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는 만약 예수님께서 땅에 계셨다면 대제사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땅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말을 단순하게 예수님은 원래 하늘에 계시던 분이기 때문이라고 할 것은 아니다. 왜 땅에서 대제사장이 날 수 없는지를 알아야 이 말씀을 바로 아는 것이다.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히 8:4)


하나님 아들은 어느 곳에 가면 그 정체성이 변하는 분이 아니다. 땅에 계시나 하늘에 계시나 언제나 하나님 아들이고, 또 온전한 제사장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땅에 계시면 제사장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땅에 있는 것이 온전한 제사의 제물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율법 아래 있는 것, 율법대로 드리는 것이 온전한 제사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고, 땅에 있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땅은 근본적으로 하늘의 어떠함을 보이는 곳이다. 땅이 본질이 아니라 하늘의 상태가 본질이다. 땅에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봄이 되어 땅에 꽃이 피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의가 본질이라는 말이다. 율법과 규례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형식이지 본질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생각은 히브리서의 밑바닥에 흐르는 가치관이다. 11장에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정리된다. 


예수님께서 땅에 계셨으면 온전한 제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땅에 오면 온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땅에 있는 것은 예수님과 다르다는 말이다. 땅에 있는 율법과 그 아래 있는 제물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앞장에서부터 계속 땅의 것이 온전하면 예수님께서 왜 오셨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땅이 온전하지 않은 이유는 땅과 눈에 보이는 것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이자 본질이 있고, 그것을 표현한 형식으로서 땅과 사람과 율법이 있는 것이다. 율법이나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된, 즉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예수님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 땅에 있는 율법들이 늘 하나님과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것도 내용인 하나님의 의는 버리고 형식만 취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형식만을 본질로 보고 그것에 의지하여 드리는 제사와 제물이 온전할 리가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도 역시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약속과 증거, 보이는 것과 나타내려고 한 것과 같은 대비는 물로 제사와 관련하여 레위 계통의 제사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하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온전함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히브리서를 읽는 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인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한다. 그래서 12장에서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것이 더 나은 약속이라는 말씀을 하기 위함이다. 율법과 그 아래에서 난 규례와 제물은 나타난 것일 뿐 나타내려는 본질 그 자체가 아니다. 증거이긴 하나 약속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려면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것도 아니고, 형식인 율법과 규례와 또 눈으로 대하는 성경의 문자를 섬기고 지킬 것이 아다. 핵심은 왜 그런 말씀을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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