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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의 선택>이 출간되었습니다

Category : 출간 서적 소개 Date : 2020. 5. 15. 14:18 Writer : 김홍덕

<질그릇의 선택>이 출간되었습니다.

(5월 22일부터는 교보, 영풍문고 등 일반 서점에서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왜 만들어서 

사람이 타락하게 되었는지 예전에 아주 궁금했습니다. 

아마 많은 독자분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우리 육신의 삶을 성경으로 재조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육신의 삶은 선악과와 불가분의 관계이고, 

우리가 이 육신의 삶을 어떻게 인지하느냐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범죄에 대한 후속조치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천지창조의 과정이고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계획이라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질그릇과 같은 이 인생이 살 동안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분명하게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육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하여 

선악과와 육신을 보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점,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까지 설명하였습니다.



많은 구독을 바라고, 

신앙에 대하여 고민하는 주변인들에게 전해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책은 주요 대형 서점에서 구하실 수 있고,

인터넷으로 구매도 가능하며 전자책으로도 구매 가능합니다.


구입하시는 방법

1. 인터넷 주문 : 여기를 클릭하세요

2. 네이버에서 "김홍덕"을 검색하시고, "책"을 클릭하시면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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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The Beginning
하나님 세계의 시작
하나님이 살았다고 여기는 것
빛이 있으라

육신
생명 있는 사람
두 종류의 사람
정체성을 잃은 육신
지시할 땅, 약속의 땅
호흡 있는 육신
육신을 보는 첫 번째 관점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
두 번째 관점의 뿌리
무화과로 가린 육신의 부끄러움
선악과
율법주의
영지주의
스스로 정죄하는 인생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선악과와 육신
관점의 회복
육신의 희생
감사

죄(罪)
구원과 죄사함
하나님이 보시는 죄
법이 바뀌어야 만족
행위규범 vs. 존재규범
행함 없는 믿음
행함은 생명의 본성으로부터

구원
구원의 시작
성경 속 구원의 여정
떠나야 하는 자리
떠나야 하는 시간
거듭났다는 것
구원과 율법

믿음
믿음은 수동적인 것
제사와 순종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순종이 가장 온전한 믿음
주가 쓰시겠다
신념 vs. 믿음
손으로 빚은 하나님
증거를 받은 믿음 vs. 약속을 받은 믿음

십자가
십자가의 섭리
십자가의 본질
십자가의 의미

질그릇의 선택
선택의 대상
선택의 실체
이제 선택하는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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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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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당하신 능욕을 함께 지고 영문 밖으로 가자는 것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영문 밖으로 상징되는 세상, 그 세상의 가치관 앞에 나를 내어주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이라는 것을 앞서 설명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이 악하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성도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삶을 영위하려는 것은 영문 안에 거하고 예수님과 같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은 수치를 당하지 않겠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 안에 없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다는 것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의미며, 그것은 하나님 아들이 아님이 들통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 곧 하나님 아들인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할 도시는 이 땅에 없고 올 것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끼리 별도로 모여 사는 공간을 이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일 뿐 아니라, 이것을 아는 세계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희생을 믿는 믿음을 가지면 알게 되는 영문 밖으로, 세상의 가치관에 나를 내어주는 세계에 속하게 되는 것을 소망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소망에 기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자는 권면을 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연결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려면 그 내용이 자신에게 감사하고 기쁜 일이어야 한다. 내게 기쁜 일이 아닌데 감사하라고 하니 감사하는 것은 외식이고 기만일 뿐 아무 이익이 없다.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는 존재가 되려면 예수님의 일이 자신에게 기쁨이어야 한다.


그러면 히브리서가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신 일이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한 일이다.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기쁜 찬미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 기쁘고 감사한 일이어야 한다. 이것은 나도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기쁘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데 남의 고난을 기뻐한다는 것은 아주 고약한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항상>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항상성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언가 꾸준하게 계속 행한다는 것은 그렇다. 성경에 나오는 ‘항상’이라는 개념의 주체를 행위에 두면 그렇다. 그러나 행위가 아니라 존재 정체성이라면 다르다. 사람은 항상 사람이고, 아들은 항상 아들인 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 생명의 말씀이고,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고 기대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알면 이 <항상>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왜 주저함 없이 사용되는지 알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어떻게 하면 <항상>이라는 말씀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면 성경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도 모르는 것이고, 모든 말씀이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임도 모르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드러나는 절대적 좌표가 바로 십자가다. ‘항상’이라는 것을 행위의 연속성과 지속성으로 보는 사람들은 행위를 본질로 보기 때문에 죄도 행위를 기준으로 심판하고, 그 사함도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내가 지은 죄(행위)에 대한 벌을 예수님께서 고난이라는 행위로 대신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인생의 존재 정체성을 보인 것이라는 것이 보이면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항상>이라는 것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가 되면 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사람이 세상의 많은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만 늘 실패할 뿐 아니라 종국에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 존재, 즉 자신의 존재의미와 삶의 목적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고서 보면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고, 그 목적에 합당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시기 위하여 육신을 드리신 예수님의 희생에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자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은 단순하게 하나님은 위대한 신이니 찬미하자는 것이나, 추리가 행위로 지은 죄들에 대하여 예수님을 보내사 대신 벌을 받게 하신 그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자는 말이 아니다. 백 번 물려 예수님의 희생이 우리 행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은 구속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삶이 죄가 없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찬미하자는 것은 우리의 존재 정체성을 회복하게 하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말씀이다. 그런 존재가 되자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내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일 뿐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까지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 분명히 보이면 그때부터는 굳이 하나님을 찬미하자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찬미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보인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가서 세상의 가치에 나를 내어주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되면 그때는 도리어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 해도, 예수님과 달리 하나님 아들이니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으로 대접 받으려 해도 되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소망이고, 그 소망에 자신을 순종하고 맞추어 가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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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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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은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으로 예수님의 온전한 제사를 믿는 삶을 권면한 모든 주제를 마무리하고 있다. 여기에 자시 한 번 제사와 특별히 제물에 대한 말씀이 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고, 그 제단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먹을 권한이 없다는 것과 그 이유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는 제사의 규례에 관한 것인데, 일반적인 번제의 경우 제단에 태운 제물 외에는 장막에 종사하는 이들이 먹을 수 있지만,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면 그 육체는 먹지 못하고 모두 불사른다는 대속죄일의 규례(레 6장)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영문 밖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과 연결하고 있다. 


이는 대속죄일과 모든 속죄의 제사는 예수님의 희생을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레위기가 앞에 있으니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의 희생이 먼저고 모든 제사는 그 예수님의 희생을 예표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느니라”하신 말씀을 상기해보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말씀을 히브리서의 마지막에 인용하면서 이 말씀을 읽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하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성문 밖, 예루살렘 밖은 신앙의 영역 밖으로 인지된다. 이방인들의 세계나 정결하지 못한 이들의 자리로 인식된다는 의미다. 문둥병이 들면 성문 밖으로 나가 있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이것을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바로 <세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영문 밖으로 가자는 권면은 결국 세상으로 나가자는 말씀이다.


이것은 갑자기 등장한 말씀이나, 급격한 흐름의 전환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가치관은 세상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에 예수님이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세상은 언제나 이긴 자, 경쟁에서 이겨 높은 곳에 올라 간 자가 선한 자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가치로 이겨서 왕이나 영웅과 같이 높고 화려한 모습이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로 인하여 예수님이 능욕을 당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 자신을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골고다라는 십자가의 자리가 성문 밖이라는 외형이 본질이 아니라, 바로 그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자는 말은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를 지자는 의미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최종적인 모습이다. 신앙이 여기서 끝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우리 삶의 시작이고 그 삶이 우리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 자기 육신을 내어 주신 사건이 십자가다. 그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가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삶이 되자는 말씀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본질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세상의 가치 앞에 예수님이 자기 육신을 드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자신을 드리니 그 드린 모습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아들로 드러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이 하나님의 의가 형식이 된 것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의미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라는 형식이 된 것인데, 그 육신이 깨어지니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므로 아들임이 드러났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육신 가진 사람을 조성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이자 사람을 지은 목적은 세상의 가치 앞에 자신을 내어 줄 때 나타나는 것임과 동시에 높아지고 이긴 자가 선하다는 세상의 가치 앞에 수고하고 제물로 내어주는 그 자체이다. 그것이 우리 존재의 목적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세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나를 내어주는 자리로 가야한다. 그곳이 바로 영문 밖, 곧 세상이다. 세상으로 가야 세상의 가치에 종이 될 수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가질수록, 예수를 믿을수록, 또 자기 영성이 높아졌다고 여길수록 세상에서 멀어지려 한다. 따로 모여 살아야 한다며, 산이나 깊은 곳에 공동체 공간을 만들고 들어가서 살려고 한다. 세상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과 멀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세상에 자기 아들을 보내신 분이다. 그리고 그 세상의 가치관 앞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그 예수님을 따르고 섬기겠다는 것이 기독 신앙의 목적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문 밖으로, 세상으로 가서 그 악함 앞에 자신을 내어 주셨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이 악하지 그것을 멀리하겠다고 따로 자기들끼리 모여서 있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대속죄일에 제단 위의 것을 먹을 권한이 없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며, 서로를 먹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 앞에 나를 내어주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라는 의미다. 성도들끼리는 그 삶을 서로 위로하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삶이 온전한 것임을 서로 보증하는 것이지,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가 나서서 “내가 세상의 종이 되겠노라”할 것은 아니다. 예수님도 끌려 간 자리를 사람이 용기 있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있으니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나 그것은 예수님 곧 하나님 아들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성,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가려는 군병 앞에 순순히 끌려가신 그 그리스도의 본성이 우리를 당연히 영문 밖으로 끌고 같다. 따라서 자신의 삶이 자기 의도와 달리 늘 세상의 주장 앞에 종이 되는 모습에 순종하는 모습임을 보게 되면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세상이 악하니 그것과 분리되려 하고, 세상과 격을 지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그 악한 세상에 속해서 살면서 그 세상의 가치가 나를 끌로 가고, 종으로 삼고, 내 육신의 수고를 요구할 때 내 안에 본성이 순종하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이 진정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을 힘 입어 온전히 예수님과 같이 거듭나 그에게 나아가자는 히브리서의 권면의 기반 위에 이 말씀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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