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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아론 후손과 지속적으로 대비한다. 그 이유는 앞선 포스팅에서 설명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맹세로 된 제사장이고 레위 후손들은 맹세 없이 된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맹세에 대하여 6:1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보다 더 큰 자가 없어서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신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은 그 말씀이 곧 맹세와 같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반드시 지키시니 세상의 어떤 맹세나 보증보다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 자손과 달리 예수님은 맹세로 세워진 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계획에 의하여 세워진 제사장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레위 후손이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제사장은 아니다. 제사장이라는 직분은 온전하나 레위 자손인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주신 속 뜻이 육신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대비가 된다고 보면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맹세 이상의 확실한 것이나 사람이 자기 것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맹세나 약속은 모두 사람이 사람이 순종했을 때 그 사람에게 온전하고 효력이 있는 것이다. 군에 딱지 치기 할 정도로 성경이 많지만 그것이 생명의 말씀이 된 사람은 따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로 인함이라고 하는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정하신 뜻, 그 계획인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씀과 같다.


그리고 이것은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말과 궤를 같이 한다.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시는 것은 제사의 의미, 제사를 주신 하나님의 뜻, 사람 안에 들어가셔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게 하시겠다는 창세 전부터 영원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었으니 영원한 제사장이다. 반면에 레위 후손들은 그 삶이 하나님 말씀의 의미와 하나가 되지 않았으니 육신 그것이 전부다. 그러므로 육신이 죽으면 그것을 끝이다. 단지 육신으로 낳은 후손이 또 그렇게 이어가는 것밖에 없다.


이로 볼 때 하나님께서 맹세로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세웠다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온전한 대제사장이라는 말씀과,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말씀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과 삶을 형식으로 그 성품을 나타내시려는 뜻에 자기 육신의 삶을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의 삶이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셨고, 또 우리 모든 육신들도 그것이 존재의 목적임을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그래서 십자가가 온전한 제사고 그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나타났으니 맹세가 이루어진 것이고, 그 보이신 모든 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니 영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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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예수님을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사를 집례해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제사를 집례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제사를 위하여 제물을 파는 사람들의 상을 엎고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사장인 것은 제사의 목적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제사와 제사장의 존재 이유는 사람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모든 제사와 제사장의 존재 이유의 본질이다.


전투에선 이기고 전쟁에서는 진다는 말이 있다. 전투의 목적은 전쟁을 이기는 것인데 산발적인 전투는 이겼는데 정작 전쟁을 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축구에서 공을 점유하는 점유율이 설사 90% 이상이었다고 해도 골을 적게 넣었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제사의 모든 규례를 지켜 수 없는 제사를 드렸다고 해도 제사의 목적인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되게 못한다면 소용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이 나타났다는 것은 모든 제사가 소용없는 제사였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제사장들과 이전의 제사가 온전하다면 멜기세덱이 왜 필요하겠는가?


이것은 사실 율법도 같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다. 예수님 이전에 율법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나 제사 모두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왜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는가? 사람들은 이런 질문에 매우 당황한다. 그 이유는 율법과 제사를 자기 밖에서 객관적인 명제로 정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온전한 분인데 그 분이 주신 율법과 제사가 온전하지 않을리 없다. 율법과 제사가 온전하지 않은 것은 사람이 온전하게 받지 않아서 그렇다. 즉 사람 심령 안에, 각 개인의 심령 안에 온전해지지 않아서 온전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제사를 주셨는데 주신 형식만 지키고 뜻은 버린 것이다. 전투는 이겼고, 점유율은 높은데 전쟁도 경기도 진 것과 같다.


율법이나 예수님이나 모두 한 개인이 자기 심령에 온전히 받기 전에는 어차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건 자기 세계가 아니다. 학교가 그렇게 많아도 모교는 하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나와 상관 있는 나에게 그 학교의 세계가 있는 학교는 내가 다니고 졸업한 곳 뿐이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제사를 주셨는데 사람이 주신 의를 모르고 형식만 지키면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려면 바다에 뛰어 들어야 한다고 이해하나 것과 같다. 그건 심청전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비유(막 12장)를 하신 적이 있다. 율법과 제사 그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여 멜기세덱과 예수님이 오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이 나쁜 사람이라는 의미가.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의미를 잘 새기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속에 여전히 율법과 제사의 의미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하면 이 모든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냥 자신과 같은 생각이 성경에 있는 정도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시든, 제사를 정하든, 성경을 주시든, 아들을 보내든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다.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한 분이고 그 뜻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을 만드실 때 뜻하신 것을 원하심이다.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삶이 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고, 제사를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셔서 그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려 하니 너의 마음에 들어가게 너를 허락해 달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율법의 의는 모르고 그 형식만 지키고, 자신의 삶과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오심은 순종하지 않고 제사만 드리니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을 보내셔서 율법과 제사를 주신 뜻이 사람 안에서 완성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율법의 완성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한 제사라고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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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의 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명에 대한 말씀을 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예수님이 온전한 대제사장이자 예수님의 제사 곧 십자가가 온전한 제사라는 것을 말씀하려 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사람의 죄를 속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사람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얻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온전한 제사라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던 온전한 멜기세덱을 소환하여 예수님이 그 반차에 속한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온전한 제사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사가 온전하므로 멜기세덱의 반차에 속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예수님의 제사는 이전의 제사와 다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제사가 달라졌다는 것은 율법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온전한 제사이듯, 율법을 완성했다는 말로 율법도 달라졌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제사와 율법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전 제사는 형식적이었으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온전하고, 이전에는 행함으로 율법을 지켰으나 이제는 율법을 주신 의가 사람의 본성이 되므로 살기만 하면 모든 율법이 지켜지는 세계로 바뀌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드린 제사인 십자가는 사람이 육신을 가진 이유를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향유옥합과 같이 육신을 깨뜨리시니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람에게 구원이다. 사람이 자기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다.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이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가 아들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숨었을 때 가죽옷을 해 입히셨다. 그것은 어떤 희생이 있어야 구속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 달려 깨어지므로 십자가 아래 백부장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고백한 것과 같이 그 속에 있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정체성, 아들의 본질인 아버지의 성품이 드러났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의로운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종이 되어 육신으로 수고하는 희생을 하면 그 모습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다. 그 모습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존재와 형상(이미지)과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생이고 이것이 바로 산 제사다.


<질그릇의 선택> 중에서


그래서 십자가가 가장 온전한 제사다. 예수님의 희생과 제사는 예수님이 했으니 온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대로 드려진 제사이기 때문에 온전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의가 거하는 육신의 희생, 세상의 가치 앞에 육신으로 수고하고, 종이 되고, 심지어 목숨을 내어주므로 그 속에 거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되는 법이다. 그렇게 나타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영광이란 ‘나타난다’는 의미니까.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육신이 사용되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온전한 제사다. 이런 삶, 이런 제사를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먼저 하나님의 의가 내제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니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육신도 저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함임을 알게 되니 그것이 번제고 희생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온전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온전한 제사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므로 율법도 완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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