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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에서는 회개할 수 없는 타락을 말씀하였다. 그리고 10장에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죄에 대한 말씀이 있다. 이렇게 예수님의 구원을 무력화하는 죄가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걱정거리가 된다. 그러나 6장을 설명할 때 언급한 것처럼 구원이 무력화되는 죄를 범하려면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걱정하지만 구원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다. 먼저 쓴 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스스로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럼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괜히 겁주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아니 이치가 그렇다. 죄가 없지 않은데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보면서 “혹시 나도?”라고 걱정이 된다면 이미 죄책감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이 없는 상태이므로 이 말씀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먼저다.


지금 속죄하는 제사가 없는 죄는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범한 죄라고 말씀한다. 범죄의 유형이나 종류가 무엇이든 예수님의 제사가 단번에 드리는 제사이므로 다시 드려지지 않는다. 제사의 횟수는 정죄하는 기준이 행위에 있을 때 의미가 있다. 행위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므로 행위를 보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세계에서는 행위의 수에 버금가는 제사가 필요하지만 모든 존재에게 자신의 존재 정체성은 처음 창조될 때 한 번 정해지는 것이므로 이것은 횟수가 의미가 없다. 한 번뿐이다. 예수님의 제사는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한 번의 제사다. 행위는 존재에 종속된 것이므로 존재가 정결케 되면 모든 행위는 정결해진다.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않으므로 기도할 때 마다 회개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어떤 행동이 진리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씀을 바로 안다면 진리는 존재의 정체성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맞는 삶이 주어지는 것이다. 칼이 못 박는 것에 사용되고 있다면 자유롭지 않지만 부엌에서 요리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면 자유한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자유가 아님은 당연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는 버려진 것이다. 존재가 목적이 없어진 것은 쓰레기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어디에도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님 앞에 진리의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부분이 없다. 예수님의 제사, 단 한 번에 드려진 제사는 행위 기반의 제사가 아니라 존재 규범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드린 단번의 제사로 얻는 구원이 행위로 지은 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존재 정체성의 회복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진리라는 것이 이를 확증한다.


진리를 알고 죄를 범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그것을 부인하는 것을 말씀하신다. 여기부터는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십자가에서 발견한 사람만을 위한 말씀일 수 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데 진리를 알고 죄를 범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자신이 교회에 다니고 교회가 가르쳐준 대로, 혹은 교리문답대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해당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염려해야 할 것은 자신이 정말로 구원을 받고 지금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중한 말씀이다. 일단 예수님의 제사가 단 번에 드린 제사이므로 다시 드려지지 않기에 제사가 더 이상 없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제사로 인하여 죄가 없어지므로 또한 구속의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다. 이것이 진리를 아는 사람의 상태다. 그 상태 그대로는 더 이상의 죄도 없고, 따라서 제사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 진리를 부정하는 죄를 범하면 다시 드릴 제사가 없다는 말씀이다. 이미 다 드려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한 것은 하나님 아들이 피 흘려 이룬 구원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니 예수님을 능욕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누구에게 능욕을 당하는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 능욕당하지 않는 분을 설레발 치듯 혼자 쇼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는 것에 있다. 예수님이 모든 인생의 존재 정체성을 가진 유일한 분인데 그 분과 상관없는 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것일 뿐 아니라 유일한 대안을 외면하였으니 더 이상 답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진리를 아는데 어떻게 그것을 버리는 죄를 범하는지 일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것을 하나님의 무능함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선택하고 믿는 것을 강제하지 않으신다. 프로그래밍 해 놓은 로봇처럼 사람은 천편일률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찬양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해 놓으셨다. 사라마에게 이 선택의 권한을 주지 않았다면 순종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은 얼마든지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든지 아니면 불순종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당연히 책임이 뒤따른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고서도 얼마든지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귀하게 여긴다. 귀하게 여길 뿐 아니라 그 귀함이 자신에게 너무 맞고 만족스럽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것에서 잘 떠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행동과 결정은 그럴 만한 존재가 그럴 만한 행동을 한다. 콩 심으면 콩 나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리에 맞는 삶을 산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한 가지 눈 여겨 볼 것은 십자가의 존귀함을 대하는 기준이다. 십자가의 구속이 너무 귀한 것이기에 그것을 누리는 사람도 귀하다. 여기서 사람들은 간혹 오류를 범한다. 십자가가 귀한 것은 세상에서 낮아졌기 때문에 귀한 것인데, 십자가의 귀함을 가졌으니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귀한 존재가 된 것으로 여긴다. 진리의 존귀함을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매기기도 한다. 예수님의 존귀함을 알고 있으니 세상에서 대접을 받는 것이 합당하는 생각이나,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를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존귀함은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을 수 있는 귀함이지 세상에서 대접받는 귀함이 아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다시 사함을 받을 수 없는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진리를 바로 알면 이럴 수 없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말씀을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는 것을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하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진리를 알고 범죄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하여 확신하고 자기 삶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1차 대전 당시 부대에 있는 의무관이 병사의 정신상태를 감정하여 미쳤다고 생각되면 전역을 시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려면 병사가 와서 자신의 정신 감정을 의뢰해야 한다. 그런데 한 부대에 전투에 나가면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보일 수 없는 미친 전투력을 보이는 병사가 있었다. 모두들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의무관에게 저 사람은 전역의 대상이 되느냐고 물었다. 의무관은 된다고 했다. 그러나 곧 이어 의무관은 그러나 그 사람은 전역할 수 없다고 했다. 질문한 병사가 이유를 물었다. 그것은 그 병사가 의무관에게 와서 자신이 미쳤는지 정신감정을 의뢰해야 전역 판정을 내릴 수 있는데 문제는 그 병사가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닌가 하여 의무관에게 정신감정을 하러 오는 순간 그 사람은 정상이라는 것이다. 정상인 사람이어야 그 병사의 행동이 미친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병사가 자신의 행위가 미친 것이 아닌가 판단할 때 이미 그는 정상인 사람이 된 것이므로 전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순간 온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여기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진리를 온전히 알면 죄를 범할 수 없다. 이것이 먼저 있는 대 원칙이고 하나님의 법이다. 이 말씀을 듣고 ‘혹시 나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진리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걱정이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구원을 돌아봄이 먼저다. 미안하지만 진리를 알고 다시 죄를 범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자신이 순종하는 결정을 할 수 있다. 그와 같이 진리를 알고 난 다음에 그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버릴 것인지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진리를 알았다는 것이 이미 온전한 선택,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 본성을 가지고 다른 선택을 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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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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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희생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자신이 죄 없다는 것을 담대히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스스로 가지겠다 신념을 가진다고 생각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원의 담대함에 이르는 것은 오직 하늘의 참 것이 모형인 자기 삶에 하나가 되어 내용과 형식이 하나된 사람,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념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다. 하늘의 변화에 땅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우리 마음에 뿌림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것이 몸을 씻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몸을 씻었다는 것은 행위가 거룩해졌다는 것이다. 행위를 보니 스스로를 죄 없다 말하지 못하는 신앙이 구원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성소의 휘장이 갈라져서 누구나 지성소 곧 죄사함 없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계획이며 뜻이다. 그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예수님께서 육신을 깨어 그것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의 행위에 발목 잡혀 구원은 받았지만 죄는 있다는 말도 안되는 것은 신앙이다, 경건이다 말하고 있다. 믿음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가 마음에 뿌림을 받는다면 자신이 육신의 행위를 본질로 보는 존재여서 육신을 보고 자신과 사람을 정죄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깨어 하나님 아들임을 보이셨는데 사람들은 육신의 의로움과 평안을 보존하는 것이 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입으로야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알지 못하는 “주여, 주여”라는 외침에 불과하다.


예수님을 믿는 도리는 행함을 본질로 보지 않는 것이다. 행함은 속에 있는 것의 표현이다. 하늘의 참 된 것이 땅의 모형으로 나타난 것과 같은 이치다. 예수님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옥합과 같이 깨셨는데 사람들은 왜 자꾸 육신의 경건과 행함의 의로움과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 육신의 부귀영화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는지 알 수 없다. 믿음의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즉 인생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두신 뜻을 보이셨다. 그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지으신 뜻에 순종하고 그 말씀이 나의 육신이 됨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고 믿음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소망을 붙잡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보이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서 정작 자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행위를 보고 죄를 판단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전하는데 사람은 한결같이 모형과 형식을 본질로 섬긴다.


이런 사람들은 모일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에 대한 기준이 각기 다르므로 모여서 무엇을 도모할 수 없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흩어진 것이 이것이다.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복선으로 깔려 있으므로 자기 육신이 곤고해지는 의로움에 서로 동참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이 다르다. 같은 ‘민주’라는 말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아래서 다른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말은 서로 공감하는 듯 합격자가 하나 밖에 없는 시험에 서로의 자녀가 응시했다면 복이라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일 수 없다. 말이 달라서가 아니라 말이 주는 의미와 자기 이익이 다르다. 바벨탑을 쌓을 때 말이 달라진 것도 이것이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이라고 했다. 모일 수 없는 마음이니 그것이 습관이다.


이 습관이 없는 사람은 서로가 서로의 본성을 알기에 당연히 사랑과 권면으로 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짧은 말로 표현하면 “네가 옳다”이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든지 모일 수 있다. 모이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은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이고, 상대가 내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모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이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이유다. 몸이 모이라는 것이 아니라, 모일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이 죄가 없다는 것을 온전하고 담대하게 믿을 수 있으면 쉽게 모이게 된다. 이것이 모이는 것을 폐하는지 모이게 하는지를 결정하는 습관이고 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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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분명하게 “다시 죄를 위하여 드릴 제사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만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도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겼다고 말씀하셨다. (요 5:24)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


이렇게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데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믿는데 또 회개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사가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것인데 이 중차대한 문제를 기독교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죄 지으면 당연히 회개해야지’라고 생각한다. 그게 한 번이면 맞는 말이지만 두 번 이상이 되면 성경에 반하는 것이다. 이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성경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고 그러고 있다.


그리고 반대로 세상이 터부시하지만 자기 생각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또 세상의 법과 도덕이나 시선 같은 것은 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것에 대하여 죄의식조차 없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면 무시한다. 교회 세습과 같은 문제가 그렇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가장 현란하게 보여주는 곳들은 대부분 이단이다. 뻔뻔하다. 자칭 정통의 옷을 입고 있는다고 이 뻔뻔함이 도덕이 되지 않는다.


거듭 강조하지만 사람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죄의식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심판과 정죄의 기준이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하루를 살면서 운전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동으로 죄를 범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거짓말은 어떤가? 거짓말에 하얀 거짓말이 어딨나? 하얗든 검든 다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이런 행위들을 가지고 죄를 논하는 이상 누구도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율법이라는 것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생각이고, 본질 없이 형식으로 온전케 되려는 생각이기에 율법으로 온전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위로 죄를 심판하고 정죄하므로 계속 그 죄를 해결해야하는 것은 율법 안에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내용 없는 형식을 대변한다. 행위를 본질로 여기는 것을 인함이다. 겉모습과 행위를 본질로 여기는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죄를 가늠한다. 행위를 정죄한다. 그러나 분명하게 그것은 반복되고 끊이지 않는다. 레위 계통의 제사가 그렇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온전하지 못함을 인하여 오셨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구원을 믿으면서 자신의 행위를 심판의 대상으로 보고 정죄하고 회개하기를 반복하면서 한 편으로는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하고 또 한 편으로 죄 없다고 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회 칠한 무덤의 모습에 불과하다. 외식 그 자체다. 예수님의 구원이 자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자기 것인 양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욕 보이는 것이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6)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단 번에 드린 제사로서 나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오늘 나는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부인하려 해도 믿음이 상처 나지 않는 상태여야 한다. 이것은 이론이 상상의 경지가 아니라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고 얻었다고 믿는다면 이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오늘 나에게 다시 회개해야 하는 제사가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죄와 불법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묵인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사건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죄가 없기 때문이다. 기억할 것이 없어졌다는 말씀이지 뻔히 죄가 있는데 묵인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까지 가기도 전에 자기 자신이 이미 스스로에 대하여 죄 없다 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증거도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가 아니다. 죄가 있는 것이다. 구원받았지만 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을 정죄하는 기준이 행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다. 레위 계통의 제사 속에 있고,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는데 그래도 스스로를 죄 없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불경스럽고, 구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양심이 없는 것이다. 그런 상태로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은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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