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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에 온전한 분이라는 것을 설명해가고 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온전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사 집례를 잘 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온전함은 제사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루신 분이라는 의미다. 제사라는 것이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께 자신이 무언가를 드리는 것처럼 보이니 상당히 능동적으로 보일 지 모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굉장히 수동적인 것이다.


제사는 전혀 능동적인 규례가 아니다. 제사가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온전한 대제사장이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온전한 제사장이라는 것을 증명한 십자가가 전혀 능동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드린 제사는 그 자체가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가신 제사다. 십자가가 그렇다. 그 십자가로 희생의 제사를 드린 예수님이 온전하다는 것은 제사는 수동적일 때 온전하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제사를 제물을 드리는 것이라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왜 제물을 드리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죄를 사함 받는 번제가 모든 제사의 기본인데, 이는 자신이 죄 가운에 있으니 하나님께 그 죄를 사하여 달라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대신해서 제물이 되는 소나 양이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벌로 죽임을 당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예수님의 구속도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늘 도전을 받는다. 예수님이 벌을 받으신 것이 앞으로 지을 죄까지 다 합하여 벌을 받은 것이냐는 도전이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 지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느냐는 문제가 생기고, ‘아니라’하면 속함 받지 못하는 장래의 죄는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꼬리를 무는 것이다.


제사는 근본적으로 나를 드리는 것이다. 나를 드린다는 것은 제물이 되어 불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주관하시는 것에 순종하겠다는 것이다. 나를 드렸는데 불타고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사람을 대신해서 소나 양을 드리는 것이다. 소나 양을 번제로 드림으로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는 순종의 마음을 표현하고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가 순종하고 사는 것이 제사의 본질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지 않는 상태가 죄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죄기 때문에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이제 나의 자리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서원의 예식으로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제사의 본질이 이러하므로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온전함이 더 확실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다. 그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없다. 당연히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이 온전한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사와 희생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십자가로 보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온전한 제사장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도록,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과 제사 드리는 자가 되도록 하시는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 육신이 하나님의 뜻이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이셨기 때문이다. 바로 십자가다. 온전한 제사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보이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뜻에서 멀어져 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처럼 버린 적이 없다. 그는 원래 하나님의 본체이고, 하나님의 품속에 있던 것이 나타난 분이며 하나님과 하나인 분이다. 그는 한 번도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분인데 하나님의 의에서 벗어난 인생들이 하나님의 의 안으로 회복되는 것을 위해 몸소 하나님의 의와 뜻이 무엇인지 보이셨다. 십자가에서.


그 십자가는 세상의 가치 앞에 나를 내어주고 종과 죄인과 같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주장에 매몰된 사람들을 위해 육신을 내어 주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을 보이신 사건이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된 사건이다. 그리고 그렇게 죄인이 되니 의인임이 드러난 사건이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의를 떠난 적이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본체고 삼위 일체 중 한 위시다. 그것이 예수님이 죄가 없기에 우리를 구속하시기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합당하고 그의 제사가 우리에게 온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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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계통의 제사장의 수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하나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므로 직분이 갈리지 않는다. (히 7:23-24) 예수님께서 영원하시고 항상 살아있음을 인하여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이 항상 살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항상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의미다. 계약서나 어음과 같이 기한 있는 증표는 그 기간 중에 효력이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항상 살아 있다는 것은 구원을 얻어야 할 사람이 항상 있다는 것이고, 그들에게 항상 유효할 뿐 아니라 온전한 구원을 주시는 대제사장이라는 말이다. 영원함이 단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항상성을 함께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히브리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의 온전함이다.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은 죽음을 인하여 세대를 이어가므로 그 수가 많으므로 영원하지 않아서 온전하지 않고, 가장 절대적인 이유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레위 후손의 대제장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대제사장이 오신 것이므로 이전 것이 온전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 오셨다는 것으로 이전과 달리 온전한 대제사장임은 물론이고 항상 살아 있어 어느 세대, 어떤 사람에게도 온전한 구원의 대제사장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원함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태초부터’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원함을 산정하는 것은 세상의 ‘시작부터’라는 말이다. 그리고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에서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뜻이 영원히 동일하다는 것을 또 말씀하신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시간 개념을 달력의 시간 즉 크로노스적인 시간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시간은 기본적으로 상태적 시간이다. 이것을 카이로스라고 한다. 크로노스는 객관적 시간, 카이로스는 주관적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후 12시는 점심시간’이라고 정한 것은 객관적 시간 크로노스고, 배 고플 때 점심을 먹으면 그 시간이 점심시간이 되는 개념이 주관적 시간이고 카이로스다.


이것은 논리의 정리가 아니다. 성경을 볼 때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지금>은 너희가 내가 가는 곳에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자리로 가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지금”이라고 하는 시점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시점까지 시간은 흘렀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음을 제자들을 통해 알 수 있지만 모두에게 그 시간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이와 같이 시간이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나 항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구속에 속하게 될 때 예수님은 항상 살아 있는 대제사장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죽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항상 살아 있음은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구속이 항상 온전한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서뿐 아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고 그리스도로 거듭나기를 청하는 말씀이다. 그 청함에 순종하면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항상 살아 있다. 그렇게 항상 유효한 효력을 가지고 있으니 객관적 시간 관념에서도 영원이 되는 것이다. 언제라도 그리스도를 힘 입어 구속을 얻으려고 하면 온전케 하시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구속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항상 살아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과 그의 구속은 영원하지만 사람이 그의 성품과 구속에 참예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항상 살아 있는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원은 영원하고 항상 유효한 언약에 내가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이 영원하고, 그 약속을 하신 하나님이 영원하시니 내가 그것에 참여하면 나도 영원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다른 개체로서 내가 영원하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품속, 그의 의 안으로 내가 들어가므로 영원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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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0. 3. 21. 16:08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코로나로 얻게 된 시간(?)을 활용해서 쓰고 있는 <질그릇의 선택>이란 책의 후속 <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오랫동안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지 못해 일부를 올립니다. <질그릇의 선택>은 4월 중에 출간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오셨다. 성령이 오시니 그렇게 갈등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은 한 순간에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구원자요 그리스도라는 것의 증인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증인이란 증거와 하나가 된 사람이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 또한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전에 믿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낯선 그리스도가 이제 자신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성령이 오신 날은 오순절이었다. 그렇다고 성령이 달력으로 오순절에 오시는 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오순절보다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른다. 달력으로 유월절 후 50일째 되는 오순절이라는 날이 성령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신 날이 오순절이다. 성경의 수로 의미를 따진다면 5는 회복의 수다. 유월절 이후 50일째라는 오순절은 유월절의 의미가 회복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그 회복은 성령으로 인함이다.


성령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은 구속의 유월절의 본질은 없이 그냥 형식적으로만 지키던 유월절, 그리스도가 와서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키던 유월절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아래서 종살이하던 것을 그치고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날이 오순절이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내 삶을 드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출애굽이고 구원이며 유월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내 삶을 드린다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어 육신의 행동과 삶 모두가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케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 없이 되지 않는다. 성령이 오셔야만 한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니 기이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들이 여러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바벨탑을 쌓을 때 방언이 여러가지로 됨을 인하여 사람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과 반대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니아,본도와 아시아, 브로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1:9-11)


성령이 충만하게 되어 여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바벨탑과 완전히 대비가 된다. 바벨탑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닿으려고 쌓은 탑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악하게 여기시므로 사람들의 말을 다르게 하여 모두가 흩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심을 인해서도 사람들이 각자가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큰 일을 알아들었다. 


두 사건 모두 하나님이 사람들의 말을 다르게 했는데 하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악하게 여기심으로 다르게 하셨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충만함을 인하여 서로 다른 방언을 말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악하게 여기신 바벨의 때에는 서로 말이 달라져 알아듣지 못하므로 탑을 계속 쌓을 수 없게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반대로 성령의 감동으로 다른 방언을 말하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게 되었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겠다 생각한 사람들의 마음은 위로 가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세상의 높은 곳에 가야한다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왕이고 세상에서 이긴 자라 생각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 주지 않았다. 하나님은 높아지려는 자를 만나지 않는다. 오히려 낮추신다. 


하나님은 높아지려는 자들의 말을 다르게 했다. 말이 다르다는 것은 생각이 달랐다는 것이다. 높아지려는 것은 같지만 모두 자기 기준으로 높아지려 했다. 결론은 이기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높아지지 말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다르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 달라졌다고 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 위로 가는 것은 같은 것 같지만 모두 다르다.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사람 수 만큼 다른 말이 있다.


오순절 성령의 때에도 여러가지 방언으로 말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벨탑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여러 방언으로 말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다 우리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다”고 고백했다. 성령,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는 영이 임하여 여러 방언으로 말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가치관과 철학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같은 현상, 같은 요인이라도 하나님이 하시면 능력이 되고, 사람의 의지로 하면 죄가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에게 주신 모든 본능과, 세상의 모든 일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누가 주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끼리 동일하게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를 앙망하면서도 그 메시아,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달랐는데 성령이 오시니 유대인뿐 아니라 각 국의 모든 민족들이 다 자신들의 방언으로 하나님의 일을 듣게 되고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요10:25)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1)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사람들이 믿지 않았는데 성령이 오시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인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게 되었다. 성령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알게 하심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고 믿게 되었다. 자신들의 상상과 기대 속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온전한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이 그리스도가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임을 믿게 되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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