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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서 다소 특이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굳건하게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으로 갇힌 자와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히브리서에 두 번(11, 13장) 학대라는 말이 나오지만 구약에는 의외로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다소 특이한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해보자. 성경이 말씀하시는 학대는 단지 사람이 싫어서 혹은 이익을 인하여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학대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고통을 주는 것을 말한다.


특이하게도 욥기에서 욥이 빌닷의 두번째 변론을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욥 19:3)


이 말은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므로 자신이 당한 일이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고 말하는 욥에 대하여 그의 친구들은 욥이 하나님께 뭔가 행위로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는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바로 그런 상황을 욥이 학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많지는 않지만 다른 성경에서도 학대는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가치에 의하여 착취 당하고 멸시를 당하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에서 가장 큰 학대를 받은 분은 당연히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가 만들고 경영하는 세상에 와서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가진 은혜의 뜻을 전하러 왔는데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며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학대의 본질이다.


이런 것으로 보면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는 학대 역시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 앞에서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가 몸을 가졌으니 어 학대 받는 이들을 생각하라는 말씀이 중요하다. 이는 몸을 가졌기 때문에 학대를 받는다는 의미인데, 십자가 희생의 본질이 세상의 가치가 옳다는 것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신을 내어 주신 것임을 인함이다.


결국 갇히고 학대를 받는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고 있는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들을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학대 받는 사람을 한 단어로 줄이면 <형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학대 받는 이들을 생각하려면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형편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학대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안다는 것은 동일한 상황을 겪고, 동일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이 동질성은 같은 생명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본성, 그리스도라는 본성, 예수님을 십자가로 끌고 간 그 본성으로 거듭났기에 그 본성에 이끌려서 살고 있는 사람이어야 성경이 말씀하시는 학대 받는 사람들의 형편을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지 억울하게 형편 없는 고통을 강제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살피라는 외형적 말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행하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본성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나지 않았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이 학대를 알지도 못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면 어떤 사람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면 이 말씀대로 살 수 없는 것이다. 누가 학대 받는지 모르면 누구를 생각해야 할지 모르는데 학대 받는 이를 생각하라는 말씀을 지킬 방법은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이 이와 같으므로 다시 한 번 이 권면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본성이 이끄는 삶에 대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거듭나서 본성이 이끄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삶은 믿음을 가지려 노력하거나,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 기도하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라도 그 본성을 벗고 싶어서 부인하고 외면하려 해도 이 권면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자신을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그리스도의 본성을 살기에 성경이 권면하는 말씀대로 사는 자신을 보면 예레미야의 이 고백이 자기 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이상 죄 사함이 없는 제사로서 자신에게 임한 사람의 존재 정체성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은 그들의 삶의 모양을 기록한 것이지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보응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권면이 말씀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렇게 살고 있고, 그것을 벗어나려 해도 되지 않는 생명으로 자신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지킬 수 없는 말씀이다. 물론 이 말씀 뿐 아니라 성경 전부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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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의 십자가가 있었음에도 자신을 죄 없는 존재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형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이들이 바로 손님이다. 형제가 아닌 사람인 손님을 대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지 않은 사람들을 종과 같이 섬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믿지도 알지도 못한 유대인들의 주장 앞에 자기 육신으로 대접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당연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형제가 아니다. 즉 아버지가 다르다. 유대인들의 하나님 아들은 세상에서 이긴 자이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아들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히 아버지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 대한 개념이 다른 사람들이 바로 손님이다.


아버지는 가정의 모든 의를 가지고 있고 그를 중심으로 한 가족 구성원이 아닌 사람이 바로 손님이니, 하나님 아버지의 의가 아닌 다른 의를 가진 사람이 바로 손님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자기 육신으로 대접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예수님께 그런 본성을 주신 아버지가 같다면 그 본성도 예수님과 같다. 즉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 종과 같이 그들을 섬기는 본성과 삶을 가진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진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나님 아들은 당연히 죄가 없다.


이와 같이 자신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믿음이 나타나서 삶이 되면 손님을 대접한다. 나타난 것 곧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믿음의 표현된 것이다.


특별히 이것이 천사를 대접하기도 한다는 했다. 언뜻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찾아 온 손님 3명을 대접하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때 그것을 들은 사라가 웃기도 했고, 그래서 아들 이름이 이삭(웃음)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의 행운과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손님을 대접하는 본성을 가졌기에 일어난 일이다.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 되기도 하니 그렇게 하라는 것은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보면 쉽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3-5)


이와 같이 손님을 대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신앙 없다고 멸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기고 섬기라는 말씀이다. 아마도 이 빌립보서의 말씀은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힘든 말씀에 속할 것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많은 기독교인들은 전도도 적선하듯이 한다. 이런 본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교회 세습에 대한 사회적 비난에 대처하는 자세다. 기독교인의 한 부류인 교회를 세습하는 사람들은 교회 세습에 대한 비난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악한 시험”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기독교 안에서도 비판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차별한 사람들에 대한 일관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아는데 너는 알지 못하니 세상에서의 관계나 형편이야 어떻든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의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니 내 말을 듣고 천국에 가도록 해라’라는 마음을 가진 것이 바로 신앙인들의 모습인데, 그것은 손님을 대접하는 삶이 아니다. 이것은 손님을 대접하는 삶이 아니다.


그렇게 손님을 대접하는 삶을 살 수 없다면 당연히 예수님과 다른 존재다. 아버지가 다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 가진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유로 신앙적 차별과 심지어 멸시를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적선하듯 전도하고 은혜를 베풀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다른 존재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은 구원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예수님과 아버지와 생명이 달라서 형제라고 할 수 없는 이들의 주장에 육신을 내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노력하거나 훈련할 일이 아니라 그냥 살기만 하면 손님을 만날 때 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날 때 마다 자기 심령에서 육신으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 그러하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믿지 않는 것이거나, 아직은 아주 어린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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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마지막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성도의 삶>이 될 수도 있다.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접대하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고, 혼인을 귀하게 여기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전반의 많은 부분을 언급한 것이 그렇다. 언급된 사항들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들을 단지 형제를 대하는 것이나 혼인과 돈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행동 규범이 아니다. 이 말씀들은 히브리서가 이어가고 있는 믿음, 하나님께서는 이제 아들로 말씀하신다고 시작한 말씀이 의도한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들은 행동 규범, 즉 이런 일을 이렇게 행하라는 뜻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런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즉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권면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이기에 결국은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그런 사람이 되면 이렇게 살게 된다는 말씀이란 뜻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 권면들은 여러가지 사안에 대한 개별적인 권면처럼 보일 수 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손님을 대접하는 것 그리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과 혼인 그리고 돈과 같은 요소는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다른 것이고, 또한 권면 또한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이 모든 말씀이 결국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하나의 권면이다.


같은 반복이지만 결국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예수님을 담대히 믿는 사람, 예수님의 구속이 나를 구원했고 그로 인하여 이제 죄 없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의 삶, 그 하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나 손님을 대접하는 것,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고 혼인을 귀하게 여기며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보이지 않는 믿음 그 하나가 나타난 삶의 모습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의 본질은 믿음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속했다는 것이 진동하지 않는 땅과 같이 굳건한 믿음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자신을 온전하게 죄 없는 존재가 되게 하였다는 믿음이 이 권면대로 살게 하는 본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각각 지켜내려고 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떠나 예수님의 구속을 믿지 않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되는 것을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 손님을 대접하는 것,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 혼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과 돈을 사랑하지 않고 족하게 여기는 것은 모두 믿음의 한 단면들이다.


형제 사랑하는 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항상 형제를 사랑하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항상 형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있으라는 뜻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가장 큰 뜻은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사랑이 존재의 의미라는 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것이 그 배경이고 전제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존재의 의미는 당연히 창조주가 부여한다. 존재의 의미는 피조물이 가질 수 없는 영역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분명한 목적을 정하셨고, 그 목적은 피조물인 사람의 존재 이유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의 의미를 정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형제 사랑하는 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형제에게 항상 존재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항상 형제로 있으라는 뜻이다. 이 형제는 육신의 형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동일한 본성을 가진 사람 상호간의 관계다. 그리스도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들이므로 서로가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같은 아버지라는 의미다. 아버지가 같아서 형제라는 뜻이다. 그 아버지는 당연히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이 되었을 때 아들이니 형제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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