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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라는 것은 삶에 필요한 것을 구하고 거래하는 기본이므로 이것을 멀리하거나 천히 여기면서 살기는 어렵다. 그런 돈을 사랑하지 않으려면 삶에 대한 관점과 가치가 바뀌어야 한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돈이라는 것은 삶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돈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과 부유함과 같은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한다. 심지어 하나님께 그것을 구한다. 가장 어이없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신분인 죄인, 그 중에서도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그 성공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돈을 사랑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돈, 돈, 돈을 입에 붙이고 살거나, 자식이나 모든 것보다 돈이 좋고 귀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하는 줄로 알지만 실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알고 그 세계에서의 안녕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표현된 것이고, 형식은 본질을 나타내는 도구이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본질은 모르면서 수단에 매인 것이 바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당연히 본질이 아닌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과 짝이 되어 있다. 돈은 그 자체를 주체로 두고 그것을 사랑할지 말지 어떤 조치를 취하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삶의 모든 필요를 구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를 모두 합하여 생각해보면 본질이 아닌 것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사랑하고 추구한다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따른 것이다.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간음하는 것과 같아서 자기 짝이 아닌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돈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은 어디까지나 목적을 이루고 유지하는 수단이고 도구일 뿐이다. 나타난 것이지 보이지 않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질 아닌 것을 사랑함이 가진 절대적인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의 예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듯 돈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만족이 없다. 결국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만족 없는 삶의 전형적 모습이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는 사람은 삶의 근본이 만족스러운 사람이다. 돈이나 권력과 같이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아닌 수단과 도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함이다. 그런데 그 추구함에 만족이 없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 존재의 목적과 의미가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지만 사람들이 믿음이라는 밝음이 없으므로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의 존재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돈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대응되는 어떤 것을 사랑하고 만족하면 다른 것에 관심이 없지만 세상의 것들은 영원히 그렇지 않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하지만 생명 세계는 다르다. 양으로 나면 고기에 관심이 없고, 사자나 호랑이는 고기를 추구한다. 이는 생명의 본성이 가져오는 온전함이다. 돈을 사랑치 않고 만족하는 사람은 마치 육식동물이 채식동물로 거듭난 상태가 된 사람이다.


세상에서 나서 살면 누구나 돈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찾는 것은 결국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인생의 목적을 보이신 예수님의 희생이 자신을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셨음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 보면 자신은 하나님이 주신 존재의 목적 안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


온전한 삶의 목적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생으로 사는 목적과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이 만족인 것이다. 이는 에덴동산의 일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있을 때 사람은 에덴 동산 곧 만족의 동산에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떠나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삶의 자기 것으로 훔치고, 주인이 되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목적 밖의 자리로 가니 에덴에서 쫓겨났다. 만족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는 말씀이다.


그렇게 목적이 분명하게 되면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찾아 수단이 된다. 그러면 많은 것이 정리된다. 돈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 목적으로 사는 삶의 수단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 돈을 사랑하고 추구하느라 돈에 매이고 종된 삶이 역전되어 돈이 자기 삶의 수단으로 바로 잡히게 된다.


결국 인생이 자기 존재의 목적 안에 거하는 만족이 있어야 돈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다. 모든 사람이 평생을 들여 얻고자 하는 인생의 목적을 아는 것은 육신에 관한 모든 것으로 찾고 추구하는 것인데 그것을 회복한 사람은 만족이 있고, 이때껏 삶의 의미를 찾고자 추구하고 사랑했던 모든 것은 자신에게 의미를 주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는 믿음이 절로 굳건해 진다. 목적을 가지고 나를 조성하진 전능한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위한 것을 준비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고, 무엇보다 창조하신 목적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 전능자가 그 필요를 예비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목적대로 거듭난 사람을 하나님이 떠날 리가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큼 귀한 존재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는데 그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당연히 만족이 있고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 즉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께, 세상의 패자가 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구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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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3:1-6) 돈을 사랑치 말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5. 6. 04:00 Writer : 김홍덕


간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것이 아닌 것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삶는 것을 말한다. 이는 육신으로 자기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의 관계를 간음이라고 하듯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라는 당연한 자신의 짝이 아닌 것과 관계를 형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간음이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라면 돈은 수단에 관한 것이다. 수단은 목적에 부속된 것이다. 목적이 본질이고 수단은 목적을 이루는 것을 위한 필요일 뿐이다. 그런데 목적의 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분히 나타난 것을 본질로 보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한 행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는 뜻이다. 즉 도구인 돈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돈을 도구로 삼는 사람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된 분에게 일은 그 육신으로 사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일은 돈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면 그 육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것이 먹고 입는 문제다. 이것은 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제법 많은 말씀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 단연 으뜸은 아무래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우선 이 말씀과 히브리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과의 연관성을 보자.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목적보다 수단이 본질이 되면 안 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당연히 이것과 궤를 같이한다.


예수님께서 먹는 것과 입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라는 신앙 근간의 문제다.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사람과 세상을 지으셨으니 그들이 하나님이 계획한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다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만든 물건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 자동차에 무엇이 필요한지 모를 리 없고, 자동차를 사서 운행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안다면, 아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만 믿어도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하므로 돈을 사랑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무능이고, 알면서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간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정한 목적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말씀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은 간음도, 돈을 사랑하는 것도 자기 것이 아닌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 관점에서 간음하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들어오면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또한 학대 받는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목적대로 회복되기를 권면하고, 회복되었을 때 어떤 삶의 모습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회복된 모습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육신을 자기 옳다는 주장 앞에 내어 주니 하나님의 아들임이 드러나는 모습에서 우리 육신이 사람들의 주장 앞에 수고를 내어 주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는 만드신 목적이다.


이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된 모습, 예수님의 십자가의 본질이 자기 본성이 된 모습을 생각해보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대가 옳다고 하는 것, 상대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 귀찮고 모두가 몸을 쓰기 싫어하는 것에 자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삶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 더욱이 그 모습이 신념이나 노력이나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인하여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 어느 부분이 성경을 어길 수 있을까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예로 보자. 이웃을 위하여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이 보다 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까? 그것도 본성으로 인한 것이라면, 본성이 그를 그렇게 살게 만들기에 진동치 않고 늘 그렇게 살면서도 그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사는데 성경의 어떤 부분을 어길 수 있을까?


그렇게 예수님의 희생을 담대히 믿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성경의 많은 권면들, 거듭나지 않은 관점으로 보면 “~~을 하라”로 보이는 그 말씀들은 육신이 자라면서 하나씩 역량이 늘어가듯 자기 삶에서 성경의 권면들이 더 깊고 넓고 다양하게 행하게 된다. 그것을 성경은 장성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자라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자라고 장성해지고 항상 하는 것이기에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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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권면은 혼인에 관하여 이어진다. 성경이 말씀하는 혼인과 성은 단지 육신의 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당연히 간음이라는 것도 육신의 간음에 관한 것이 본질이 아니다. 간음이라는 것은 단적으로 자기 짝이 아닌 것과의 관계다. 이것은 육신의 성적인 상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존재에게는 간음이 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한 식도가 흉기로 사용되면 그것도 일종의 간음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이 간음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일상의 범죄를 기반으로 생각해봐도 사기를 포함하여 도둑질과 같이 경제적인 부도덕과 범죄가 어느 시대나 더 많았고, 성적인 것은 오히려 시대에 따라서는 상당히 개방적이기도 했지만 성경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간음에 대하여 많은 권면을 한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간음이란 존재가 자신이 존재하게 된 목적과 다른 정체성이나 목적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존재하게 된 목적 아닌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거나 뚜렷한 목적 없이 아무 것에나 자기 인생의 목적과 의미 두는 것을 일삼는 것이 성령이 말씀하시는 간음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혼인의 본질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라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이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사람의 삶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사람이 육신으로 혼인하는 것으로 예표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혼인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다.


그런 하나님의 뜻이 배경이 되어 성경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남자는 의를 가진 존재로, 여자는 형식으로서 늘 나타난다. 이것은 육신으로 어떤 존재가 더 귀한 존재냐의 문제가 아니다. 육신으로 혼인이 가져오는 가장 큰 변화는 아들(자녀)이 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안에 가진 본성과 유전자가 또 다시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오직 혼인이라는 과정을 거쳐서만 가능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본성과 의라는 내용이 아들이라는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혼인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프레임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라고 기록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처음 열었을 때 봤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창조한 목적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의가 표현될 형식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표현하시겠다는 것이 사람을 만든 목적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 인생에게는 존재의 목적이 된다.


따라서 사람이 그 하나님의 목적 아닌 것을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는 모든 것은 다 간음이다.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권력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라나 육신의 가족을 위하여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 생각하는 것과 같은 모든 것은 다 간음이라는 의미다. 


이제는 추억이 되었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고등학교 입학하면 국민윤리 첫 시간에 내어주는 과제가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민족 중흥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만약 그것을 진정으로 자신이 태어난 목적이라 여긴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간음이다.


이 히브리서에서 혼인을 귀하게 여기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믿음의 연장선 상에 있다. 믿음이 귀하니 혼인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드린 희생을 온전히 믿으라는 권면의 연장선 상에 혼인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이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향한 뜻을 알게 하시는 것이고, 예수님이 보이신 그 온전한 뜻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가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게 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적 혼인이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 아닌 모든 사람은 육신으로 혼인에 대하여 아무리 순결해도, 심지어 결혼하지 않고 신부나 수녀처럼 살아도 모두 다 간음한 사람이며 혼인을 천하게 여긴 사람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육신을 만드실 때 육신 안에 주신 본능을 억제하는 것이 거룩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간음이자 우상 숭배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육신의 존재 의미, 자신이 옳다는 주장과 학대 앞에 종과 같이 낮아지는 본성을 인하여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삶을 살지 않는 모든 삶은 다 간음이고 혼인의 귀함을 저버린 것이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고, 그 보이신 것과 우리가 혼인하여 그 하나님의 의가 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는 혼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치로 하나님을 믿는 것 역시 간음이고 우상 숭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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