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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3:1-8) 하나님 심판의 대상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24. 10:45 Writer : 김홍덕

심판의 대상이 육신으로 이방인이거나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은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속에 있는 것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다. 사람이란 존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경을 대하는 각 개인의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속 사람에 관한 말씀이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즉 심판의 대상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사람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생각해보면 요엘서 3장에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이방 민족은 요엘서의 흐름 상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다고 보기 힘들다. 2장까지 내용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을 준 것은 메뚜기 떼로 인한 재앙이었지 이방 민족의 침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메뚜기 떼가 이스라엘 땅을 나누고 소년을 팔아 기생을 사고 소녀를 팔아 술을 샀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이 메뚜기 떼 재앙이 메뚜기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결국 이 메뚜기 재앙이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을 의로 삼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그것을 의로 삼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대상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다름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며 많이 모인다고 의로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메뚜기 떼를 보내시고 그 메뚜기 떼가 곡식을 먹음을 인한 연쇄작용의 결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없어진 것을 보이시므로 다수가 모여서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을 의로 삼는 것은 하나님께 온전하지 않음을 보이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뚜기 떼로 인하여 제사가 없어지는 것을 보고 대중적 신앙에 자신의 의를 두고 있는 것이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이 재앙 가운데 있었다고 고백하는 그 어둡고 캄캄한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 되어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시작한다고 말씀을 하셨다.


메뚜기 재앙이 이런 의미라는 것은 안다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은 당연히 메뚜기 떼를 보내서 사람들이 깨닫기를 바라신 사람들의 죄, 곧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을 가진 자가 많이 모여서 그 수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의를 의로운 것으로 여기는 그 마음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과 생각과 가치가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을 재앙으로 고백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 다는 것도 증거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그 있던 자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리며, 그 구원이 하나님의 구원이니 죄와 사망의 자리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을 흩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땅을 나누며, 하나님의 백성인 소년과 소녀를 팔아 기생과 술로 바꾼 심판의 대상은 죄와 사망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은 아무리 수를 모아도 역시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늘 구한다. 그것을 구하는 사람의 수는 메뚜기 떼와 같이 허다하다. 그리고 그 구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지 늘 고민한다. 성경을 어떻게 지켜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쉽고 또 풍성하게 주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대중적 신앙의 실체이며 요엘서가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없어지게 되는 메뚜기 재앙의 본질이다. 그리고 바로 그 마음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대상이다.


사람들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혹 다른 신에게) 구하면서 그것을 얻고 누리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로움이다. 선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주장하는 마음이 바로 자신의 의로움이다. 


문제는 사람은 그렇게 스스로 의를 만들고 주장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형식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그 형식의 평안과 성공을 위하여 스스로 의를 만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선악과 사건을 통해서 그것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가 많으므로 메뚜기 떼와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죄와 사망의 자리이자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가 육신의 일을 본질로 보고 그에 속한 평안과 성공을 구하는 대중적인 사람들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을 본질로 보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이 자기 마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혈통으로 이방인이라고 생각하거나, 교회에 가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거듭나지 않아서 크고 넓은 문으로 다니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자기 마음에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예수님은 나와 다르므로 나는 노력할 뿐’이라는 겸손으로 횟칠했지만 실상은 그리스도와 자신이 다름을 알지만 다들 그것을 신앙이라 하니 그것에 의지하고 있는 마음이 바로 심판의 대상이다. 반면에 그것을 재앙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회복케 하시고 여호와의 신을 부어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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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 - 지시할 땅, 약속의 땅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7. 19.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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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직 아브람이라 불릴 때 하나님께서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고 하시고, 세상의 가치관이 다스리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을 떠나 약속한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 이 말씀들은 사람에게 아담이 죄를 범하고 숨은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라는 말씀이다. 육신으로 살아 있는 사람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볼 때 산 사람으로 거듭나라는 말씀이다.


아브람의 이야기는 하나님께 순종하면 물질적 풍요와 모래 알처럼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주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거듭남의 이야기다. 출애굽도 그렇다. 지시할 땅과 약속하신 땅은 하나님께서 정한 흙인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의 자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 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들을 지도상의 이동이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의 자리로 가는 것임을 알고 믿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렇게 보려면 빛이 비춰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나의 존재 목적을 가진 분으로 믿어야 아브라함의 여정과 출애굽의 여정과 성경 말씀이 자기 존재 정체 성을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말씀으로 들린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 님은 존재의 신이고, 성경은 존재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이 들리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태초고 아브라함이 순종하고 길을 떠나듯 진정한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떠난 자리는 지명 갈대아우르가 아니라 정체성의 자리다. 육신으로는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호흡 있는 삶을 주신 이유를 알지 못하는 자리,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를 벗어난 죄와 사망의 자리다. 굳이 이것을 죄라 믿지 않더라도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삶의 목적과 의미도 없이 시곗바늘처럼 매일 세상이 추구하고 요구하는 것만 좇아 사는 것을 자기 자리 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관점을 가지는 것이 성경의 행간을 보는 것이다.


자신이 창조하거나 선택조차 하지 않은 인생을 자기 옳은 대로 판단하고, 목적 아래 창조된 피조물이 스스로 삶의 목적을 찾는 삶이 바로 본토 아비집 갈대아우르다. 죄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왜냐하면 자기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는 창조주라고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껏 자기 뜻대로 살던 인생의 자리는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이고, 자기가 창조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은 삶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 판단에 따라 살 뿐 아니라 피조물이 스스로 삶의 목적마저 정립하는 삶이다. 그런 태도는 자신이 피조 물이 아니라 창조주,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피조물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버리고 창조주의 정체성을 자신의 것이라고 먹어 버린 죄의 자리가 바로 떠나야 하는 자리다.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단지 “지시할 땅”이라고 한 불명의 자리로 떠나는 것은 믿음 없이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만난 소경 바디매오가 소경임에도 예수님께서 부르시니 <뛰어>간 믿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있는 자리가 죄의 자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자리를 고백하고 떠나는 것이다.


어딘지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그곳은 인생인 나의 자리라는 것을 믿고,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있으라” 하심이라 믿고 떠날 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다. 이것을 믿음이라 한다. 이것은 어려워 보이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자기 삶을 그대로 살아도 되는 만족한 삶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나님만이 내 삶의 목적과 내 존재의 의미를 아시는 분이라고 믿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하나님이 정한 자리로 떠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믿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가야 할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고, 아직 그 자리에 이르지 못한 자신은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다. 자기가 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고백이나 시인 없이 떠날 리는 없다. 이 고백 없이 하나님의 세계는 시작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알고자 성경을 읽고 보는 사람에게 하나 님은 자기 삶의 목적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아브 라함처럼 하나님이 정한 자리로 떠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면 인생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것을 믿고, 또 그가 말씀하시는 사람의 자리가 자신의 자리임을 믿고 순종하고 옮겨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시한 땅이고 약속한 땅이며 “빛”이다. 그리고 그 자리가 우리에게 주신 육신의 삶의 온전한 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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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3:1-8) 하나님 심판의 대상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18. 15:12 Writer : 김홍덕

이렇듯 구원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온전한 구원에 대하여 한 번 더 정리하고 요엘서 3장이 말씀하시는 심판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정리하면, 구원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팔아먹거나 구원이 쉬운 것이라는 의미도 모른 체 그저 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시 구원을 얻을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자 자기 만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구원의 기회를 상실한다는 것은 구원을 쉽게 생각하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증거가 자기 안에 없는데 단지 교회에 다니고 교리에 따랐다고 구원을 받았다 여기고 있으면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온전한 구원을 얻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명명백백하게 구원 받은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증거가 자기 안에 있지 않는데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맘대로 정의하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자기가 그렇게 설계한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하나님, 자기 하나님이니 그것이 바로 손으로 조각한 우상이고 그것을 섬기니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자신에게 있을 일은 성경에 넘쳐나지만 다들 눈 감고 귀 닫고 있다. 우선 요엘서에서 말씀하듯이 자기 해와 달이 어두워진 날이 있었는지, 그리고 대중적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서 돌이킨 삶이 있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디 이것 뿐인가?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 예수님이 주시는 물(말씀)을 구하고 그것을 먹었다면(자신의 것이 되었다면) 자기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영원히 솟아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변화와 능력이 자기 안에 없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구한 적도 없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절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네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 받은 사람의 상태가 어떤지 보여주는 아주 선명한 말씀이다. 자기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수와 같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거나 성경을 자기 편리대로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물론 성경을 편리로 해석하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자기 심령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샘솟듯 하는지를 반추해 보면 자신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적 신앙이 자기 영혼의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여 맞이한 어둡고 캄캄한 날을 지나 하나님의 회복과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지난 날 자기 삶의 해와 달과 같은 자기 의로움 위에 선 자기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존재의 신 여호와로 부르는 남은 자들의 것이다. 


그런 사람, 곧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여호와의 신 곧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이 주는 본성이 자기 삶을 늘 이끌어간다. 본성은 마치 샘물과 같아서 어느 순간이라도 항상 그 본성대로 나온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이 늘 동일하게 표현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먹고 속에서 생수가 넘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자기 삶이 이와 같음을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요엘 3장에 나오는 심판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심판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 심판을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육신으로 겪게 되는 일로 여긴다. 


요엘 3장에서는 구원을 얻은 사람을 괴롭힌 그간의 이방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어진다. 이것은 육신의 혈통으로써 어떤 민족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역사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의 전쟁도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이방민족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져야할 가치관의 전쟁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요엘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대상 역시 구원 받은 사람 안에 있었던 이방민족과 같은 자아와 자기 의로움이 구원 받은 사람 안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구원은 육신의 생명의 갱신이나 변화가 아니라 육신은 동일한데 그 육신의 하늘이자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로 바뀌는 내적 변화인 것은 틀림이 없다. 거듭나는 것을 모태에 들어 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요 3장)


그렇다면 구원 이전의 억압하던 주체 역시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 안에 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육신이 묶인 것을 구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의 삶을 주관하는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에 있으므로 구원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아간 곳은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섬기며 살던 삶이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기 전이나,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긴 세월이나 동일하게 구하고 세상의 평안과 영광과 그 가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가치를 가늠하며 갈구하던 그 갈급함이 바로 우리를 사로잡아 간 주체였고, 우리의 구원은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런 가치관과 안목과 삶의 목적에서 하나님의 의 안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을 다시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 교회에 다니지 않고 여러가지 부정을 자행하는 사람을 이방인이라 칭하고 구원이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주 정설적인 신앙관이다.


그러나 구원은 영적인 거듭남으로 생각하면서 육신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이방인이라 여기고 심판은 육신의 일에 재앙과 같은 일이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짝이 맞지 않는 논리다. 구원이 영적인 거듭남이라면 이방도 당연히 영적인 이방이어야 한다. 육신으로 사람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려면 거듭남은 모태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방은 육신으로 이방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던 세상적 가치관이다. 이것이 인정이 되지 않으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려워진다.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다른 의를 자신의 의로 삼고 살던 삶, 애굽과 같은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사느라 위로 올라가야 이긴 자가 된다는 생각에 종과 같이 사로잡혀 살던 삶에서 구함을 받아 자유하게 되는 것이 분명한 것이라면 당연히 이방과 심판의 대상도 자신을 종으로 삼았던 세상적 가치관이어야 하는 것이다.


(계속)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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