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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는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세우고자 하시는 권면의 말씀이다. 이런 권면이 필요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희생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지 않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정체성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인가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은 믿는데, 정작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 아들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있다는 의미다. 더 설명을 이어 가기 전에 항상 나오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땅’은 언제나 사람이다. 사람이란 정체성이 땅이다. 12장 18절에서 “너희의 이른 곳”도 사람의 정체성이다. 각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이냐는 것에 관한 말씀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히브리서는 사람이 이르러야 하는 자리, 사람의 모습은 불붙는 산을 만질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같이 말하는 소리나 그 소리를 듣는 자리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선 사람이 이르러야 할 자리는 소리를 듣는 자리가 아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다.


이것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다. 반면에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전했다고 했다. 이것의 차이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다. 


소리는 신호와 같다.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신호가 소리다.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그 자리에 설 것인지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알려 준 것과 같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가면 백성들도 가고, 서면 장막을 친 것이 그것이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소리다. “목사님 술 마시는 것이 죄인가요?”로 대표되는 질문들이 바로 이 신호를 구하는 것이다. 즉 행동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알려주는 신호가 소리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해도 되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신호를 기다리는, 소리를 듣고자 한다.


율법적인 신앙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바로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폭풍과 나팔 소리를 듣겠다는 것, 그것에 순종하겠다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닌데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사람 이상의 것을 사모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사람의 육신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우리가 이를 곳, 사람의 온전한 정체성은 그곳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비단 히브리서만의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과 육신 그 능력과 한계와 정체성을 뛰어 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을 때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바위를 깨는 바람이나 돌을 불사르는 불꽃으로 임했을 때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돌을 불사르는 불꽃과 사람이 만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 하나님과 만나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육신의 능력 이상의 존재가 되겠다는 의미다.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이 좋다고 항상 유혹하는 이가 있으니 바로 마귀다. 예수님께서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일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마귀의 유혹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을 가진 일반적인 인간 이상의 존재’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구속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담대히 그 구속을 믿지 못하는 것은 마음 속에 육신 이상의 존재가 되려는 생각이 항상 있고, 그 생각에 자신의 행위와 생각과 형편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교하면 도무지 자신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한 것과 같은 존재들의 철학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는 없다.


역설적으로 그런 생각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이다. 그 생각으로 스스로를 보니 하나님과 같아 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런 생각이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구속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폭풍과 흑암의 소리를 듣고 불을 손으로 만지려는 생각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율법에서 비롯된 것이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모습이기 때문이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런 신앙 안에서 사람을 만나시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는 우리가 이른 자리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 자리는 모든 사람이 이미 있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련한 자리를 말한다. 지금 히브리서는 그 자리로 가자는 말씀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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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2장 후반부에는 하나님의 어떤 경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의 일과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우상을 만든 일, 그리고 가인의 일과 같은 모습에 대한 경고다. 의도하고 있는 바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이런 말씀이 나왔다고 이 순간에 매몰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히브리서의 전개와 무관하게 ‘하나님이 은혜 주실 때 잘 받지 않으면 벌을 받는구나!’라고 이 말씀을 보면 주제를 놓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드렸음을 알고 있음에도 하나님께, 예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시는 말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은혜 가까이에 있는데 정작 그 은혜를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을 알고 믿으면서 정작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바로 이 히브리서의 권면을 자기 이야기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있을 때 시내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있었다. 하나님이 강림하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의 예시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흠 없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시내산에서 있었던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은혜에 대한 배신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섬기고 있느냐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즐거움이 동력이어야 하는데 교회에 가지 않으면 일어날 불행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에서 이 히브리서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즐거움이 동력과 본질이 아니라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은 설교를 듣고 있으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진정으로 즐거움을 알고 있다면 즐거움만 이야기하면 된다. 즐거움은 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로 사람을 독려하지 않아도 된다. 즐거운 일은 누구나 좋아하고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즐겁고 기쁜 일이라는 것만 깨달으면 따로 시키지 않아도 그것을 하려고 늘 애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받는 신앙의 권면은 그렇지 않다. 산앙적 권면과 설교의 절대적 비중이 ‘~하지 않으면, 네가 원하는 것, 좋은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앞서 하나님의 징계라는 관점과도 많이 다르다. 하나님의 징계는 좋은 것을 보이심으로 자신이 징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색깔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것도 같다. “하나님을 기쁘게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내산 아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징계를 받습니다”라는 것이 히브리서 12장 후반의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희생이 우리에게 기쁨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진동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나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가 없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진동하지 못할 나라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더 이상 나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것을 은혜로 받았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게 된다는 말씀이다. 더 이상 죄 없는 인생이라는데 그것이 기쁘지 않으면 기쁠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 예수님이 우리를 더 이상 죄 없는 자로 구속하셨음에도 오늘도 기도할 때 마다 회개하여 혹시 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재앙에 보험을 들려고 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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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손,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를 회복하여 고침을 받으라고 하고 이어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회복하면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고 했다면 회복하기 전의 상태가 화평과 거룩함이 없었다는 말이다. 화평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않은 상태가 바로 손이 피곤하고 무릎이 연약하며 곧은 길로 가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사람이 서로 화평하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아주 다양할 것 같지만 서로가 의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그 하나 때문이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그 하나가 모든 갈등의 근본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므로 갈등하는 사람이라면 구분되지 않고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 그것이 거룩하지 않은 것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분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서로 화평하려면 서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같거나 둘 중에 한 사람 이상이 죄인의 자리로 가는 것밖에 없다. 서로 다른 것을 옳다고 여기는 둘 이상이 화평할 방법은 없다. 물론 하나가 압도적인 권력이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화평하게 만들 수 있겠지만 그것은 화평이 아니다. 따라서 화평하려면 같은 것은 의롭고 선하게 여기거나 아니면 둘 중에 하나 이상이 자신이 옳지 않다는 자리로 가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신 뜻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의 모습과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서로 달랐다. 유대인들은 세상적 가치로 높고 귀한 사람이어야 하나님 아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가지 의가 충돌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자신이 낮은 자리로 가셨다. 낮은 자리로 간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낮추고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서로 다른 의로움이 충돌했을 때, 그러니까 화평하지 못할 상황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이 죄인이 되고 옳지 않은 자가 스스로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면 그리스도라는 본성과 성령이 그렇게 이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새 그 자리로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드리시고 더 이상 제사가 없는 제물이 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화평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화평의 왕이고 막힌 담을 모두 허신 것이다. 사람이 서로 갈등하는 모든 담은 내가 죄인이 되면 다 무너지기 때문이다. 둘 중에 하나님 아들이 스스로 죄인이 되므로 옳다는 것이 하나만 남게 되면 화평이 이루어진다. 화평하라는 것은 결국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제사가 자신의 제사가 되는 것이 화평함과 거룩함이다. 이 화평이 거룩한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분이 되기에 거룩이다.


이것을 모아보면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 곧 하나님의 성품이 삶의 내용이 되고 육신은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이 되는 하나님 아들의 자리를 떠난 죄에서 예수님이 드린 십자가의 희생을 보고 자신이 징계 가운데 있었음을 알고 그 징계 가운데서 피곤하고 연약하며 곧지 못한 삶을 살던 자리에서 예수님의 구속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화평과 거룩함이 회복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이 더 이상 죄 없는 존재임을 믿는 담대함에 있다. 담대함은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근거도 없이 나서면 심한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담대함은 자신의 삶이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생긴다. 무심한듯 사는데 예수님과 같이 낮은 자리로 가는 자신을 볼 때 담대해지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면 더 이상 손도 피곤하지 않고 무릎이 연약하지도 않으면 걸음은 항상 곧게 된다. 모든 생명이 자기 본성에 맞게 살 듯 스스로 안다.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그렇게 할 의도나 작정함이나 신념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보면 “너 옳다”고 하고 자신이 육신으로 수고하는 종의 자리로 가서 사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본다. 그렇게 자신이 사람들 사이에 화평함을 이루고, 남들이 살지 않는 구분된 삶을 사는 것을 본다. 그것에서 자신이 죄가 없음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자신이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자신도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 때가 되면 예수님이 구속이 나에게 더 이상 죄가 없게 한 제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항상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이고, 삶에 담대하며 화평과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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