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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쓰고 있습니다...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20. 3. 3. 19:21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김홍덕입니다.


저는 요즘 가장 핫한 도시 대구에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저의 안부를 물어주시는 독자분이 계셔서 놀랐을 뿐 아니라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무사합니다. 확진자가 대구에 발생했을 때부터 거의 외출을 하지 않고 있는 중입니다. 이에 따른 복합적인 문제는 사태가 진정된 다음에 하나씩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졸지에 갇히듯 생긴 시간에 작년부터 계획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블로그에 글이 올라가는 것도 좀 띄엄띄엄하게 되었습니다. 책 제목은 어디선가 언급한 것 같은데 "질그릇의 선택(안)"입니다. 현재 5월 안으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이번에는 종이책으로 출간합니다.


"질그릇의 선택(안)" 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이 출판되고 나면 유튜브를 활성화할 계획입니다. 현재 화면에 그림만 나가고 있는데 동영상과 기술이 된다면 관련 자료들까지 나가도록 했으면 하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있는 동안 영상편집 일부까지 좀 익힐 수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만 혼자서 하는 일이라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도전해 보고 있습니다.


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아시는 독자분들이 계셔서 문안해 주심을 보고 늦었지만 무사하다는 인사와, 현재 블로그 글이 이전과 달리 올라가는 간격이 길어지는 이유에 대하여 안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2020년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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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받는 그의 후손인 레위 지파가 생기기도 전에 멜기세댁에게 자신의 십일조를 드렸다. 레위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에게 드린 제사가 더 크고 상위의 제사라는 의미라고 히브리서는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사의 구조로 볼 때 레위인의 제사가 온전하다면 멜기세댁의 제사가 있어야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하면서 멜기세댁의 제사장으로써 온전함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의 근거와 동일한 배경 설명이다. 율법을 완성하러 누군가가 오셨다면 당연히 율법은 온전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온전한 제사, 온전한 율법이 있는데 그 보다 더 상위의 제사와 제사장이 왜 필요하면 율법을 완성하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질 이유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상식적인 논리다. 


다만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온전하지 못한 것을 사람에게 주시고 시켰는가의 문제다. 멜기세댁이라는 온전한 제사장과 그의 제사가 있는데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 지파를 통해서 드리는 제사를 왜 계명으로 주셨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해야 하는 온전하지 않은 율법을 주시고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했는지가 의문스러운 것이다. 그것을 의문스럽게 여기는 것이 온전한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들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달력,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예수님 오신 다음 세대를 살고 있기에 성경대로 사는 것이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과, 돈으로 십일조를 내는 예배를 참석하는 것이 온전한 제사라고 착각하는 문제만 뺀다면.


이 문제는 사실 어려운 것이다.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왜 온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람이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므로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는 프레임은 뭔가 기만 같기 때문이다. 제사 역시 하나님께서 제사의 작은 행위까지 모세를 통하여 주시고서 나중에는 성전 문을 좀 닫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시는 것은 자가당착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히브리서는 멜기세댁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먼저 멜기세댁에 먼저 있었다는 것,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을 축복했다는 것에서 멜기세댁에 제사를 지낸 레위 자손의 조상인 아브라함보다 큰 자라는 것에서 하나님께 온전한 의를 나타내심이 먼저 있었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것이 그 뒤에 있었고 작은 것이라는 것을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멜기세댁이라는 온전한 제사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제사장을 통해서 온전한 제사를 먼저 보이셨다는 것이다.


이는 창세기의 구조에서도 알 수 있다. 먼저 온전한 사람의 창조,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온전한 사람의 창조를 먼저 설명하고 그 이후에 사람이 타락하고 그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설명하심도 동일한 구조이다. 또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태초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 이 모든 구조의 뿌리다.


하나님께서 안식한 창조된 사람, 멜기세댁, 예수님 이 모두가 사람들이 타락하기 전에 그래서 제사를 지내고 자신을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기 이전에 보이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다. 그 모든 것이 먼저 있는 것이다. 집이 있기 전에 설계도와 집을 짓겠다는 집주의 의도가 먼저 있었던 것과 같이.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기 눈에 보이는 중에서 무엇이 의로운지를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다. 강제된 순종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온전한 것을 먼저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먹듯이 자기 눈에 좋은 것을 선택하고,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제사를 드리고, 자기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얻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려 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혼인하여 네피림을 낳고 홍수를 맞은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당연히 선악과가 그 뿌리다.


온전한 제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뜻이 자기 삶을 주관하게 자신을 드리는 것임을 계속 설명해왔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존재로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사는 것이 온전한 제사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고, 거룩한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 십일조는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고백하는 증표다. 그것이 온전한 제사다. 그리고 그 제사가 사람으로 표현된 존재가 바로 멜기세댁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뜻이 자기 본성이 된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가 되면 그 사람은 멜기세댁의 반차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거룩한 산 제사로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의 모양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보이신 것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옳다고 주장하는 주장 앞에 자기를 내어 주어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제사다. 그 삶을 사는 사람의 삶은 부인하려 해도,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제사의 규례나 율법은 물론 모든 성경을 지킬 수밖에 없는 삶이 된다. 본성이 이끄는 생명의 특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의는 외면하고 그 형식만 취했다. 사람의 딸들, 곧 세상의 형식의 아름다움을 자기 아내로 삼듯이. 자기 육신의 정욕을 성취를 하나님께 받기 위해 하나님께 값을 치르듯이 제물로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온전하지 않기에 양심에 화인 맞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온전해질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정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 밖에서의 수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니 그 당연함을 아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성경이 가진 기본 구조와 같다.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뜻을 사람에게 보이시고, 사람이 그것을 순종함으로 선택하든지 아니면 자기 눈에 보이는 대보 살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은 창조주가 정한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그 목적 안에 있으면 자리가 회복된 구원과 평안과 안식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인식하듯 삶은 괴로운 것이 된다. 


이를 제사로 보면 목적에 순종한 사람은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 멜기세댁의 반차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영원히 그 반차에 들어가셨다는 것이 그것이고, 그것을 순종하는 사람 역시 그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멜기세댁을 이끌어내어 설명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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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제사장의 본질적 개념이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듯 멜기세덱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가진 본질적 의미와 그 제사장의 직분이 육신이 된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자기 육신의 희생을 드린다는 의미다. 그것은 육신을 번제로 제단에서 태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육신을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하는 것에 순종한다는 의미다. 그것이 제사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유명한 말씀은 한 순간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서 있는 말씀도 아니고, 육신의 노력이 전부인 신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순종하라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말씀은 더더욱 아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분명히 여러 성경에서 제사라고 하고 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지신 십자가라는 제사는 예수님의 순종이 본질이고 그것이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제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을 사람이 수용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성경 히브리서는 7장에서 멜기세덱을 “살렘 왕”이라고 한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이름이고, 예루살렘은 “평화의 땅, 성읍”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땅이 평안하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짐에 있어 저항이나 문제가 없다는 의미다. 멜기세덱이 살렘 왕이라는 것은 땅이 온전히 순종하는 것의 표상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사라는 것이, 멜기세덱은 그 제사의 대제사장이고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시듯 그 제사가 육신으로 대변되는 존재라는 의미다.


특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맬기세댁의 반차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순종의 제사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며, 그 제사의 본질적 의미를 대변하는 직분이 대제사장이며, 그 대제사장의 상징이 멜기세덱이기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그 본질적 제사를 십자가로 온전케 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대제사장이시니 녹색사과나 빨간사과나 모두 사과 안에 있듯 하나님의 제사를 몸소 순종하신 예수님과 그 제사를 대변하는 사람인 멜기세덱은 같은 반차에 속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에 집중하는 것은 손가락으로 저기를 보라고 할 때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지금 히브리서의 말씀은 멜기세덱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시고자 하심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제사를 우리를 위하여 드리심으로 우리가 불순종하는 자리에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순종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서 그 십자가가 순종으로 드린 본질적인 제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다.


믿음 역시 수동적인 것이다. 아들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들이 내 뜻대로 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역시 그렇다.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과 그 결과를 추진하는 자신을 도와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이 자신을 주관하도록 자신을 드리는 것이 믿음이고 제사며 순종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제사가 그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놋뱀이 들리듯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모습과 다른 자신의 삶과 모습이 뱀과 같은 죄인이라는 고백과 그 반대에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을 주관히신 것임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삶을 하나님께 드림이 자기 존재의 목적임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제사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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