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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4-11) 주가 주시는 징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21. 09:57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이신 구속, 곧 우리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보내시고 살게 하신 뜻이다. 이것을 알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한 이유는 그것을 보고 순종하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인생의 목적, 삶의 의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살게 하신 뜻을 보고 그것을 수용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의 구속이 나의 것이 되며, 예수님의 구속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 나의 존재 정체성에 대하여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이 담대함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담대함이다.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라는 것을 확신할 때만 가능하다. 


즉 자신은 죄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때만 의로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깨끗한 물건을 만질 때만 봐도 자신의 손이 깨끗하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만지지 못하는데 자신이 죄 없다고 고백할 수 없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어떤 노력이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 착각이다. 


지금 이 히브리서도 예수님을 구속에 대하여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제사가 필요 없는, 그러니까 죄 없고 온전한 존재로 거듭나게 하심을 믿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것은 선진들로 나타난 믿음의 모습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의 구속을 바라보고 믿고 나아가자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 있어 사람들이 징계라고 여기는 일들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위로하고 있다. 징계는 원인이 있다. 하나님의 의를 바로 알지 못하면 모든 징계의 원인은 자기 행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면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돌아보는 것이 사람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인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사람들이 징계라 여기는 일들은 사람의 행위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행하신 구속을 인하여 죄 없는 존재라는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마주하는 징계와 같은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라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는 이유 만으로 스스로 죄 없다 하지 못하면서 교리나 신앙 관습에 입각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니다. 죄 있는 하나님 아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인데 어떻게 자신에게 닥친 곤고함이 자신이 하나님 아들임을 인하여 겪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외식이고 도둑질일 뿐이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 징계에 관한 말씀을 시작하면서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지는 않았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 징계는 죄와 싸우는 과정에서 겪는 일이라는 말씀이다.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평안하게 지내고 성공하고자 하는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인하여 겪는 고난은 징계가 아니라는 의미다. 즉 곤고함을 이기고 나면 하나님께서 더 큰 재물과 평안을 주실 것이라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듣는 위로의 프레임은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로 볼 때 이 징계는 사람이 죄 없는 자가 되기까지 과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질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원칙적으로 죄 없는 존재여야 한다.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한 자리가 죄라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장이 아니라 원칙이다. 모든 것은 창조자와 주관자가 정한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원칙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 있다면 창조주는 당연히 원래 자리로 이끌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자기 자리를 벗어난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서 떠난 자리를 자신이 선택했기에 그것에 머물려고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원래 자리로 돌리려 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서 떠난 자리를 고수하려 하니 저항이 생긴다. 여기에 곤고함과 채찍질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이기에 채찍질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이 되도록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떠난 죄 가운데 있으므로 진정한 아들인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자리를 떠난 인생들에게 원래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십자가에 보이셨다. 그것을 보고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죄 없는 자리, 하나님 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의 할 일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므로 그 자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경영은 채찍질과 같고 징계와 같다. 그리고 사람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온전한 대제사장으로서 더 이상 속죄가 필요 없는 단번에 드리는 제사를 드렸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회복을 위한 자리로 믿고 가자고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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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1-3) 예수를 바라보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20. 09:21 Writer : 김홍덕


믿음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서 11장은 독립된, 그러니까 믿음에 대하여 특별히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된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사가 온전한 제사이며, 그 제사는 단번에 드려진 제사이므로 그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자는 설명의 일환으로 권면하는 글이다. 이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온전한 구원이 있음에 대하여 확신을 권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믿는다면서 정작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이 히브리서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이 온전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구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은 율법과 레위 계통의 제사를 따라 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좇고 있다는 것은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오늘날 신앙들의 신앙이 율법적인 신앙이라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간과하고 착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지키려는 말씀은 신약에 있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이기 때문에 율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고정 관념은 참으로 깨기 어렵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이날까지 하나님을 믿어 온 모든 여정을 부인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창세기의 시작이고 구원의 시작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의 구속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생활로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고 의롭게 여긴다는 생각으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좀 솔직해지면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했던 것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것까지 인정하게 될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사실이니까.


그런 신앙 안에서 있으면 평생을 예수 믿어도 예수님의 구속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행위로 구약이든, 신약의 예수님 말씀이든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생각이 율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을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게 한다. 행위로 의로워지려 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늘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가 의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행위가 심판을 받아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죄를 정한다고 믿고 있다는 증거다.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11장에서 많은 증인들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그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뜻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분이고, 피조물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선한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그들의 삶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랬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 그리스도를 소망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그런 이유로 히브리서를 읽는 이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권면한다. 예수님을 보자고, 보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어떤 유익이 있기 때문에 보자고 하는 것이다. 본다고 달라질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보자고 할 이유가 없다. 특히 이것은 눈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예수님과 같아 지기를 소망하자는 의미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소망하자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소망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소망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임하여 그것이 육신의 삶을 주관하는 것이 믿음의 소망이다.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거듭난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자 사람을 향한 약속이고 계이며 본질이고 하늘의 참 것이다. 믿음의 선진들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하늘의 참 것을 믿었기에 그들의 삶이 믿음의 조상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하신 이유다.


그러므로 정말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한다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즉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것은 의무 같지만 우리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거듭난 삶이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죄가 될 리가 없다. 따라서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믿는다면 자신이 죄 없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구원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드린 구속이 뜻한 존재가 되지 않았는데 세례증서나 교인 확인서로 구원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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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7-40) 믿음으로 –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18. 04:00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답게 다시 한 번 소개된다. 특히 아들 이삭을 바친 일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에 순종했다.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많이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니 정말로 번제로 드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생각했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이삭을 바치면 다른 아들을 주시든지 아니면 분명히 다른 대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생각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을 하나님이 모를 리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브라함은 분명히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 했다.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브라함도 아버지였으므로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은 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다는 것이 본질이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이삭이 죽지 않을 것을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삭이나 자신이나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 하나의 일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요 내 인생의 주관자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전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확인한 믿음은 그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조성하시고 나를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이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지금 히브리서가 말씀하는 믿음도 그리고 인용한 아브라함의 믿음도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믿음 그것이 있으면 믿음의 모양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이 생각하는 육신에게 좋은 일을 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아브라함이 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는지, 하나님은 왜 그것을 주문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하신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없다.


히브리서가 설명하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로 표현된 모든 믿음의 모습들이 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관자라는 것을 믿는 보이지 않는 믿음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그 모양도 다양하다. 사람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육신의 평안과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유익하게 믿음을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가 말하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 정체성을 믿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신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가 사람과 세상을 존재하게 했다는 것, 선진들은 그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나타난 본질은 바로 그 믿음이다.


이 믿음을 히브리서는 약속을 받지 못한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17절에서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믿음이라고 했다. 아브라함만 보면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다가 아닌 사람이기도 했다가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선진들이 보여준 믿음의 모양들, 히브리서가 믿음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는 좋은 믿음들은 모두 그 약속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뜻이 약속이고 사람은 그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증거를 받은 믿음이고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약속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더 좋은 것을 예비하였다고 언급하고 12장에서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하신 것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믿음 장은 앞서 단번에 제사를 드린 예수님의 온전함을 설명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이 모든 믿음은 결국 예수님께서 온전한 제물이 되어 우리를 구속했으니 우리가 이제 죄가 없는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 자리로 가자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모습들이 바로 예수님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순종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은 이것 뿐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 믿음은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이 믿음을 오늘날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을 믿는다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 걱정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서야 한다며 기도하는지 모른다. 그런 모습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어줄 도깨비 방망이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런 마음은 필시 예수님이 자신을 구속했다고 믿는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를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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