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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은 ‘심판’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로 인하여 두려운 느낌을 지우기 힘들지만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구원을 받은 사람 안에 이방의 가치관이 있다는 것은 용납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사사기와 역사서에서 보듯이 이방인의 가치관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곤고하게 하므로 이것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구원과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심판은 구원 받은 자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이전의 가치관이 유익한 것으로 생각조차 되지 않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않는, 아니 진노하시는 이방인과 같은 가치관과 안목은 완전히 처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차든지 덥든지 해야 하듯, 그 생명이 온전히 하나님의 의로 사는 생명이든지 아니면 세상의 가치로 사는 생명이든지로 구분될 뿐이다. 그게 생명의 법이다. 반만 생명인 것은 없다.


따라서 구원과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심판을 받아 소멸된다는 것은 이제 완전히 죄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다. 이방인이, 이방의 가치가,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을 좋다고 여기는 가치관과 안목이 심판을 받아 진멸되었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을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행여 누군가가 “넌 죄가 없느냐?” 물으면 답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털어서 나는 먼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지도 또 행여 어디서 좀 듣거나 읽었다고 해도 자신의 것으로 확신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삶에 대한 개념에서 심화된다. 인생이라는 것을 고난으로 여기는 것에서 시작해서, 사는 동안 자기 행위로 인하여 행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고 벌을 주시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인생을 살다가 천국은 그런 것이 없는 곳이라 기대하고 죽음을 평안으로 위안 삼기도 하는 삶의 개념이 심화의 증거다. 삶을 곤고한 것으로 여기고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으로 여긴다는 것은 삶은 곧 벌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고통은 심판 받고 벌을 받음으로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이 보시고 심판하실까 전전긍긍하면서 어떻게든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신앙생활을 채찍질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하다. 자기 공로, 성경을 지켜 행하는 공로를 하나님께 주고(드리고) 자신은 심판을 받지 않고 육신이 평안하고 세상이 좋다고 하는 성공과 바꾸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생각은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좋다고 생각하신다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설계한 우상을 섬기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세상의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 가장 밑바닥이고 저주의 자리인 십자가에 보냈을까? 하는 간단한 물음만 생각해봐도 절대로 접근하지 못할 생각이 오늘날 거룩한 신앙이 되어 있다.


종합적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가진 신앙은 인생을 곤고한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심판을 받고 있는, 심판이 끝나지 않은 신앙이고,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을 심판을 받을까 걱정하고 있다는 것에서 봐도 심판이 종결되지 않은 삶이다. 심판이 끝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구원도 없다. 이 요엘서에서도 심판은 구원 다음의 이야기로 전개되어 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정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면 구원 받은 삶에는 이방인의 가치관이 없으니 당연히 심판도 없어야 한다. 하나님께 행여 어떤 일로 심판을 받을까? 그래서 벌을 받을까? 염려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 구원의 삶이다. 그래야 비로소 심판이 끝난 삶이고 심판 이후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심판과 축복은 공존하지 않는다. 


심판이 끝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의 삶 안에는 이방인이 통행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행위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가치관을 심판하시지 아들의 삶의 요소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다. 아들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 심판의 반대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삶이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구원 받은 아들의 삶에는 이방인이 다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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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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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3:9-13) 하나님 심판의 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4. 04:00 Writer : 김홍덕

심판을 위하여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칼을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면 포도주가 넘쳐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악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찌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욜 3:13)


이러한 말씀을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특히 말씀과 영성에 밝다는 사람들은 큰 착각에 빠진다. 자신이 더 밝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또 구원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한다는 이유로 상처가 되는 말을 서슴지 않고, 거침없는 훈계를 하려 든다. 더 나아가서 그것이 그들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한다. 낫으로 베고 포도를 밟는다고 하는 말씀이 그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말씀, 그러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완성된다. 성경이 불완전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온전함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증명되고 드러나며 온전해졌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칼과 창으로 심판하고 낫으로 베고 발로 밟는 것과 같은 심판의 말씀들도 결국은 예수님이 보이신 심판으로 수렴된다. 즉 십자가가 심판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 법, 곧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법은 사람이 스스로 돌이키게 하는 법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람 안에 심기면 스스로가 옷이 아닌 마음을 찢으며 돌이킨다. 그런 고통, 스스로 참회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고 예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의 심판이다. 더욱이 이 심판은 심판하고 고통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고 분명하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을 알고, 스스로 영성에 밝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말씀을 전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행하여야 할 심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자신을 종으로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가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의로 살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스스로 심판하며 돌이키는 것이 심판의 본질이다. 그런 돌이킴을 이끄시는 분이 또한 성령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심령에 들어 갔을 때 그것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분이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보혜사 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이 모든 것을 알면 하나님의 심판의 법,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사람에게 말씀으로 훈계하거나, “너 그러면 지옥간다” 협박성 말로 사람을 치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보이신 예수님과 같이 자신도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에 빠진 사람들이 스스로 돌이키고, 스스로 심판하는 하나님의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삶을 살아내는 것이 온전한 심판이고 하나님 심판의 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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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3:9-13) 보습을 쳐서 칼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8. 3. 08:56 Writer : 김홍덕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대상인 이방에게 전쟁을 선포하라고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전쟁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의의 충돌이다. 사사로이는 개인간의 싸움이나 나라 혹은 민족 간의 전쟁은 모두 서로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과 충돌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에게 전쟁을 선포하시고 전쟁에 임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을 진멸하시겠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보습(농기구)를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고 하신다. 심판의 연장선에서 이방인에 대하여 전쟁을 하자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어서 곡식을 베기 위해서 낫을 쓰라고 하신다. 낫을 창으로 만들라고 하시고서 금방 낫으로 곡식을 베라고 하신다. 속된 말로 놀리는 것 같아 보일 수 있다.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찌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찌어다(욜 3:10 상)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욜 3:13 상)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보응, 어떤 조지, 어떤 방법으로 행하시는지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은 앞선 포스팅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동전의 앞뒤와 같이 구원과 함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심판의 일환인 전쟁은 힘으로 상대를 궤멸시키고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 심판의 본질은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낫으로 창을 만들라고 했다가 이내 낫으로 곡식을 베라고 하신 것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과 맥을 같이한다. 곡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에 낫으로 곡식을 벤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추수, 곧 목적하신 바를 달성하신다는 의미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과 같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기준이고 법이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보이시므로 심판의 기준이 세상에 제시되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이자 하나님 아들로 말씀하시는 사람 지으신 뜻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 된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사람에게 보이신 것이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법인 것이다.


심판의 기준과 법이 없으면 심판도 없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당연히 구원이 없듯,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심판의 기준도 없으므로 심판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심판은 육신의 삶에 고통을 주고, 지옥 불에 던져 영원한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가 존재의 목적대로 존재하고 살지 않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지옥이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는데 하나님께서 “네게 준 인생은 그렇게 살라고 준 것이 아니다”라는 말 한 마디일지 모른다. 육신으로 살 동안도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기억하는 것이 괴로운데 영원히 후회해야 하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다.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 이방인을 무찌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보응으로 괴로움을 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고통은 이미 스스로 받고 있는 것이 사람이다. 인생을 괴로운 것이라고 실토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았고 고난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보습이든 낫이든 그것으로 심판을 한다는 것은 보습과 낫을 든 사람이 심판의 대상을 쳐서 죽이거나 고통스럽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곡식으로 거두는 것이 심판을 말씀하시는 근원적인 목적이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집을 압수한다는 것이 집을 압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금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겠다는 것이 목적인 것과 같다. 그래서 방금 창을 만들라고 한 낫으로 곡식을 베라고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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