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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죄를 사함 받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가진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함이다. 그리고 죄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죄에 따른 결과가 담보되어 있기 때문에 죄 지은 사람에게 죄 사함은 죄에 담보된 형벌을 면하게 된다. 사람은 불확실성을 크게 두려워하므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통제할 수 없는 형벌 같은 일 당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한다. 부지불식 중에 지은 죄로 인하여 뜻하지 않은 난관이나 벌이라 생각되는 고난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많은 신앙을 만들어 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종교가 생겨났다는 말이다. 그러나 죄에 담보된 형벌을 피하고자 하는 것에서 핵심은 정죄와 형벌의 기준이다. 행위가 기준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의가 기준인지가 문제라는 것이다. 행동으로 죄를 범하므로 육신의 삶에 평안과 성공을 저해하는 벌을 받는다는 것이 많은 종교를 자아낸 사람의 생각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의 뿌리인데 이 생각의 가장 큰 문제는 행위가 기반이므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자신이 죄가 없느냐에 대하여 자신하고 믿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나타난다기 보다 모두의 마음이 그러한데 다들 숨기고 있다. 그러다 “구원받은 사람이 왜 화를 내느냐?”와 같이 구원을 받았다면서 육신이 어떤 범죄를 저지르면 혼란스러워한다. 특히 그 당자사가 자신이라면 더 그렇다. 구원은 받았는데 죄는 계속 범하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다행인지 문제가 심화된 것인지 몰라도 이것에 대하여 대체로 침묵하고 여러가지 신학적 해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론은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니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할 뿐”으로 정리된다.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스스로 죄 없다 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해결되지 않은 것


이 모든 문제의 뼈대는 바로 정죄의 기준이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위는 지속적으로 설명한 것과 같이 나타난 것이지 본질이 아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생각이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나타난 행위가 정죄의 기준이 되니 형벌도 형식에 관한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면 벌 받는다”라는 말에서 “벌”은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죄를 정하는 기준은 “의”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하는 죄와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죄가 다른 이유가 그것이다. 정죄의 기준이 나타난 행위에 있다는 것은 의가 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다.


이런 믿음과 신앙은 반복적인 회개를 요구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기도를 가르칠 때 “감사 – 회개 – 간구 – 아멘”이라는 순서가 정립된 것이다. 회개를 빠트릴 수 없다. 목적은 죄를 사함 받는 것에 있는 것 같지만 핵심은 간구의 효율성을 위한 것이다. 죄로 인한 형벌을 면하고, 죄로 인하여 구하는 것이 막히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일 뿐이다. 어차피 다음 기도에 또 회개해야 한다. 죄가 사하여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에 또 회개하겠다고 하는데 죄사함이 목적일리 없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를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런 반복이 바로 레위 계통의 제사다. 계속 드리는 제사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제시하는 대로 기도할 때 항상 회개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신앙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생각, 곧 율법에 속한 신앙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제사가 매번 계속되고 있지 않는가? 매번 회개해야 하고,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니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그들의 신앙에 단번에 드린 예수님의 제사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은 레위 계통의 제사요, 율법이며,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믿음일 뿐이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없는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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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사, 십자가로 드린 희생의 제사는 참 것이고, 다시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 중에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시지 않고 참 하늘에 들어갔다는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 9:24)


이것은 다분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신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땅의 모든 것은 하늘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변하면 땅이 변하는 것도 그렇고, 하늘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으니 이 땅에도 교회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이 하늘은 물리적, 천체 물리학적 하늘이 아니다. 이것은 의와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제사를 드리고 <참>하늘에 속했다는 말에 의미가 무색해진다. 파란 하늘이 참 된 것이라는 것인데 우주를 놓고 보면 남반구에서 보는 우주와 북반구에서 보는 우주는 만날 수조차 없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다고 할 것인가? 또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사람들이 그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육안으로 인지할 수 있는 속도로 하늘로 갔다면 얼마나 가야 하늘나라가 되는지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 보이저 1,2호가 해왕성 밖으로 가는데 수십년이 걸렸는데 예수님은 2천년전에 올라가셨으니 어디쯤 가고 계신지 설명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하늘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늘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하늘은 의와 뜻이다. 형식인 모든 세상의 내용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하늘이다. 우주 공간이 아니다. 의와 뜻이 있는 곳이 하늘이다. 예수님께서 참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의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말씀이다. 십자가에서 보이시니 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니 그것으로 하늘에 속한 것이다. 의와 뜻이 있는 어떤 공간에 들어가셨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이 바로 참 하늘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과가 마트에 있든 시장에 있든 다 사과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가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의 의 안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심으로 인하여 성령이 오셨다. 이것은 바통 터치가 아니다. 결혼하여 동침함과 잉태되는 것은 분리된 사건이 아닌 것처럼 하나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 구속의 본질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속도로변에 있는 광고판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인지하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것이다. 광야에 들린 놋뱀도 본 사람만 나은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을 본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본 사람은 백부장 뿐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들어가셨다는 것이 참 것으로 들어 간 것으로 인지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의 참 된 제사와 뜻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보이는 사람은 성령이 잉테케 하신다. 예수님이 드린 십자가의 희생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순간이고 사람이다.


히브리서에서 제사를 언급하고, 멜기세덱을 소환하여 온전한 제사, 참 된 것을 설명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신 구속의 역사의 온전함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레위 계통의 제사와 비교를 한다. 레위 계통의 제사는 반복적이며, 다양하고, 많은 제사장이 필요한 반면 예수님의 제사는 단번에 드리는 것으로 충분하고, 유일하며,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한 제사임을 설명한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용이고 본질이며, 율법과 레위 계통의 제사는 그 내용이 나타난 하나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이신 것은 참 것이고 형식으로 드리는 제사는 모형이고 참된 하늘의 것의 그림자다. 이것이 “과연 그렇구나!”라고 발견되는 것은 정말로 큰 은혜다.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세상에서 하는 공부도 그 이치를 깨달으면 놀라운데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고 그것이 참된 것이며, 하늘에 속한 것임을 아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이때까지 모든 가치의 근원이라 생각했던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갈 수 있는 낮은 자리로 가는 것임을 알 때 더 놀란다. 참된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누구에게나 쉽고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너 옳다”라고 하는 그 하나가 바로 참된 희생이고 제사다. 그런 삶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참 것,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그의 뜻과 의로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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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9:23-28) 참 것의 그림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2. 13:10 Writer : 김홍덕


히브리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과 그 보이는 것을 나타나게 한 본질에 대한 명확한 구분 설명을 많이 하고 있다. 이 설명은 히브리서 기자의 집착 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TV가 본질이 아니고 방송되는 컨텐츠가 본질이고, 책에 인쇄된 문자가 본질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 철학이 본질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가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인하여 생긴 삶의 의미가 본질인 것이 그렇다.


제사와 율법도 명확하게 나타난 세상과 같이 형식이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이것에 대하여 성경은 손으로 지은 것, 외식과 같은 것으로 표현한다. 히브리서에서 제사와 관련해서는 레위의 계통이 집례하는 제사를 또 그것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구분이 명확하게 이해되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학문적 소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행간을 볼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있다면 수용적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의도하는 대로 성경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모세의 율법에 의한 성전은 모형이고 하늘에 있는 참 것의 그림자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성전이 그러하다면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은 모형이다. 모형은 본질을 기준으로 정결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늘 정결하게 하는 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모든 제사의 유일한 본질인 삶을 드리는 생명이 되는 법을 대표하여 피 흘림이 있고, 모든 모형에 그 의미로 흘린 피를 뿌려서 정결케 한 것이다. 그것이 모세의 제사고 레위 계통의 제사다. 오늘날 주보에 적힌 예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율법과 레위 계통의 제사가 모형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이 말씀의 행간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두들 본질로 여기는 것을 모형이고 형식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은 무엇이 본질인지를 알기 원함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것의 본질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 원하기에 이때까지 모든 사람들이 본질로 여기며 살고 있는 것을 모형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대라도 히브리서를 대하는 모든 사람은 이 의도에 맞게 히브리서를 대하고 자신이 무엇을 본질로 여기면서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성소는 참 것의 그림자라고 했다. 참 것은 제사의 본질이다. 제사는 신께 헌신하는 것이다. 육체를 불살라 드리는 것은 의미 없다. 목적이 있어 주신 육체를 불사르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제사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하시는 것에 나를 드리는 것이다. 하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나의 육신을 통해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찔리시니 하나님 아들임이 드러난 것처럼. 아들이 드러났다면 당연히 아버지의 존재와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다.


그러나 이 본질은 외면하고 그 본질의 그림자,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모형과 그림자를 좇으면 한 번에 되지 않는다. 아니 영원히 되지 않을 수 있다. 본질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께 아들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는 종들은 아무리 많이 나와도 소용없다. 레위 계통의 제사가 종류가 많고, 그 횟수가 끊이지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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