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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ginning - 하나님세계의 시작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6. 7. 20:27 Writer : 김홍덕

이 카테고리에서는 출간된 <질그릇의 선택>을 매주 한 장씩 올립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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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ginning - 하나님세계의 시작


일반적으로 The Beginning(창세기)은 물리적 세상의 시작에 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물리적 세상이 어떤 모양이나 상황이든 아무 의미가 없다. 결국 어떤 사건이나 생각이나 상황은 인식되는 사람에게만 시작 된다. 한 개인으로서 마주했던 그리고 또 마주하게 될 크고 작은 사건이나 사람과의 관계의 시작이 The Beginning이다. 어제까지 무슨 생각을 했든 오늘 마주하는 것들로 인해 끊임없이 어제와 다른 시작이 있다. 새로운 등급의 학교를 진학하는 것도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The Beginning이고 연인과 시작하는 사랑도 그렇고 결혼과 취업과 같은 일은 말할 것도 없다.


신앙도 그렇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 The Beginning이다.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다. 언제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과거의 어느 시점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 말하고 달력을 보듯 객관적 시간 개념으로 창세기의 시점을 논하는 것이라면 창조가 있던 이전 시점의 시간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야 한다.


무엇보다 이 장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 내가 태어나서 살고 있지 않다면 천지창조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성경을 묵상하는 우리에게 창세기, 곧 시작은 하나님과 의미 있는 관계가 시작되는 The Beginning이다.


그러므로 천지가 창조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사건이다. 하나 님과 개인적 관계의 시작이다. 나의 시작 이전에도 하나님의 세계는 있었고, 죽고 난 다음에도 항상 그리고 영원히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The Beginning은 육신으로 나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에 순종하면서 시작된다. 그것이 하나님 세계의 시작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게 된다. 반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세계 밖에 거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성경은 쫓겨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악과를 먹고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 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니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없으니 만족의 동산인 에덴에 거할수 없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쫓겨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항상 있다. 항상 있는 하나님의 세계에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고 인식하면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세계가 성경의 시작이고, 신앙의 시작이다. 하나님 경영의 일환으로 삶을 부여받은 인생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법이 자신에게 인생을 주셨다는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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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1-7) 메뚜기 재앙의 본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7. 11:59 Writer : 김홍덕

요엘서는 메뚜기 재앙으로 시작된다.

그 재앙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런 일이 열조에게나 이 일을 당하는 세대나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신다. 특히 이 일에 대하여 늙은이를 언급한다. 늙은 사람이란 나이로 늙은 사람이 아니라 과거를 가진 사람이다. 미래보다 과거를 많이 가진 사람이 늙은이다. 


과거를 가진 늙은이라는 특정한 부류를 지정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메뚜기 재앙이 경험되지 않은 놀랍고 심각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땅에 거하는 거민들도 늙은이와 함께 이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 것은 이 땅에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강조하시는 메뚜기 재앙을 이야기 해 보자. 이것이 요엘 선지자 시대 어느 날에 팟종이, 메뚜기, 황충이 하늘을 덮듯이 날아와 모든 식물을 먹어 치운 한 사건에 관한 것인가? 


만약 그런 병충해 같은 하나의 재앙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일을 이방 열국에게 갚으시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요엘 3장에서 말씀하시는 회복의 내용은 제사와 포도주를 회복하는 것인데 그것을 이방을 심판하고 찾아 오시는 것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메뚜기 재앙의 결과, 즉 메뚜기 떼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를 상하게 하므로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수 없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제사, 곧 하나님 섬기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심에서 이것은 단지 농사를 망친 재앙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메뚜기 재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메뚜기는 <요엘서의 구조와 주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중다함의 상징이다. 홍수와 비슷한 개념으로 특히 구분된 각각의 개체가 셀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수를 상징한다.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보면 <과반수>의 힘과 같다.


바로 많은 교단, 교파, 교회와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교세를 가지고, 그 수를 가지고 자기 신앙의 선하고 온전함을 치장하는 모습이 바로 메뚜기 떼와 상관이 있다. 생각해보면 정통과 이단을 다루는 것도 신앙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 수의 중다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순복음 교회가 이단에서 벗어난 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정통이라 주장하는 신앙인들이 쉬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의 많고 적음이 온전한 것이 되는 것은 비단 정통과 이단의 논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교단이나 종교 자체의 온전함이 교인의 수로 결정되듯, 개별적 신앙 역시 많은 수가 믿는 신앙에 속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자신의 의가 옳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신앙이라 믿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믿고 싶은 것이지 믿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란 이해되지 않는 것을 신념을 가지고 가능할 것으로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 해도 너무 분명한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특히 믿음의 근원이 자신 안에 있는지, 아니면 밖에 있는지는 결정적인 요소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사람의 죄를 사하는지 이 시대적 상식이나 과학으로 이해되지 않으면서 단지 자기 밖에 있는 <다수의> 신학자가 말하는 것을 신념으로 믿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십자가로 자신을 끌고 가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어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부인할 수 없게 된 상태가 믿음이다.


그것은 나 이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지가 믿음의 근원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때에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가 누구인지 안다면 네 속에서 생수가 넘쳐 날 것이라고 하심을 상기해보면 수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어떤 본성이 있느냐의 문제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근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생수가 넘치듯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말씀이 넘쳐나고, 죽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로 끌고 가는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어쩔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며, 다시는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 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다는 고백을 자아내는 영이 자기 안에 없으면 자신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에 속해 있다고 해도 소용 없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을까? 좁은 문은 큰 문과 좁은 문 두 선택을 마주하면 좁은 문, 근거도 없이 적은 사람이 가는 것을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많은 곳, 메뚜기 떼와 같은 중다함과 대중성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메뚜기 재앙은 다름이 아니라 대중성, 과반수와 같은 수의 논리를 신앙의 근간으로 삼는 것이 가져오는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엘서가 말씀하는 메뚜기 재앙의 폐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단서다.


사람들이 의지하는 대중성과 과반수와 같이 넓은 문 너머의 의는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한다는 것이 메뚜기 재앙의 본질적 의미인 것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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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서를 시작하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6. 6. 10:15 Writer : 김홍덕

29번째 성경인 “요엘”은 3장으로 구성된 짧은 소선지서다. 저자는 요엘이고 그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요엘에는 메뚜기 재앙과 성령 곧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겠다”는 말씀 그리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유명한 구절과 말씀들이 있다. 메뚜기 재앙 이외에는 복음송으로 불리고 있어서 “그게 요엘에 있어?” 라고 할 수는 있어도 한 번씩은 들어본 말씀들이다. 특히 성령을 강조하는 교회나 단체에서 “나의 신을 부어 주리니…”라는 말씀을 많이 인용한다.


그러나 이 요엘서는 사실 메뚜기 재앙이 핵심이다. 메뚜기 재앙으로 없어진 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이 요엘서다. 요엘서는 1장에서부터 2장 중반(11절)까지는 메뚜기 재앙과 관련된 말씀들이고, 다음부터 2장 끝까지는 여호와께 돌아오면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약속의 말씀, 그리고 마지막 까지는 심판과 회복에 관한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유심히 보아야 하는 것은 메뚜기 재앙이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에 대한 선지자들의 경고는 이방 민족의 침략이 주를 이루었고 아니면 가뭄과 같은 것인 점과 비교하면 이는 다소 특이한 점이다.


이 메뚜기 재앙은 두 가지 핵심적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중다함(수가 많은 것)과 메뚜기가 먹어서 없앤 것이다. 메뚜기 떼는 홍수와 함께 사람들에게 어찌할 수 없는 많은 수의 엄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많은 것이 엄습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메뚜기가 먹어 치운 것에 관하여 포도나무와 감람나무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밀과 곡식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 중에서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를 지정하여 언급하고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메뚜기 재앙의 결과로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메뚜기 재앙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가져간 이방인들과 동급으로 말씀하시므로 이방인들이 가진 가치관이 하나님의 귀한 것을 가져갔다는 뜻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그런 일이 마치 욥에게 마귀의 시험을 방치하듯 하신 듯한 말씀을 하시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주목은 오늘 우리에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어떤 이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경고의 대상이 되는 신앙이나 삶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고, 아주 적겠지만 어떤 이들, 곧 하나님의 신이 임한 이들에게는 세상을 보는 안목을 밝게 하므로 삶에 평안과 만족과 감사를 주신다는 의미다.


오늘 우리가 이 요엘서를 성경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도 그 일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제 길지 않지만 대중성에 매몰된 신앙 가운데 있는 오늘날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묵상해보도록 하자.


질그릇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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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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