오래 전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는 이런 유명인과 같은 존재들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자신을 불러 주지도 않고, 자신과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이것도 이름을 부르는 하나의 경우다. 


그러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상호간에 관계가 형성된 관계 안에서 서로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고 인정하고 용납하는 관계다. 


때로 각색된 영화와 같은 곳에서 관계가 틀어진 사람들 대화 속에서 서로를 부르는 것에 대하여 화를 내는 장면도 바로 관계와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와 같은 곳에서 그런 것을 각색하고 관객이 공감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렇게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고, 그런 인식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된 상태에서 부르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 여기서 온전한 관계라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정체성과 의와 뜻에 맞게 부르는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을 부를 때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정체성이 일치해야 온전한 관계인 상태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온전한 관계고 온전한 부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런 관계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부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를 부를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부른다.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부른다.


만약에 하나님이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들의 생각과 같이 육신과 세상의 일과 그 일에 대한 가치를 기준으로 복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고, 그런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이 우상이고 다른 하나님을 두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정체성과 의와 뜻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자신이 하나님 부른 것이 온전한 것이라 여기는 것은 십계명의 시작부터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이라는 말씀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 의미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스스로 있다는 것은 아주 평범한 말인 것 같지만 절대적인 신성의 상징이다. 모든 만물은 스스로 있을 수 없는데, 스스로 있다고 하신 것은 그가 곧 창조주라는 의미를 뜻한다.


그리고 또 스스로 있다는 것은 ‘풍요의 신’ “바알”, ‘다산의 신’ “아세라”와 같이 무엇을 하는 신이라는 것과 구별된다. 마치 Be동사와 Do동사와 구분되는 것과 같이 명확하다. (교회에 가서 부자되면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일이고 그 재물로 주를 위해 살겠다고 기도하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조심스레 성경을 지키는 신앙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정체성과 의는 존재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면 무엇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의미다.


따라서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를 때 구원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은 여호와 곧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존재의 신으로 부를 때 온전하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완연하게 다른 이름이고, 다른 부름이다.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스스로 있다는 것처럼 절대적 신성에 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이유이고,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와 같이 사람에게 물으시는 이유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기도, 성경 보는 것, 전도하는 것, 봉사 포함)을 하느냐?’가 관심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누구냐?”, “너는 내가 의도한 존재(자리)냐?”를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오직 그것 뿐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기 육신의 삶을 보전하고 축복하고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메뚜기 떼와 같이 절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교회가 가르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한 육신의 삶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려 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축복을 얻을 수 있는 행위를 효율적으로 할 것인지 연구한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부르면 그가 누구든지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알고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다.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의도한 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신 것에 답한 적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여호와라는 신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란 신이 그 아들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보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세상의 문제 해결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다. 결국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여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과 사람이란 존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요엘이 말하는 “누구든지”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신인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이 무엇인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아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과 같이 자신과의 연관성 없이 부르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씀은 메뚜기 떼와 같이 대중이 하나님의 의라고 믿던 신앙은 재앙임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여 실상은 여호와의 날이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재앙과 같은 신앙을 좇았다는 절망적인 어두움과 캄캄한 날을 마주하고, 그 어두움 속에서 탕자와 같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시고, 이어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그 신의 감동을 인하여 자신의 의로움이 모두 종말을 맞는 여러 여정을 거친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상세보기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엘 2:28-32) 구원이 쉬울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14. 12:29 Writer : 김홍덕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1)


이 말씀을 접하면 순간적으로 ‘누구든지’가 마치 ‘아무나’라도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고, 그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졌다는 것을 믿으면 쉽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해볼 것이 있다. 구원이 과연 그렇게 쉬운 것이라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라는 극형을 소화해가면서 희생을 드려야 했을까? 아마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랬기 때문에 구원은 쉬운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게 사람에게 편리할 테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셨고, 예수님과 형제, 곧 같은 아버지의 본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야 구원이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같은 아버지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상황에서는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은 사도들의 시대에 정말로 순교하는 것에서부터 삶에서 서로 의의 충돌과 갈등과 같이 삶의 작은 부분 모두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리스도로 사는 삶’,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자녀답게’와 같은 말이 무색해진다. 즉 육신으로 살면서 서로의 의가 다를 때, 같은 일을 해 가면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가 다툴 때 “너의 생각대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거듭난 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것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된 이유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의 어떠함에 대하여 유대인들과 세상의 가치를 좇는 이들의 생각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은 의의 대립에서 너의 뜻대로 하는 종과 같은 결정을 하게 하는 본성, 유전자를 가진 존재임을 보이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은 세상의 가치로 높은 존재라 믿는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 십자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은 그런 본성이 없다면 어떤 형태로도 얻을 수 없다. 예수 외에는 구원을 얻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이란 예수님이 보이신 정체성,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 아니면 구원이란 없다는 아주 단호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냥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은 예수님이 받았으니 나는 사함 받았다는 신학으로, 세례 문답과 세례로, 교인증서나 세례증서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이고 의로운 생각인가 돌아봐야 한다.


한 마디로 구원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물론 구원이 어렵다는 것은 저항력을 가진 말일 수 있다. 구원은 말 그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 얻을 수 있는 쉬운 것이고 예수님은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서 봐야 하는 말씀이다. 그래야 왜 쉬운지, 또 한편으로는 왜 어려운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의 짐이 가볍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존재가 그 존재의 목적대로 사는 것 이상으로 존재에게 쉬운 것은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망치는 못을 박거나 부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으로 두부를 자르려고 하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당연히 사람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는 모든 원인은 단 하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짐이 쉽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 쉬운 삶이 자신의 삶이 되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니 아들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다. 존재가 목적과 하나 되었을 때의 쉽고 평안함을 누리는 것이 이것이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 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이름은 정체성이므로 그 정체성을 불러 상관이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이 또한 동일한 맥락이다. (이것은 다음 회에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그러므로 구원이 쉬운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존재가 목적대로 사는 것은 쉬운 것이고, 또 존재가 자기 목적대로 살겠다고 순종하는데 그 창조주가 그것에 난관이나 시험이나 어려움을 주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구원이 어렵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그 선택을 하기까지 자기 의를 버리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당장 이 요엘의 말씀만 봐도 그렇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즉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의 과정이 보통 험난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험난한 것은 하나님의 고의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겪는 일임을 잊지 말고 있어야 한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래서 교회가 하자는 대로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메뚜기 재앙과 같은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심지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완성되지 않은 퍼즐 같은 설교와 성경에 대한 이론과 학문에 대한 갈증을 겪고, 또한 예수 믿는다고 삶이 변하지 않는 자신과 사람들의 삶을 목도하고 회의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은 죄가 없다는 온전한 말씀에 반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신앙을 떠나면 죽을 것 같아 그 속에 머무르고 있다.


그것은 죄가 있어도, 온전하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도박과 같은 신앙에 매몰된 재앙 속에 있는 것인데 그것부터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재앙이었다는 것이 인정이 되어야 자신이 어둡고 캄캄한 세월을 보냈고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런 날을 맞이해 보지도 못했는데 구원에 이를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구원은 오직 한 길 밖에 없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또 죄와 비겁함을 인정해야 비로소 그 세월이 여호와의 날에 이르게 하는 것이 자기 속에서 확신하게 되고 그리고 이어서 자신에게 성령이 임하시며, 지난 모든 세월의 의로움인 하늘의 해와 달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곳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구원의 여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어떤 부름에 답한다는 것을 아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정말로 낙타가 바늘 귀를 들어가는 것과 같이 어렵고, 세상의 확률로도 산출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극히 작은 수에게 허락된 것인데, 창조의 목적을 기준으로 존재가 목적대로 사는 것이 구원이고 그것이 가장 쉬운 것이라는 이해와 믿음과 본성도 없이 거저 구원은 쉽다고 말하고 그것을 팔아먹고 동조하는 종교라는 허울 안에는 구원이 없다.


무엇보다 구원은 본성이 바뀌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신을 불러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부름이기에 구원은 그런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자체가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교회 다니기 전이나 교회에 다니는 후나 추구하는 것은 여전히 세사에서 성공하고, 육신 평안하고, 자녀 잘 되는 것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고, 성경대로 사는 착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으로 그 원하는 것을 바꾸려는 장사속으로 구원을 논하면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십자가를 욕되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실상은 구원이 없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구원을 구하고, 얻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니 다시 사함을 받을 기회조차 스스로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쉬운 것이나, 사람들의 생각은 그것에서 멀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상세보기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