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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7-16) 믿음으로 -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17. 04:00 Writer : 김홍덕

약속을 받지 못한 나그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명령 같지만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주권자로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이 되고, 믿음이 없으면 명령이 된다.


아브라함의 최종 종착지는 헤브론이다. 그곳에서 죽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 헤브론은 아니다. 헤브론을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보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것을 예표하는 땅이 가나안이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종살이 하다 모세에게 이끌려 도착한 가나안 땅은 보이는 것으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다. 그러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경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땅은 항상 사람을 의미한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도 그것이다. 지시할 땅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한 땅은 모두 사람의 자리다.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약속도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라는 것은 한 정체성으로서 하나님의 의가 내용이고 본성인 사람을 말한다.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신의 의가 그 사람에게 있다는 인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약속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숙제나 의무 같이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사람의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 그 형상대로 만든 사람이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상이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되려면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데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낼 수는 없다. 흉내는 가능할지 몰라도 향기까지 담은 그림은 있을 수 없다.


앞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 믿음이 있으면 약속이 되고, 믿음이 없으면 명령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의무로 느껴지는 사람,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면서 사람이 왜 보이지도 않는 신의 형식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히브리서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그네와 같이 살았던 이유가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무엇인지, 그 결과가 어떤 유익인지를 가늠한 것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씀이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자기 생애에 다 이루어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서 나그네와 같이 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 언제든지 자기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명령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기들의 행위에 따른 본상이나 징계도 논점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자신의 주로 믿었고, 그들이 믿는 주는 신실하고 선한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약속이었다. 단지 그들은 그 약속의 본체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약속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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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4-12) 믿음으로 -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16. 08:19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과 사라


아벨과 에녹은 그 행적이 분명하지 않지만 믿음으로 살았다는 말씀을 한 것은 그들에게 나타난 일이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먼저 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에게 나타난 것은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특히 아벨의 경우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불행한 일을 당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이 바라는 것이 성취되는 것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일이 믿음으로 된 것임을 설명한다. 히브리서가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로봇과 같이 하나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아주 늙어서 아들도 얻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한 땅에 가면 평안한 삶이 주어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도 아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이 좋은 땅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도 아니다. 그가 믿었던 것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신실함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얻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결과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주 다르다.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결과를 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실체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평소에 책상에 물만 엎어져도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한 것이 없냐고 말하기도 하는 삶이 아닌가? 물이 엎어지는 것은 불행한 것이며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것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따라 간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사람도 누가 와서 어디 가자고 할 때 어디 가는지 말하지 않으면 거의 가지 않는다. 단 하나 가자고 하는 사람을 신뢰할 때만 어디 가는지 묻지 않고 따라가는 것과 같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하나님이 시키는 것을 했을 때 얻게 될 유익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어디로 갈 것인지 말씀하지 않아도 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벨의 일도 그렇고, 스데반과 바울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일도 그렇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과 뜻과 의가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렸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안과 성공을 늘 담보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만 사람을 자신의 목적대로 사용하실 뿐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안위를 얼마나 중요하게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처음부터 자신이 조성한 인생이 아닌데 자기 삶을 사랑한다. 이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하나님이 사람을 마음대로 쓰시는 일로 사람이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하나님이란 신을 어떻게 믿느냐의 차이가 드러난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주인으로 그리고 그 행사가 선한 분이라는 것을 믿느냐 아니냐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주며 주관자고 그 성품이 인자하고 선하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뼈대고 기둥이다.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감사한 것이 된다. 특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육신의 고통과 불행이라는 것도 힘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이것에 생각이 미치느냐 아니냐가 믿음이 어떠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사라의 일도 함께 언급하는데 그 또한 마찬가지다. 사라가 믿었던 것은 아들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을 때 웃었다. 사라는 자신이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믿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신실한 분이라는 것은 믿었다. 그래서 웃었을 때도 책망 받지 않았고, 이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선진으로 영광을 얻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히브리서가 ‘믿음으로’ 된 것이라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좋은 결과를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조성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 선하고 신실한 일이라는 것을 믿었다.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과 그의 성품을 믿은 것이다. 그런 믿음이 나타나니 사람들이 선망하는 결과들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대로 아벨과 바울과 스데반과 야고보와 같이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기는 삶도 있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히브리서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으로 된 일들이 나타나게 한 보이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 정체성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내용을 가진 분이라는 것, 모든 의와 선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선진들의 일로 나타난 것이다. 하늘의 참 것을 믿었고, 그것이 세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일이 바로 믿음의 선진들의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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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4-12) 믿음으로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히브리서 Date : 2020. 4. 15. 19:33 Writer : 김홍덕


히브리서는 믿음에 대한 선진들의 일들을 열거하고 있다. 먼저 가인과 아벨의 일,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 그리고 노아와 아브라함과 사라의 일을 설명하고 있다. 노아와 아브라함은 믿은 내용과 결과가 분명하기 때문에 우선은 설명하기 쉽다. 하지만 노아나 아브라함이 얻은 결과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편견을 가져올 소지도 높다.


생각해보면 아벨과 에녹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선명하지 않다. 에녹은 그냥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만 있다. (창 5:24) 그리고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성경에서 가장 오랜 산(969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에녹에 대한 기록의 전부다. 가인과 아벨에서 주인공은 오히려 가인이다 싶을 정도다. 아벨의 일은 없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음을 인하여 가인이 질투하고, 그 질투로 인하여 친동생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아벨과 에녹이 믿음이 있었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특히 아벨은 믿음의 결과가 살인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결과로 기대하는 것과 아주 다르다. (사람들이 성경의 이런 부분을 왜 주목하지 않는지 신기할 정도다) 예수님은 더 그렇다. 세상 실패자의 극한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구하는 것은 정말로 생각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것으로 보아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은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과 다르다. 즉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니 그것을 주실 것이라 믿는 믿음과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면 아벨은 살해당하지 않고 보호받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믿음의 방향과 대상의 차이다. 먼저는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향하는 방향이다.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충성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이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사 사람이 바라는 것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교회가 발전하고 기도와 성경을 읽는 신앙 생활을 위한 유익에 관한 것이라고 해도 방향이 사람이 원하고 하나님이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벨을 생각해보면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간구도 마찬가지다. 결국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임하심과 주관하심과 사용하심을 허락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벨과 같이 살해당하거나, 스데반과 같은 많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믿음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믿음의 결과다. 사람들은 육신에게 조금만 불행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벌을 주시는가?’ 생각하고, ‘내가 믿음이 없고 무엇을 잘못했는가?’ 경계한다. 즉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육신의 정욕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노아와 같은 선진들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들을 수 있지만 아벨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는 어렵다. 믿음의 실체가 불분명해 보이기도 하고 결과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것과 반대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과를 믿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믿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방향성과 연관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결과를 보장하거나 이루어 주실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주며 나의 존재 목적과 의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결과가 아니라 대상을 믿는 것이다.


믿음이란 내가 생각하는 것, 그것이 사람 생각에 설사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쓰시든 내가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아벨을 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에녹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위해서 먼저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했다. 아벨과 에녹, 노아와 아브라함으로 나타난 것들은 모두 그들이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겠다고 하시는 의에 순종한 사람들임을 증거한다. 그들이 형을 대신해서 죽겠으니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도 없고, 나를 죽지 않고 하늘로 올려 달라 한 적도, 세상이 망할 때 나를 구원해 달라는 말도 한 적이 없고, 내가 살 땅을 정해 달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대로 그들이 순종했다는 것이다. 시작도 하나님이 결과도 하나님 맘대로인 일에 자신을 드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믿음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 주었기에 하나님께서 맘대로 하신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을 그들이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과를 기대하거나 구하거나 설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무엇을 하려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그 믿음이 나타난 것이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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