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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적 없이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학대나 고문이다. 당연히 하나님도 징계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자체에 능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설명하자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시니 사람들이 심판에 놓이게 된 것과 같다. 예수님은 고소는 모세가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나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요 5:24)


즉 하나님은 잘못을 지적하고 그것을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보이시므로 그릇된 자리에 있는 자들이 스스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후회하고 징계로 여기게 하시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죄를 시인하면 구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시인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릇된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고,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바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람을 심판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바로 이런 법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자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보이시니 그 자리를 떠난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시는 법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런 법을 가지신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자체에 목적이 있거나 능동적으로 징계나 채찍질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보이시므로 그릇된 자리에 있는 자들이 스스로의 삶이 징계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징계를 받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징계와 같은 자리에 있다고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징계 역시 당연히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어 단번에 드린 제사로 모든 사람을 구속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온전하게 믿지 않고 계속 자신을 죄 있는 자로 여기고 있는 것은 징계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죄 가운데 있으니 선하신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리로 이끄시려는 뜻이다. 온전한 자리, 평안과 은혜와 축복의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를 떠났으니 징계를 받는 것이다. 집 놔두고 객지에서 사서 고생하는 꼴이다. 딱 탕자의 비유 그 자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온전한 구속을 알게 되면 자신이 엄청난 하나님의 징계 안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온전히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신 뜻도 함께 알게 된다. 그때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탕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나의 육신을 통해 표현하시겠다는 선하고 의로운 뜻을 늘 경영하셨음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고 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본성을 주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때 사람은 낙심하게 된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시점의 모습이 바로 손이 피곤하고 무릎이 연약해진 상태이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곧은 길로 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징계를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권면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어 더 이상을 죄를 사하는 제사가 없게 하셨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죄가 있다고 여기고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행위를 드리고, 기도할 때 마다 회개하는 그 자리에서 떠나기를 권면하고 있다. 회개하고 있다는 것이 징계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서를 읽고 묵상하고 심지어 학문으로 공부하여 논문까지 쓰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죄 없는 자로 여기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징계 가운데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떠나 예수님께서 온전한 제사장으로서 여신 단번에 드린 제하고 더 이상 죄를 사하는 제사가 없는 세계로 부르신 그 부르심에 응답하자고 말씀하고 있다. 매번 자신을 정죄하고 회개하는 파곤함과 연약한 무릎을 세우고 더 이상 죄가 없는 자리로 곧게 가자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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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4-11) 하나님 징계의 본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23. 04:00 Writer : 김홍덕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 아니다.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의롭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식을 훈계하는 마음으로 징계를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훈계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이유가 틀렸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자신의 행위가 의롭지 못함을 심판하고 심판 당하는 것에서 구속하시려 예수님을 보내사 행위로 심판하는 자들에게 드리심으로 제물이 되어 더 이상 사함이 행위로 심판을 받아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일이 없게 하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행하시는 역사가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다.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구속이 더 이상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게 하였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단번에 드려짐으로 이제 더 이상 그를 믿는 사람은 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를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의 구속은 존재의 신인 하나님 아들이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가치관에 의해 심판 받고 제물이 된 십자가로 인함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예수님의 모습과 행위가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속에 있던 하나님의 의와 뜻이 물과 피로써 쏟아지니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은 한 번이면 되는 제사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이면 족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존재 정체성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행위로 사람을 심판하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행위로 자신을 비추어 자신을 죄 없다 하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나 신앙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신앙이 형성한 가치관이 정죄하므로 자신을 죄 없다 하지 못하는 신앙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곤고하다.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내세만 꿈꾸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다 이기고 나면 천국에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은 고난이라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즉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 징계의 연속이라는 말이다. 그게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이 세상은 곤고한 삶이라고 여기고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에덴동산(만족의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은 삶인데 그것이 구원 받은 삶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면 바로 그 신앙에서 돌아오게 하시려는 징계가 있을 뿐이다. 즉 자신을 죄 없다고 하지 못하는 구원 받지 못한 삶에서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행하신 구속의 역사 안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경영이 자기 가치관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징계로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해지도록 놀고 있는 아이 입장에서 보면 저녁 먹으로 끌고 가는 엄마의 손은 징계인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질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예수님을 보내시면서까지 행하신 구속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라는 채찍질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아들로 지음 받았기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아들로 예비되고 준비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들이 되게 하시려고 세상의 모든 것으로 구속의 역사 안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채찍질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두고 모든 피조물이 바라는 바라고 했다.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의,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모든 경영은 그것을 벗어난 인생에게는 징계고 채찍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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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자신이 가진 어떤 기준을 스스로 어기고 무엇을 추진하다 장애를 만나면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헌금하지 않고 긴급한데 자금을 사용했는데 원하는 일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이 관여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생각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행위에 반응하는 신으로 믿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신앙이 사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신앙인데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을 두고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능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이 53:4)


예수님의 행위가 하나님 아들답지 않고, 율법과 절기를 어기기를 밥 먹듯이 한 것을 인하여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의 생각에 예수님의 십자가는 마땅한 것이었음을 이사야가 아주 먼저 예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행위로 신앙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히 죽어야 할 죄인이었고,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음을 인함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사람들이 어려움, 징계라 여기는 고난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징계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그런 신앙에 갇혀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와 목사들이 이것을 가지고 신앙인들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벌받는다” 는 말이 그것인데, 여기서 <그러면>이라는 것은 당연이 ‘그런 <행동>을 하면’이다. 즉 행위가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올 것이라 협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행위에 반응하는, 행위를 의롭게 여기는 신으로 믿으면서 그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 그것을 이상하게도 <목회>라고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징계는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더 이상 제사가 없도록 온전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권면하는 말씀의 연장선 상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설명하고 있다. 더 이상의 제사가 없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가 없는 의인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죄가 없는 것을 보이시려 단번에 드린 온전한 제사를 드렸는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권면하면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징계가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한 벌이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어두움이다. 예수님은 존재의 신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아 드린 제사가 십자가다. 더 이상 행위로 인하여 죄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존재의 신인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되므로 하나님께서 그 존재 정체성을 의로 여기시며, 또한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삶이니 그 행위 또한 의로운 것이 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에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니 스스로 죄 없다 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진 것도 모자라 그 신앙과 자신이 정한 율법을 자신이 지키지 못함을 인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목회라고 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그 죄를 면할 길이 없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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