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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2:21-27) 하나님의 회복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26. 09:00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 안,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또 말하며 인지하고 있는 회개의 회복이 어떤 것인지 한 번 생각해보자. 이를 위해서 먼저 사람들이 회개를 이야기하는 동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건강이 나빠지거나, 사업이 잘 되지 않거나, 예기치 않은 불행한 일이 생기면 ‘혹시 하나님께 잘못한 것을 인함인가?’ 생각한다. 그것은 주변 사람도 그렇고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회복은 당연히 육신의 일이 회복되는 것일 것이다.


사업이 잘 안되는 것을 인하여 이전에 게을리했던 것을 돌이켜 회개하고 새벽기도회도 나가고, 예배도, 봉사도 더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께서 사업을 회복시키셨다는 프레임과 같을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모순이 있다. 자신이 추구하던 것은 바뀌거나 포기하거나 그만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자기 죄로 인함이라 여기고 돌이키는 것은 추구하는 바에 대하여 더 간절해지는 것이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재앙이라 여기시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가까운 것인데, 반대로 하나님께 멀어진 것이라 여기며 하나님께 행위를 회개하고 추구하는 바를 더 잘 이루어 주시길 바란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재앙이나 죄로 인한 하나님의 경고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것 그 자체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와 반대로 가기 위해 추구하는 재앙이다.


그런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회복은 다음 아니라 재앙의 증폭이다. 자신이 추구하던,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나 하나님의 의에 반하고 제사와 인생 존재의 목적인 그리스도 없는 것이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을 회복이라 여기니 그것은 더 큰 죄고 재앙의 증폭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회복은 그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은 메뚜기 떼로 인한 재앙을 굶주림이나 황폐함에 두시지 않고, 제사가 끊어진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 보자.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욜 2:24)

여호와의 날이 임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회복되는 것이 육신의 성공과 평안의 회복이 아니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 자신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사람들 사이에서 짜증과 화가 나는 것, 그리고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솔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사업과 건강과 평안과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추구하는 여정의 성공을 구하면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고 있다면,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나의 몸이 더 수고해야 하는 것이 짜증스럽다면, 나의 이익에 반하거나 손해를 인하여 사람에게 화를 내고 낙심하고 있다면 그 인생은 요엘이 말씀하시는 메뚜기 재앙에 속한 사람이다. 그 삶에 하나님의 양식과 그리스도라는 포도주와 기름이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낙심을 돌아보아 자기 <행위>를 고치고 그 보응으로 하나님께 자신들이 추구하는 메뚜기 재앙을 더 추구하고 그것의 회복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날이 임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들의 회개는 본질이 아니라 행위를 돌이킨 것이다. 옷을 찢은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신앙은 한 마디로 외식하는 신앙이고,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이며 행위를 의롭게 되려는 성공할 수 없는 신앙이다. 정말로 여호와의 날이 임한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안 되는 것이 자기 죄로 인함이 아닐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한 모든 것이 재앙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세상의 평안을 추구하는 자신에게 그 추구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고 늘 장애가 있고, 오히려 손해가 나는 것이 자기 죄로 인함이라 여기며 돌이키는 사람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 자체를 돌이킨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더 좋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그 자체가 죄며, 재앙이며, 메뚜기 재앙이라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면하시는 회개와 돌아오는 것은 추구하는 자체를 바꾸라는 것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 때로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회 칠하기도 하는 그것이 재앙이고 멸망이라는 것을 깨닫고 추구하는 바를 바꾸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의로 여기며 그 길에서 서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추구하는 것이 더 풍성해지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높고 이긴 피라미드 위로 갈 것이 아니라 세상 가장 낮은 십자가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이 돌이킴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다는 것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상의 이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식과 포도주와 기름이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라는 정체성과 신분이라는 말씀이다.


즉 세상이 추구하는 것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행위로 인한 죄로 인함이라 여기고 회개하면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 여기는 것은 회개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진정한 돌이킴과 회개는 메뚜기 떼와 같은 세상의 허다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을 그만 두고 돌아서는 것이며, 그 회복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인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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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2:12-20)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24. 11:15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상세보기


성경은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 속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벗어났다는 기본적인 정의(定義)와 배경이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언제나 사람이 하나님께 돌아오라 하신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교회에서 그렇게 많이 들었던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이 어디로 돌아오라는 것인지 얼마나 생각해 봤을까 싶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살아가도록 육신의 삶을 드리는 제사이자 순종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인데 과연 얼마나 그것을 생각해봤을까 싶다.


그런 맥락에서 아주 짧은 이 요엘도 결국은 그 주제 안에 있다. 메뚜기 재앙, 곧 사람이 자기들이 좋다고 세를 이루어 추구한 인생이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라시고, 자신이 재앙에 처했다는 것은 정말로 어둡고 캄캄한 상황이나 바로 그때가 여호와께서 임하시는 날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자리, 자신의 의와 인생이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난 재앙이요 어둡고 캄캄한 곳이라는 것을 탕자와 같이 알았다면 그 다음은 정해진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비로소 성경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이 들리고 자신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알기 시작하는 인식, 곧 빛이 비취기 시작한 태초의 시점이기도 하다.


사실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결정하는 것은 일생 일대의 결정이다. 교회에 다니다 보니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말이 익숙하고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일생 일대의 사건일 뿐 아니라,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던 것,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재앙이었음을 인정하는 다음 스텝인데 그것이 교회에 등록해서 교리문답에 “예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이것은 사실 표현 그대로다.


살아온 인생이 전쟁 속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감옥에 갈 만한 일을 저지르거나 큰 상해나 사건 뿐이었다면 그나마 자기 삶이 재앙이라고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겠지만 그 정도가 아닌 삶을 살았는데 진심으로 그것이 재앙이었다고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 회개고 돌이킴이다. 그것이 교리문답에 답하는 것으로 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것이면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사기’일 뿐이다.


요엘은 말한다. 거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진리고 선이면 보편적 상식이고 도덕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겼던 지난 날의 자신의 삶이 재앙이었고 진정한 어두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옷을 찢으면 풍기문란이 되니 옷을 찢지 말라고 하심이 아니다. 옷은 형식이고, 자기 신분이다. 즉 자신이 세상의 가치를 좇아 성취한 것의 상징이 옷이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이다. 본질은 자신이 입은 옷이 상징하는 것을 추구한 자기 마음이다. 그 옷을 입기까지 자신이 옳다고 추구한 뿌리인 본성이 본질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성경을 기본적으로 ‘육신의 정욕’이라고 한다. 그리고 요엘은 그 육신의 정욕을 대부분의 사람이 추구하니 메뚜기 떼로 말씀하고 있다.


결국 옷이 아닌 마음을 찢으라는 것은 자신의 의, 자기 본성,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추구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재앙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삶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음을 찢은 사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고 생각하는 것이 재앙이라 여기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삶을 보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하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말로 모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은 항상 옳은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시끄럽고 갈등할 뿐 아니라 전쟁도 한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다툼만 봐도 그렇다. 교회가 분열 될 때, 또 서로 싸울 때 그 어느 한 쪽이 자신들을 마귀라고 하거나 잘못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서로 옳다는 것이 충돌해서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부부의 이야기고, 친구들의 이야기고, 삶의 이야기고, 사회 계층 간의 이야기다. 그만큼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삶의 대 전환적인 일이라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교회에 등록하고 교리 문답에 답하고 열심히 해서 집사, 권사, 장로가 되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 과정도 알고 보면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좇는 궤도 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구분이 되지 않는 사람은 바로 빛이 없는 어두움에 속한 자식들이다. 이것이 보인다면 예수님이 빛으로 온 사람이고, 태초에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한 빛이 비췬 사람이다. 그러나 메뚜기 떼와 같은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삶의 모양과 행동을 바꾸는 것인 옷을 찢은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마음을 찢은 사람이 정말로 흔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옷이 아닌 마음을 찢으라고 하신 것을 예사롭게 보면 안 된다. 이것은 인생을 바꾸라는 말씀이다. 자신의 의가 바뀌는 것이 곧 인생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옳다고 여긴 것,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기에 좇았던 것들이 재앙으로 보이는 사람이어야 이 말씀대로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옳은 것이며, 바른 인생이라 여기며 위로하고 추구하는 삶이 재앙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그 어둡고 캄캄한 날이 바로 여호와의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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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2:1-11) 세례 같은 여호와의 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22. 08:41 Writer : 김홍덕

메뚜기 재앙은 한 마디로 세상의 가치를 좇아가는 신앙이 가져온 영적 소멸이다. 높아지고 이기는 것을 선과 성공으로 삼는 사람들의 수가 절대적이기에 메뚜기 떼로 비유되고, 그들의 가치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양식으로 여기는 열매와 소산이 없는 무의미한 것이며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신앙이기에 하나님이 보실 때 제사가 없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 메뚜기 재앙이다.


이 메뚜기 재앙이 의미하는 것, 곧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사실 늘 있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 임하는데 그것이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 중에 있는 일이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세상의 가치를 좇아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영광과 은혜로 믿는 대중적이고 보편적 신앙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신앙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성경은 거듭난 사람은 온전하며, 죄가 없고, 예수님은 형제라, 같은 생명이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음에도, 거듭 났다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달리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을 정설로 믿고,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양심을 가졌지만 다들(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 매일매일 경건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말로 위안 삼아 보지만 조금만 양심이 있으면 그것은 열매와 제사가 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여기며 왔는데 그 안에 열매가 없음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 자신의 모든 빛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의지한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기 세상의 종말과 같은 것이기에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구하던 모든 것이 메뚜기 떼가 다 먹어 치운 재앙 같이 자신이 믿던 모든 것이 사라진 상황이 어렵다고 포기하게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슬퍼하라고 명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말로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마음을 좇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하는 것을 좇았지만 그 안에는 열매도 제사도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진실했다면 하나님께서 슬퍼하라고 하시지 않아도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자기 세계의 종말과 같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고, 창조주며 주관자인 사람에게 그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하나님이 열매로 여기시는 것과 제사로 여기시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그것은 세상이 무너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고, 성경의 종말론은 기본적으로 이것이다. 따라서 요엘서의 어둡고 캄캄한 날 역시 그 종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 더 많은 사람이면 더 옳다는 것을 좇았는데 그 속에 과실과 포도주와 기름이 없다는 것이 메뚜기 재앙이고, 자신이 옳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메뚜기 재앙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부인하거나, 더 열심히 하려 하지 않고 지난 시간 동안 자신의 신앙이 열매도, 그리스도라는 포도주와 기름도, 제사도 없는 신앙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의지하던 것의 종말을 맞이하는 어둡고 캄캄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종말을 맞이하는 경험이 여호와의 날이 시작되는 은혜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을 좇았는데 그 안에 열매가 없고 제사도 없음을 알았다는 것이 재앙이고, 그것이 재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 세계가 무너지고 자기 세계의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한 빛, 곧 해와 달이 어두워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날이 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반전은 요엘서만의 말씀도 아니다. 성경 전반이 그렇고, 창세기, 곧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될 때도 그랬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하나님의 세계는 흑암과 혼돈 가운데서 시작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사람의 이런 여정을 아주 많이, 그리고 때론 아주 깊게 다루고 있다. 가장 먼저는 창세기 1장 2절, 곧 하나님 세계의 시작이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의 여정에서도 요단강 앞에서 실망하는 것이 그것을 예표하고, 많은 성경에서 하늘의 해가 어두워지는 일로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언급하심이 그러하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종말을 말씀하시면서 “그러나 이것이 시작”이라고 하신 것이 확정적이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 23:24-26)


그리고 이런 여정의 깊이를 욥을 통해서, 또 십자가로 가겠다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극심한 갈등을 통해서 심도 있게 말씀하시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으로 볼 때 사람은 자기가 의로 여기고, 자기 기준으로, 또 세상의 다수가 가진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던 세계가 어두워지고 캄캄해지는 종말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의 날과 하나님의 세계를 온전히 만날 수 없다. 즉 자기 의와 자기 가치관이 다 처리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뼈대 중 하나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출애굽의 여정이다. 끊임없이 자기 주장을 펼치고,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하던 마음을 모두 광야에서 처리하고서야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예식으로 나타난 것이 세례다. 죽고서 다시 사는 것을 예표하는 세례는 사람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이 있을 수 없는 자리에 있을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라는 말이다.


어둡고 캄캄한 날이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은 세례와 같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이라고 하려면,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려면,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곧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여 낮은 곳으로 가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나는 제사가 없는 신앙은 사람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인정하면 어둡고 캄캄한 날이 되겠지만 물에서 나오면 거듭난 생명이 되듯 그 어둡고 캄캄한 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날이 임한 것이라는 것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한다고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특히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내용이 피라미드의 위로 가는 것, 많고 크고 이기고 위대한 것을 좇는 것이라면 그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린다고 해도 그 결말은 메뚜기 재앙과 같이 열매도 제사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여호와의 날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호와의 날은 어둡고 캄캄할 뿐 아니라 큰 군대의 침략과 같이 삶의 모든 것을 앗아갈 것 같은 괴로움이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신이 의지하고 의로 여겼던 것이 재앙이었음을 알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은 회개로 이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지난 날 자신이 메뚜기 떼와 같은 것을 좇아 재앙과 종말을 맞았다는 것을 회개하고 돌이키므로 만나는 여호와의 날들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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