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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기록 당시의 성경과 규례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모든 것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율법과 규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하라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가 가장 잘 나타난 말은 아무래도 믿음장이라고 하는 11장의 3절 말씀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예법과 성막,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등대와 상과 진설병과 같은 모든 것은 첫번째 언약에 관한 것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첫번째 언약과 새롭게 한 언약의 차이는 형식과 내용에 관한 말씀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형식과 내용을 나누어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람들이 형식만 지키는 것을 첫 번째 언약이라고 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께서 율법과 규례를 주신 목적과 의미를 보여주신 것이 새 언약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나타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는 내용이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명을 주실 때 이미 그 계명을 주신 목적과 의도가 분명하게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외면하므로 새 언약이 필요한 계명이 된 것이다. 내용과 뜻은 외면하니 율법이 되고 첫 번째 언약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첫 번째 두 번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뜻을 사람이 자기 맘대로 받음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니 예수님 오시기 전의 것이 첫 번째 것이 된 것이다.


이것은 성소의 구조에서도 증명이 된다. 첫 번째 성소가 있고, 다음 지성소가 있는데 이 지성소에는 피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모세의 율법에도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피 흘림이 있어야 했고, 지성소는 함부로 들어가지도 못했고 들어 갈 때도 향을 피워 안이 보이지 않게 했다. (레 16장) 이런 모든 규례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비유라고 했다. 지성소의 모양과 규례가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히 9:9)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개혁이 있을 때까지 해당하는 육체의 예법이라고 말씀한다. 이는 육신으로 지켜내는 모든 것은 형식이고 나타난 것이고 개혁 곧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오는 개혁이의 때까지 유효한 일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면 이 모든 형식에 관한 것, 비유로 나타난 것은 다 옛 것이 되고 하나님께서 의와 뜻이 형식과 하나가 된 온전한 제사와 율법과 규례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에서 유념할 것은 히브리서가 율법과 유대인들의 제사의 규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시대와 민족과 관습이 다른 오늘날의 사람들이 개혁 없이 이 말씀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가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는데 단지 AD시대를 산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신이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사람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항상 언급하는 것으로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시대의 차이나 구약, 신약의 차이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는 첫 언약이 된 율법이 단지 모세의 계명과 구약 성경의 계명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모세에게 주신 계명이 온전하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주신 것이 아니다. 계명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전에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형식만 지킴으로 사람이 율법을 만들었다.


계명의 본질이나 내용인 하나님의 의는 외면하고 제사와 규례만 남았다고 하는 것은 제사를 지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면 하나님을 섬기는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면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모습이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십일조와 교회에서 정한 헌금을 한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바칠 것을 잘 바쳤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거지가 아니다. 


또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배와 교회에 모임에 참석하는 것으로 또 하나님께 본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하나님이 필요하신 것은 우리의 삶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이 되도록 하나님의 임재에 나를 드리는 것이 본론이다. 그것 없이 헌금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모두 육체의 예법이다. 그것으로는 온전한 제사가 될 수 없다. 당연히 예수님이 드린 제사도 아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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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제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새로운 법을 주셨다는 말씀은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 전반에 깔려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도 성경에 여러 번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8장에도 나온다.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새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연약과 같지 아니하도다(히 8:8-9상)


성경을 읽고 볼 때 이런 사소한 의문을 가지면 빨리 성경을 알 수 있다. 조건이 있다면 의문이 되는 괴리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특히 하나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두고 문제에 접근하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늘 교정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무궁히 언제나 동일하시다고 했는데 새로운 언약을 주신다고 하시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면 한 마디로 새 언약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새 것에 관심이 없으니 지금 것에 만족하고 있고, 또 누가 새것이 있다고 해도 갈등하시 않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운 언약을 스스로 번복하시나는 말씀은 당연히 이상해야 한다. 특히 사람인 나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하나님의 법이 바뀌었다면 재빨리 그 법에 적용을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분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여기서 기준은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분이라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언약을 번복하는 것은 나타난 것이고, 변치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본성이지만 어떨 때는 혼내고 어떨 때는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 그렇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새 언약을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게 되면 사람에게는 새로운 법이다. 이것은 궤변이 아니다. 육신으로 나서 세상을 자기 좋을 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세계, 태초가 열리는 것이다. 그렇게 거듭난 사람이 되면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알고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기 전이나 열린 다음이나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셨는데 나 자신이 새로운 법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안다. (사실 이런 고백과 경험이 없다면 거듭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다.)


히브리서 중반에 제사에 관하여 특히 예수님께서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제사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달라진 것은 하나님께서 제사에 대하여 생각하신 것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달라진 것은 내용 없이 형식만 하나님께 드려지던 제사가 내용이 온전해진 제사가 된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그 심령에 순종하므로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이 되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이 자기 삶을 하나님께서 주관하도록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제사의 본질이다. 그런데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그들의 제사는 그 본질이 아니라 형식만 준수하므로 하나님께 드릴 제사에 대한 책무를 다했다고 여기는 제사다. 행위로 하나님의 뜻을 다한 것으로 여기는 면죄부 비슷한 것이다.


그런 제사가 온전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지를 십자가에서 보이셨다. 육신을 죽음에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로 가신 과정과 의미가 핵심이다.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주장을 실현하는 것에 나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것임이 보이셨다. 


그것이 십자가의 핵심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 옳다는 것에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것, 하나님은 나의 삶을 그것에 쓰시겠다고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제사는 다음이 아니라 나의 삶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지, 소나 양을 잡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소나 양 대신 돈을 내는 것이 온전한 제사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과 그 안에 있는 제사의 본질을 보이셨다. 그로 인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의 보내신 뜻이 모든 사람이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악인을 위하여 악인들의 주장에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임을 보고 자기 삶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이 그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나와 그들의 삶이 온전한 제사가 되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언약과 율법이 완성된 것이다. 형식만 지키는 법에서 온전한 내용을 지키는 세계가 열린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새 언약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새 언약을 돌에 새긴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긴 것이라고 하신다. 심령에 하나님의 법이 있어 그 법이 그 사람의 삶을 주관하는 법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새 언약이 열린 것이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라라(히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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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만약 예수님께서 땅에 계셨다면 대제사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땅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말을 단순하게 예수님은 원래 하늘에 계시던 분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은 아니다. 왜 땅에서 대제사장이 날 수 없는지를 알아야 이 말씀을 바로 아는 것이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히 8:4)


하나님 아들은 어느 곳에 가면 그 정체성이 변하는 분이 아니다. 땅에 계시나 하늘에 계시나 언제나 하나님 아들이고, 또 온전한 제사장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땅에 계시면 제사장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땅에 있는 것이 온전한 제사의 제물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율법 아래 있는 것, 율법대로 드리는 것이 온전한 제사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고, 땅에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근본적으로 하늘의 어떠함을 보이는 곳이다. 땅이 본질이 아니라 하늘의 상태가 본질이다. 땅에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봄이 되어 땅에 꽃이 피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의가 본질이라는 말이다. 율법과 규례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형식이지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생각은 히브리서의 밑바닥에 흐르는 가치관이다. 11장에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정리된다. 


예수님께서 땅에 계셨으면 온전한 제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땅에 오면 온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땅에 있는 것은 예수님과 다르다는 말이다. 땅에 있는 율법과 그 아래 있는 제물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앞장에서부터 계속 땅의 것이 온전하면 예수님께서 왜 오셨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땅이 온전하지 않은 이유는 땅과 눈에 보이는 것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자 본질이 있고, 그것을 표현한 형식으로서 땅과 사람과 율법이 있는 것이다. 율법이나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된, 즉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예수님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땅에 있는 율법들이 늘 하나님과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것도 내용인 하나님의 의는 버리고 형식만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형식만을 본질로 보고 그것에 의지하여 드리는 제사와 제물이 온전할 리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도 역시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약속과 증거, 보이는 것과 나타내려고 한 것과 같은 대비는 물로 제사와 관련하여 레위 계통의 제사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하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온전함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히브리서를 읽는 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인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한다. 그래서 12장에서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것이 더 나은 약속이라는 말씀을 하기 위함이다. 율법과 그 아래에서 난 규례와 제물은 나타난 것일 뿐 나타내려는 본질 그 자체가 아니다. 증거이긴 하나 약속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려면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것도 아니고, 형식인 율법과 규례와 또 눈으로 대하는 성경의 문자를 섬기고 지킬 것이 아다. 핵심은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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