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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3) 믿음은…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10. 04:00 Writer : 김홍덕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은 유명한 말씀이다.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보면 믿음에 대한 결론은 12장에 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라는 말로 모든 믿음의 본질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즉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을 기준으로 보면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들이 다양하나 그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것들, 흔한 말로 돈과 명예, 부와 건강과 평안과 같은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에 수렴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돈과 명예와 같이 세상적인 것은 그리스도와 반대편에 있다는 말이 무색해질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들이 돈과 명에, 부와 건강과 평안을 추구하는 목적이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에 있고, 왜 사는지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가지면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고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결국 사람이 바라는 것은 존재의 목적, 삶의 의미인데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사람들의 바라는 모든 것의 실상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하여 객관적인 증거를 찾기도 하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믿는 증거가 바로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증거가 있으면 믿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믿음이 증거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으면 증거가 널려 있어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으려면 자기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자기 안에 들어온 것이 없는데 밖에 있는 것을 믿을 수는 없다. 눈 앞에 일어나는 일이나 현상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마술이 그렇다. 눈에 뻔히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눈속임이라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시험도 그렇다. 문제지에 분명히 답이 있는데 자기 안에 답이 없으면 확신하는 마음으로 답을 적을 수 없다. 결국 증거는 자기 안에 있는 것과 나타난 것이 연결될 때 증거가 된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객관적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을 보고 조롱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지만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하나의 사건인데 누구는 조롱하고 누구는 믿었다. 기적을 목도하는 것이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다. 오히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 말씀과 역사가 증거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객관적인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만약 예수님이 눈에 보이게 재림하고 그것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한다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때, 예수님을 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이런 모습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어야 신이라고 믿는 마음 때문이다. 자신이 바라고 구하는 것을 이루어 주신다고 믿는 믿음대로 해 주는 신을 믿고, 그렇게 믿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그것에 맞춘다. 하나님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창조과학회와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 그 증거다.


믿음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신이 들어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주는 신은 존재한다. 자기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이 어딨냐?” 항변한다. 세상이 자신의 의와 가치에 맞지 않게 돌아간다 느끼면 사람들은 “신이 있다면 이럴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수동적인 모습이 믿음인데 그것과 반대로 자신이 바라고 믿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믿음이 없다. 그 믿음이 없으니 객관적 증거를 구한다.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한 명분과 정당성으로서 하나님 실존에 관한 증거를 찾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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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인내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허락할 때까지 성경 말씀이 아닌 쾌락이나 즐거움을 좇지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참고 견뎌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인내가 아니라 투자다. 인내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위로 가야 선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낮은 십자가로 가는 본성을 가지고 살기에 삶 자체에 인내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힘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노력이나 신념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성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는 않다. 자나깨나 언제나 그 본성이 나타나고 삶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 생명이 없는 사람들, 인내는 참고 견디는 노력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비밀이다. 예수 믿는 것도 신념과 노력이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런 생각은 당연히 하나님 아들의 생각이 아니다. 구원이 없는 삶이다. 예수님과 같아지려고, 또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신앙을 노력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가치가 알지 못하는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도 상당한 오해를 한다. 하나님을 믿느라 경제적인 손실을 입으면 하나님께서 경제적인 보상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더 나은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귀하다는 것에 손해를 보았더니 세상이 귀하다는 것을 주신다? 그것이 더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더 나은 것은 세계와 본질이 다른 것이다. 가치를 매기는 기준이 다른 것을 주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세상 높은 곳으로 가야 선하다는 사람들과 반대로 가다 보니 입은 손해는 당연히 위로 가지 않아서 입은 손해다. 그런데 낮은 곳으로 달려가는 사람에게 높은 곳으로 가지 않아 입은 것을 상으로 준다? 그건 조롱이지 상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의 상은 세상의 가치로 귀한 것,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입은 올라 갔을 때 얻을 수 있었던 것의 보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리석음이다.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늙어서 외아들을 얻은 부자가 아이가 아직 어릴 때 죽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어려서 자신의 재산을 아이에게 물려줄 방법을 궁리하던 부자는 모든 재산을 청지기에게 물려주고 아이가 성인이 되면 나의 재산 중에 단 하나만 선택할 수 있게 유언을 남겼다. 성인이 된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이 어이없었는데 그 뜻을 알게 되었다. 그 청지기 하나만 선택하면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 사람들이 가치를 매겨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나타난 것이고 보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이자 하늘의 참 것인 내용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약속을 받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받는 것이 된다. 더욱이 그 약속이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영원함도 함께 얻는다. 이것은 위로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등 뒤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뛰어가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이 상과 약속이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것은 없다. 이 약속은 그냥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일방적인 약속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그리고 이 약속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도 그렇다. 하나님의 계획이 형상대로 나타나서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속이다. 그러므로 약속을 받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온전히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 약속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다들 높은 곳에 선함이 있다고 하니 뛰어가는 그 세상의 모든 것이 왜 나타났는지 밝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 되면 세상의 모든 것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밝게 보인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이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일부, 모두 다 공감하는 높은 것을 좇는 것 같지만 사람마다 다른 가치를 좇아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파편화된 삶의 모양에 대하여 밝히 보게 된다. 이것은 정말로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성경이 말씀하시는 상급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기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로 된 것이므로 인생 자체가 감사 자체가 된다. 이것은 정말로 들을 귀 있는 자, 아는 자만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것이자 약속을 받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정하고 주신 그대로 순종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이 믿음이라고 한다. 이 믿음이 있다면 세상은 얼마든지 담대할 수 있다. 이것을 좇아가는 것에 문제가 없다. 본성이 끌고 가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하나님 아들이라고 세상의 일들이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곤고함이나 세상의 어려움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것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육신의 평안이 은혜라고 보는 것이니 나타난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고난을 감하시기는 해도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육신을 종과 같이 내어주니 더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생명으로 났으니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로 났으니 십자가를 순순히 지신 예수님과 같은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영화로움을 안다. 이것이 무슨 괴변이나 미친 소리냐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육신의 일은 언제나 여상하나 세상이 보는 것과 달리 침륜에 빠지거나 힘들어 하지 않고 기쁨으로 살 수 있다. 육신으로 겪어가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연히 힘들다. 하지만 본성대로 사는 것이니 그것을 억지로 참고 견디지 않는다. 이 곤고함을 참고 견뎌야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는 생각에 참고 견디는 인내가 아니다.


사람들은 그 힘든 것을 벗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다르다. 사람들이 은혜라 여기며 추구하는 높고 선한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육신으로 수고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즐거움이다. 육신이 세월과 함께 쇠약해지고, 또 삶이 곤고하며, 무엇보다 자기 옳다는 사람들의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 주어 섬기며 사는 삶이 세상 사람 보기에 미련해 보여도 자신의 삶이 창조의 목적대로, 인생이라는 존재 정체성대로 소비되고 사용됨이 기쁘고 즐겁다. 이 기쁨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과 다른 기쁨과 평안이고, 항상 기쁘고 범사가 감사한 삶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인내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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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32-39) 필요한 인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8. 04:00 Writer : 김홍덕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인 십자가의 희생은 단번에 드린 제사라는 것을 사뭇 강조하는 것은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은 언제나 하나다. 멀티태스킹이 있지 않느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물건은 멀티태스킹이 그 목적이다. 아수라 백작이나 반인반수는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태어나고 존재한 이후에 바뀌는 것도 없다. 트랜스젠더? 그것은 밥을 먹지 않는 거식증과 같은 병이지 성정체성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과 레위 제사장 제사의 완성이다. 형식에 내용이 합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은 내용인 하나님 말씀 그 자체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제물이 제단에서 불살라지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온전한 것이다. 당연히 그 제사를 드린 제사장은 예수님이니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온전한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모든 형식에는 단 하나의 내용 곧 존재 목적이 있으니 그것이 하나가 되는 것은 경우의 수가 단 하나다. 예수님의 제사를 단번에 드린 것이라고 하시는 증거고 이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일어난 변화들이 있다.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백부장이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선언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냈고, 그로 인하여 이제 모든 사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자체가 전부가 아니다. 십자가 사건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과정이다. 그 결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심이 드러난 것은 그 모든 것이 집약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들이자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그 어이없는 심판을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결과로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로 하나님 아들을 심판한 결과를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다는 것이 형상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들이라는 정체성,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정체성은 바로 세상의 가치관에 육신을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주고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 가진 모든 사람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라는 것을 보이셨다. 세상 지으신 하나님 아들이 피조물들이 스스로 세운 가치관에 의하여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게 되었는데 그것을 순종하는 것에 육신을 내어주니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다.


이것은 극단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극단적이라고 하는 것은 등지고 있던 사람이 각자 앞으로 가는 것과 같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는 가치관, 의로운 것은 반드시 귀한 대접을 받아 높이 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더 이상 미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다고 표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에게 십자가는 자기 존재 정체성을 깨닫는 구원의 모습이다.


이 차이가 비난과 환난으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또 같은 형편에 있는 사람들과 형제가 되어 동정하는 자리에 이르게 할 뿐 아니라 산업도 빼앗기게 된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히 10:32-43)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의가 반대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피라미드 위로 가야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는 낮고 낮은 십자가로 가야 선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말의 교차점도 없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들이 육신으로 사는 동안 지속되는 일이다. 육신이 세상에 있고 세상은 하나님의 의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비난하며 종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인내는 의지와 신념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생명이 되면 이미 그 본성이 그리스도와 같으므로 삶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즉 언제나 “너 옳다”고 말하고 자기 육신의 수고를 종과 같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 뿐이다. 성경이 참으로 말하니 참으려 노력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사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그 삶이 인내 자체다. 따라서 이 인내는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것이며, 그것은 육신으로 살 동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인내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면 육신의 수명동안 사는 것이다. 우리 삶을 사는 내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그 삶이 인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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