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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9:11-22) 정결하게 하는 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1. 08:40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구속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와 보혈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안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한다는 것은 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왜 피가 구원이 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사후, 이후 영원히 영향을 미치는 문제인데 왜 예수님의 피가 자신을 구원하는지 모른다. 그냥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만 뇌까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다 피로 세운 것이고, 성소의 모든 기물들 역시 피로 정결케 됨을 상기시키고 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제사의 때에 제단과 지성소의 기물들에 제물의 피를 바르고 뿌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피로 인하여 성전과 제사장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정결하게 된다고 모세의 율법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가진 상식이라는 것도 사람이 만들거나 자신이 선택해서 태어날 때 가지고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 상식으로 생각해보자. 도대체 어떤 인과관계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인지. 정말로 죄는 내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이 받았다는 것 때문인가? 이런 관점에 대한 문제는 여러 차례 제기했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을 것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냐는 문제와 그렇다면 죄를 지을 것이 뻔한 사람을 왜 만들고 방치했는지에 대”한 문제가 또 생긴다. “죄는 사람이, 벌은 예수님이”라는 논리는 그릇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관점으로 예수님의 보혈과 구원의 인과관계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본(Mold)이다. “사람이란 이런 존재다”라는 것을 보인 것이다. 그 보이신 모습이 무엇인가 하면, 육신을 상하게 하니 물과 피가 나왔는데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면 “저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모습이 바로 자신과 같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므로 자신도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예수님이 본이 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법이 나온다.


물은 늘 그렇듯 말씀이고, 피는 생명이다. 육신을 자기 옳다는 주장 앞에 내어 놓으면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오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명이 된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이셨고, 그것은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고 모든 사람의 유일한 본분이므로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게 되니 구원이 된다. 그 방법과 본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보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가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다.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신 12:23)


성전의 모든 기물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의 피로 인하여 정결하게 된다고 율법을 정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가 되는 것이 온전한 제사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피가 뿌려진 기물과 사람이 정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 사람 안에 들어가서 생명이 됨을 예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가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는 마법사의 묘약 같은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제물을 잡아 피를 뿌리는 행위를 인함이 아니라 생명을 가질 때, 하나님이 생명이라 여기는 생명이 되었을 때 그때 정결하게 되고 구원이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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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9:11-22) 단번에 드린 제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3. 31. 10:32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의 제사가 단번에 드린 제사라는 것은 상용구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아들이 드린 제사기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렇게 알면 된다는 식이면 곤란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다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닌 것은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그냥 믿으라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동의 없는 믿음은 믿음도 아니고, 어떤 것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을 이유로 믿는 것은 장사에 불과한 것이다. 즉 왜 단번에 드린 제사며 그것이 나에게 은혜가 되는지 모른다면 예수님의 제사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성경을 신학적으로 학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해롭다. 만민을 위한 복음이니 사람으로서 하나님 말씀이 이치에 맞고 자신이 수용하기에 적합하여 그 말씀에 마음이 동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그런 의도로 기록되었으므로 학문화하여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역으로 가는 것이므로 신학이 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문자를 아는 사람이 읽으면 알 수 있도록, 문자를 모르면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에 “그렇다(아멘)” 인정되고 자신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것이 성경을 바로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사가 단번에 되었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한 번의 제사로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의미는 제사의 의미는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 밖에 없는 제사의 본질을 보이셨기 때문에 단번에 드린 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레위 계통의 제사는 매번 드리고 여러 명이 드린 이유는 본질이 아니라 형식으로 드렸기 때문이다. 사과라는 유전자는 하나지만 그 사과라는 유전자가 표현된 종은 여러 가지고 한 사람의 DNA는 하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양한 모양과 세포로 나타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레위 계통의 제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형식을 본질로 보는 것이 그렇다. 오늘날 사람들이 세례 하나에 대한 생각만 해도 여러가지 인 것을 보면 그렇다. 세례의 본질은 하나인데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한 것이 바로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제사의 유일한 본질을 보이신 제사다. 이것은 두 번이 필요 없는 것이다. 단 번이라고 하니 여러 번 할 것을 한 번으로 퉁 친 것이 아니다. 그냥 그게 전부이기 때문에 한 번으로 드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도 우리 자신과 인생 그것뿐임을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의 인생이 한 번 뿐이고, 육신도 하나 뿐인데 우리 삶을 드리는 제사가 두 번이 될 수는 없다. 하나 밖에 없는 것을 한 번 드리는데 단 번에 드린다고 하는 것 외에 다른 표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삶이 아니라 제사라는 것을 드리려 하니 여러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삶으로 나타난 것, 삶에 부속된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니 제사도 여러가지인 것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가중치와 순위와 가치를 논하며 선후와 서열을 매기게 된다. 그것은 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에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영역까지 그렇게 판단한다. 눈에 보이는 것, 나타난 형식과 외식에서 왔으니 나타난 세상의 것을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단번에 드린 제사라고 하는 것은 단지 횟수가 한 번이라서가 아니다. 유대인들이 수도 없이 드리던 제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다시 드리지 않아도 되니 단번에 드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본질적인 제사를 보였기 때문에 한 번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사람도 자기 삶을 예수님께서 명하신 대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으로 드리면 하나 뿐인 인생이므로 자신도 단번에 드린 제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볼 때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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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언약에 속한 사람은 형식을 본질로 본다. 그래서 제사의 예법 중 작은 하나도 소홀하거나 규례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도 교회에서 예배 순서나 행사 진행 시 작은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두고 다투기도 한다. 형식과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이 지켜지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두려움도 크게 작용한다.


염소와 황소와 암소의 재로 사람을 정하게 한다고 하니 그것을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은 내용을 알지 못함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니 안식일을 범한 것이라고 크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목적은 염소나 황소를 잡고 암소를 태워 재를 만들어 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정하게 하는 것이 제사의 목적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율법이 있고 제사와 규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칫 목적과 결론만 중요하게 여기고 과정은 무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행위냐 존재냐”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행함이라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목적을 지향하시는 것을 보면 수단은 불문하고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존재의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존재론 안에서 보면 목적과 수단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는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하다. 본성이 선하면 행함도 선하다. 그러나 방법이나 수단은 불문하고 목적만 이루면 된다고 할 때는 그것이 다르다.


형식은 영원하지 않다. 소 한 마리로 365일 제사를 드릴 수 없다. 문제는 형식을 본질로 보는 시각에서 소 한 마리가 불타고 없어지면 본질이 없어진 것과 같아지므로 또 다시 제사가 필요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기도하고 서원했는데 교회를 나서자 거짓말을 하게 되면 그간의 모든 경건함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것을 지키지 않은 것과 같아지는 이유의 하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제물이 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도 하나였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제사가 영원한가? 여기에 성령의 비밀이 있다.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인 십자가의 의미가 사람 안에 들어가면 성령께서 그것을 생명으로 잉태케하여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 성령이 영원하시니 그리스도의 일이 사람들에게 남아 있기만 하면 이것은 언제나 영원한 제사가 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들에게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을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와서 보이셨다. 그렇다면 사람이 존재하는 이상 그 목적은 항상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해도 항상 있다. 이미 영원한 상태다. 그 상태에서 사람이 십자가의 일로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함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또한 영원한 존재인 성령이다.


그런데 이 일은 장래의 일이라고 했다. 이것은 달력으로 장래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이시고 성령께서 항상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 일은 언제나 장래의 일이다.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구원은 항상 장래의 일이다. 군 미필자에게 군대는 항상 장래의 일이다. 그러나 전역하면 군필자로 살아가게 된다. 여권도 단수 여권에서 복수 여권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세상의 본질을 눈에 보이는 것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장래의 일이다. 장래의 일이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이다. 대한민국 남자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군필이 되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인생으로 났는데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살아가는 것은 미완의 삶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알 기회가 없었다고 핑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으로 난 자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을 말씀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십분 깨닫고 예수님이 보이신 것을 자기 존재 정체성으로 순종하고 믿으면 성령께서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나타내신 이것을 본질을 알기 원하면 이 장래의 일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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