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인내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허락할 때까지 성경 말씀이 아닌 쾌락이나 즐거움을 좇지 않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참고 견뎌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인내가 아니라 투자다. 인내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관은 위로 가야 선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낮은 십자가로 가는 본성을 가지고 살기에 삶 자체에 인내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힘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노력이나 신념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성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는 않다. 자나깨나 언제나 그 본성이 나타나고 삶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 생명이 없는 사람들, 인내는 참고 견디는 노력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비밀이다. 예수 믿는 것도 신념과 노력이라고 생각하기 일쑤다. 그런 생각은 당연히 하나님 아들의 생각이 아니다. 구원이 없는 삶이다. 예수님과 같아지려고, 또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사람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신앙을 노력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가치가 알지 못하는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도 상당한 오해를 한다. 하나님을 믿느라 경제적인 손실을 입으면 하나님께서 경제적인 보상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더 나은 것이 아니다. 세상이 귀하다는 것에 손해를 보았더니 세상이 귀하다는 것을 주신다? 그것이 더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더 나은 것은 세계와 본질이 다른 것이다. 가치를 매기는 기준이 다른 것을 주시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세상 높은 곳으로 가야 선하다는 사람들과 반대로 가다 보니 입은 손해는 당연히 위로 가지 않아서 입은 손해다. 그런데 낮은 곳으로 달려가는 사람에게 높은 곳으로 가지 않아 입은 것을 상으로 준다? 그건 조롱이지 상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이 맥락에서 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의 상은 세상의 가치로 귀한 것,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갔기 때문에 입은 올라 갔을 때 얻을 수 있었던 것의 보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리석음이다.


탈무드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늙어서 외아들을 얻은 부자가 아이가 아직 어릴 때 죽게 되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어려서 자신의 재산을 아이에게 물려줄 방법을 궁리하던 부자는 모든 재산을 청지기에게 물려주고 아이가 성인이 되면 나의 재산 중에 단 하나만 선택할 수 있게 유언을 남겼다. 성인이 된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이 어이없었는데 그 뜻을 알게 되었다. 그 청지기 하나만 선택하면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 사람들이 가치를 매겨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나타난 것이고 보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이자 하늘의 참 것인 내용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약속을 받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받는 것이 된다. 더욱이 그 약속이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영원함도 함께 얻는다. 이것은 위로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등 뒤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뛰어가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이 상과 약속이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것은 없다. 이 약속은 그냥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일방적인 약속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다. 그리고 이 약속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도 그렇다. 하나님의 계획이 형상대로 나타나서 사람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약속이다. 그러므로 약속을 받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온전히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 약속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다들 높은 곳에 선함이 있다고 하니 뛰어가는 그 세상의 모든 것이 왜 나타났는지 밝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 되면 세상의 모든 것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밝게 보인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이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일부, 모두 다 공감하는 높은 것을 좇는 것 같지만 사람마다 다른 가치를 좇아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파편화된 삶의 모양에 대하여 밝히 보게 된다. 이것은 정말로 아는 사람만 아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성경이 말씀하시는 상급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기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로 된 것이므로 인생 자체가 감사 자체가 된다. 이것은 정말로 들을 귀 있는 자, 아는 자만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아는 것이자 약속을 받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정하고 주신 그대로 순종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이 믿음이라고 한다. 이 믿음이 있다면 세상은 얼마든지 담대할 수 있다. 이것을 좇아가는 것에 문제가 없다. 본성이 끌고 가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하나님 아들이라고 세상의 일들이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곤고함이나 세상의 어려움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것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육신의 평안이 은혜라고 보는 것이니 나타난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고난을 감하시기는 해도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육신을 종과 같이 내어주니 더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거듭난 사람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생명으로 났으니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로 났으니 십자가를 순순히 지신 예수님과 같은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영화로움을 안다. 이것이 무슨 괴변이나 미친 소리냐고 말하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육신의 일은 언제나 여상하나 세상이 보는 것과 달리 침륜에 빠지거나 힘들어 하지 않고 기쁨으로 살 수 있다. 육신으로 겪어가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당연히 힘들다. 하지만 본성대로 사는 것이니 그것을 억지로 참고 견디지 않는다. 이 곤고함을 참고 견뎌야 하나님께서 상을 주신다는 생각에 참고 견디는 인내가 아니다.


사람들은 그 힘든 것을 벗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다르다. 사람들이 은혜라 여기며 추구하는 높고 선한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육신으로 수고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즐거움이다. 육신이 세월과 함께 쇠약해지고, 또 삶이 곤고하며, 무엇보다 자기 옳다는 사람들의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 주어 섬기며 사는 삶이 세상 사람 보기에 미련해 보여도 자신의 삶이 창조의 목적대로, 인생이라는 존재 정체성대로 소비되고 사용됨이 기쁘고 즐겁다. 이 기쁨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과 다른 기쁨과 평안이고, 항상 기쁘고 범사가 감사한 삶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인내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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