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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자신이 온전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여러 방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는 교회에 대한 불만이다. 설교가 어떻다는 둥, 교회가 하는 일이 어떻다는 등 잔소리가 많다. 심지어 유튜브나 다른 채널을 통해 설교를 듣고서 그게 너무 좋다고 말한다. 그럴 값이라면 교회를 옮겨야 한다. 만족하지 못하는 곳에 계속 다니는 것은 명분이 없다. 신앙생활을 위해 다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를 떠났을 때 받을 불이익에 대한 염려나 아니면 그 교회에서 무슨 이익을 구하고 있지 않다면 그럴 수 없다.


물론 갈 곳이 없다는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 앞에 변명은 되지 못한다. 이 세상이 아직 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이 어디선가는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면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못하고 있거나,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문제가 많다. 십자가 구속을 믿는다고 하면서 스스로 죄 없다 말하지 못하는 엄청난 모순 속에서 요행을 바라듯 다니던 교회만 다니고 있다는 것은 성공하지 못할 도박에 빠진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었다면 온전한 하나님을 찾기 위해 떠나야 한다. 또한 하나님과 무관하게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돈이나 명예에 인생의 목적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도 인생의 목적을 찾아 떠나야 한다. 아브라함이 떠나듯,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떠나듯 모두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신앙에서 온전한 하나님을 찾아 떠나야 한다. 이것은 본능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란 존재를 성전이나 그릇과 같이 무엇을 채워야 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그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있지 않으면 만족되지 않게 지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사람이 만든 모든 물건도 같다.


따라서 지금 자신의 신앙이 온전하지 않다면 어디선가 온전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떠나야 한다. 다만 그 외치는 소리가 결국 피라미드 위로 가자는 소리라면 가봐야 소용없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힘을 빌어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한 신앙이 말을 갈아탄다고 거꾸로 갈리는 없다.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 가도 새기 마련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빌다가 절에 가서 빌면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나 부처나 모두 도깨비 방망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면 완전히 다른 것이 보일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응답하시겠다는 것은 성경에 널리고 널린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해 온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혹시 이단이나 다른 길로 빠지면 어떻해?’라는 핑계로 버티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이라는 육신의 정욕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육신을 주실 때 이미 다 예비하신 것이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다 예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이 바라는 것이나 해결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 믿고 구하면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신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하나님을 찾는 믿음이 있으면 이때까지 자신이 살아온 모든 것을 떠나야 한다. 이단에 빠질까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단을 염려하고 있다면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육신의 평안을 상실하고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믿었던 신앙이 육신의 정욕을 구하는 신앙이었기 때문이고, 모든 이단들이나 세상의 종교가 하나 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에 관한 교리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가 자기 것 아닌 다른 신앙의 것을 좇으면 실패하고 망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단을 염려한다는 것은 그 세계, 그 구조, 그 프레임, 그 신앙 안에 있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무관한 신앙이었다는 말이다.


진심으로 온전한 하나님을 찾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신다. 땅 끝에 숨어 있어도 하나님이 찾아오실 것이다. 시편에 이런 고백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이 지금 자기 신앙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이라는 확신도 없으면서 또 떠나지도 못하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으면 답하시겠다는데 그것 하나를 미디 믿지 못하면서 어떤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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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장과 절은 처음 기록할 때 매긴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성경을 장절을 구성하는 숫자로 예언을 논하는 것은 난센스다.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은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의 일부다. 이 장만 파편화하여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1장의 내용은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을 설명하는 부연 설명에 가깝다. 오히려 믿음장의 핵심은 12장 1,2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히브리서 10장에서 설명한 온전한 제사, 단번에 드린 제사 그리고 더 이상 죄를 사하는 제사가 없다는 말씀들에 의지하여 12장에서 말씀하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우편, 즉 바르고 선한 편에 앉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을 위한 믿음의 명분을 설명한 것이 믿음장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현실을 반영하여 쉽게 말한다면, 거듭났다고 믿는다면 죄가 없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담대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에 담대함과 확신을 주고자 히브리서 기자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유대인들에게 제사는 할례나 율법과 함께 일상이고 관습이고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명분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은 온전하게 하였으니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설득하고 있는 것이 이 히브리서의 한 단면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주로 믿는 유대인들이라고 단번에 “그럼 되겠다”라고 삶을 바꾸기 쉽지 않은 문제다. 


오늘날도 당연히 그렇다. 행위가 심판과 정죄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살다가 존재의 정체성이 심판의 기준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어도 금방 자기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을 논하지 않게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나는 죄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바로 그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속이면 우리가 하나님 우편, 곧 바르고 선한 자리에 앉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역설적으로 생각해볼 것이 있다. 바로 더 이상 죄를 사하는 제사가 없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다시 사함 받아야 할 죄가 있고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제사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저주지만 이제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담대함과 확신을 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시려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그대로 받으면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씀이 바로 죄를 위한 제사가 더 이상 없다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이로 보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의 역사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까지 보내어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는데, 구원은 받았다고 하면서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여 다시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은 전혀 기쁠 수 없다. 그리고 제사가 별 것 아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하는 모든 행동이다. 심지어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다. 그런 것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게 여기시고, 무엇보다 내가 하는 일을 형통하게 하신다 생각하는 것이 제사다. 그리고 그것이 율법이고 행함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구원도 없다. 아직 의로워지기 위한 제사, 곧 죄를 사하는 제사를 드리고 있으니 아직 죄가 있는 것이다. 죄가 있으니 당연히 구원이 없다. 이것마저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심판하실 수밖에 없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람이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경영하시고 아들까지 구속의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을 사람이 믿고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고, 죄를 사하는 제사도 더 드리지 않으며, 자신이 죄가 없는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보람을 얻으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진 영광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러면 사람이 할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의 것으로 받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듯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여기서도 믿음이 완전히 수동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 사람은 단지 그것을 인정하고 순종하고 자신의 일임을 믿으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거꾸로 생각한다. 그래서 자꾸 뭔가를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사람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순종하고 수용하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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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3) 믿음은…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11. 04:00 Writer : 김홍덕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사랑, 가치, 정의와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무형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다. 차용증 없이 돈을 빌려준다면 믿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나타나야 믿음임을 알 수 있다. 잠깐 하나를 언급한다면 차용증 없이 돈을 빌려주는 것이 믿음이 되려면 빌려간 사람이 돈을 갚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빌려간 사람이 어떻게 나오든 내가 수용하겠다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그렇게 수동적인 것이다.


사람은 생물학적인 육신을 가지고 있다. 물리적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도 육신을 본질로 여기지 않는다. 육신 안에 깃든 정신, 자아, 영혼을 각 사람의 본질로 본다. 육신의 모든 말과 행동은 내재된 그 본질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사람도 안다. 그것은 자신도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여긴다. 여기서 우리는 보이는 것이 나타난 본질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믿음으로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으로 안다는 것은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나타난 것에서 증거를 찾아 믿으려 하는 것과 방향 자체가 반대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이고 그것이 세상으로,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안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하신 것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의 육신이 된 말씀은 LOGOS 즉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또 믿음으로 하나님의 세계가 <말씀>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이다. 바로 <의(義)>를 말한다. 내용이라는 의미다. 


사람으로 보면 영혼이고 본성이며 심령이고 작게는 생각이다. 사람의 모든 행동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나타난 것이듯, 세상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의와 뜻과 생각과 성품이 나타난 것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이 나타난 것이라고 알게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하나님께 세상에 관한 것을 하나님의 은혜나 영광이라며 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잘 되게 해 주신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말이란 뜻이다. 그런 신앙과 설교나 신학이나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구하는데 본질 아닌 부수적인 것을 구할 리 없다. 자신이 가장 본질로 보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울러 온 세상은 그 말씀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믿음의 표준이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 그 의와 뜻을 세상과 사람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을 순종하고 수용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나타내셨는데 거기에 대고 하나님께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이것이 이루어져야 하나님이 영광스럽다는 것과 같은 사설을 붙일 이유가 없다. 그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믿음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나타내게 한 하나님의 참 것, 하늘의 뜻을 순종하고 수용하는 것이 다. 믿음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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